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동 고분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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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울산 중산동 고분군 전경
울산 중산동 고분군 전경
선사문화
유적
문화재
울산광역시 북구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 · 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시도기념물.
이칭
이칭
울산중산리고분군, 울산중산리유적
시도지정문화재
지정기관
울산광역시
종목
울산광역시 시도기념물(1997년 10월 09일 지정)
소재지
울산 북구 중산동 616-1번지 일원
정의
울산광역시 북구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 · 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시도기념물.
개설

1997년 10월 9일 울산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1만 5,615㎡이다. 일명 ‘울산중산리유적(蔚山中山里遺蹟)’이라고도 한다. 1993년 12월 경상남도 기념물 ‘울산중산리고분군’으로 지정되었다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1997년 10월 9일 울산광역시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경주에서 울산방면으로 약 2㎞ 떨어진 곳에 있는 이화마을을 중심으로 대략 20만평에 달하는 대지에 분포한다. 이 고분군의 주위에는 삼태봉(三台峰, 629m)과 동대산(東大山, 444m)의 고봉이 동해안과 자연경계를 이루며 병풍처럼 남으로 뻗어 있고, 서쪽에는 동천(東川)이 남쪽 울산만으로 흐르고 있다. 이 고분군의 주변에는 신라시대 축성했던 관문성(關門城)이 있다.

이 고분군은 울산시의 도시팽창으로 인해 이 지역에 대한 아파트건설공사가 실시됨에 따라