종루 ()

목차
관련 정보
보신각
보신각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 한성부의 도성내 중심이 되는 곳에 종을 단 누각.
이칭
이칭
종각
내용 요약

종루는 조선시대 한성부의 도성내 중심이 되는 곳에 종을 단 누각이다. 1396년에 청운교의 서쪽에 2층 5칸으로 세웠다가 1413년에 순금사(巡禁司)의 남쪽, 광통교의 북쪽인 오늘날의 종로 네거리로 옮겨졌다. 1440년에 동서 5칸, 남북 4칸의 다락 형식 건물로 고치고 아랫 부분을 십자형으로 뚫어 인마가 통행할 수 있게 하였다. 종루에 걸린 종을 쳐서 인정(人定)과 파루(罷漏)을 알렸으며 불이 나도 종을 치게 하였다. 한성부의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종루를 중심으로 도성 내에 시전(市廛)이 건립되어 도시 상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목차
정의
조선시대 한성부의 도성내 중심이 되는 곳에 종을 단 누각.
내용

운종가(雲從街)주1의 동편, 즉 동서 대문을 연결하는 대로와 대광통교(大廣通橋)에서 주2을 잇는 대로의 접점에 종루를 세우고 큰 종을 달았다. 오늘날의 종로 네거리에 있는 주3을 말하는 것으로, 조선 초기 이곳을 중심으로 도시 상업이 발달하였다. 종루에 걸린 종을 쳐서 인정(人定)파루(罷漏)를 알렸을 뿐 아니라 도성내에 큰 화재가 나도 종을 쳐서 모든 주민에게 알렸다.

1396년(태조 5) 종루에 달 종을 만들었으나 시험 타종 때 파열되어 다시 주조, 2년 뒤인 1398년 완성되었다. 종을 처음 달았을 때 개국공신 권근(權近)은 종명서문(鐘銘序文)에 종각을 짓고 종을 달게 된 이유를 ① 새 왕조의 개국을 후세에 전하고, ② 아름다운 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후세인들의 이목을 깨우치고, ③ 도시와 통도대읍(通都大邑)에서 새벽과 저녁에 종을 쳐 백성들의 일하고 쉬는 시간을 엄하게 한다고 하면서, 종의 용도가 다양하다고 하였다.

당시 종루는 2층 5칸으로 청운교(靑雲橋)의 서쪽에 있었다. 그러나 1413년(태종 13) 행랑(行廊)의 주4을 다시 시작할 때, 종묘 남로(南路)에 5칸의 층루를 세우면서 순금사(巡禁司)의 남쪽, 광통교의 북쪽인 오늘날의 종로 네거리로 옮겼다. 그 뒤 1440년(세종 22) 종루의 주5가 이루어졌다. 이 때 종루의 아랫 부분이 십자형으로 뚫려 인마(人馬)가 통행하였다고 한다. 1458년(세조 4) 개구에 맞추어 대종(大鐘)을 다시 만들어 종루에 걸었다. 이 때 종루 크기는 동서 5칸 · 남북 4칸으로 26평이 조금 넘는다. 오늘날로 보아서는 대단하지 않지만 당시로서는 하나의 단위건물로서, 특히 다락[樓]형식의 건물로는 대단히 큰 건물이었다.

종루의 높이에 대하여서는 전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1488년(성종 19)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의 주6에 “종루가 있는데 … 매우 높고 커서 국도 안에 우뚝 솟았고, 길을 둘러 높고 높도다.”라고 한 데에서 그 규모가 광대하고, 웅장한 자태였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 불탄 뒤 재건되었으나, 규모는 처음보다 작은 17평 정도로 오늘날까지 전해져오고 있다. 한편, 『경국대전』에 의하면 “ 의금부는 화재 감시인을 정해 항상 종루에 올라 간망하게 하였는데 이궁이나 관청에 불이 나면 종을 치고, 민가에 불이 나도 종을 치게 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조선시대는 종루를 중심으로 도시 상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특히, 이곳을 중심으로 한 시전(市廛)의 성립 과정은 대체로 태종 때에 이룩되었다. 한성부의 도성 내 시전 건립은 태종이 도성을 한성으로 옮긴이래 네 차례에 걸쳐 궁궐과 방(坊) · 이(里)의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진행되었다. 즉, 도성내의 간선도로 좌우 양측에 막대한 국가 비용과 노력을 기울여 정주상인(定住商人)의 점포를 관설(官設)하였다. 여기에 상민(商民)을 초치해 최대한의 어용적 상업 경영에 종사하게 하고, 관부(官府) 및 양반층을 비롯한 수도 주민들의 경제적 수요를 충족시켰던 것이다.

종루를 중심으로 한 시전 건립은 1394년(태조 3) 운관사(雲觀事) 권중지(權仲知)의 왕도시전(王都市廛)에 대한 도안이 마련됨으로써 비롯되었다. 1399년(정종 1) 혜정교(惠政橋)로부터 창덕궁동구(昌德宮洞口)까지 행랑시전(行廊市廛) 좌우 800여칸을 주7하여 착수한 일이 있지만 실제로 완성되지 못하고, 태종이 한성에 천도하면서부터 본격화되었다. 즉, 1410년 먼저 시전의 지역적 한계를 정하고 대시(大市)는 장통방(長通坊 : 지금의 종로구 관철동 · 장교동), 미곡 잡물은 동부 연화동구(蓮花洞口 : 지금의 연지동) · 남부 훈도방(薰陶坊 : 지금의 을지로2가 부근) · 서부 혜정교(지금의 종로1가 福淸橋) · 북부 안국방(安國坊 : 지금의 안국동) · 중부 광통교(지금의 남대문로와 광교 사이)에서 하고, 우마 등은 장통방 하천변에서 각각 매매하도록 하였다. 이 밖에 여항소시(閭巷小市)는 각각 소거(所居)의 문전(門前)에서 영위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계획된 시전 건립은 1412년 2월부터 4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제1차는 1412년 2월부터 4월까지 혜정교로부터 창덕궁 동구에 이르는 800여칸의 좌우행랑이 건조되었고, 제2차는 1412년 5월 궐문에서 정선방동구(貞善坊洞口)까지 행랑 472칸이 건조되었다. 제3차는 같은 해 7월부터 다음 해 5월까지 종루로부터 서북쪽의 경복궁까지와 창덕궁에서 종묘 앞 누문(樓門)까지, 그리고 남대문 전후까지 모두1,360여칸이 완성되었다. 제4차는 1414년 7월 종루로부터 남대문까지와 종묘 앞의 누문으로부터 동대문까지 좌우행랑이 조성되었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동국여지승람』
『경국대전』
『증보문헌비고』
『만기요람』
『조선부(朝鮮賦)』
『서울육백년사』 제1권(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77)
『조선시대 한성부연구』(원영환, 강원대학교출판부, 1990)
「16세기 장시의 성립과 그 기반」(이경식, 『한국사연구』 57, 1987)
「조선후기 장시의 사회적 기능」(김대길, 『국사관논총』, 1992)
주석
주1

조선 시대에, 서울의 거리 가운데 지금의 종로 네거리를 중심으로 한 곳. 육주비전이 있었다. 우리말샘

주2

조선 시대에 건립한 한양 도성의 남쪽 정문. 사대문의 하나이다. 우리나라 국보로, 국보 정식 명칭은 ‘서울 숭례문’이다. 우리말샘

주3

큰 종을 달아 두기 위하여 지은 누각. 우리말샘

주4

토목이나 건축 따위의 일. 우리말샘

주5

건물 또는 단체나 조직 따위의 구조를 고침. 우리말샘

주6

중국 명나라의 동월(董越)이 우리나라의 풍토를 부(賦)로 읊은 책. 저자가 조선 성종 19년(1488)에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다가 돌아간 다음 명종 때에 간행하였다. 1권. 우리말샘

주7

집 따위를 짓거나 물건을 만듦.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3)
집필자
유원동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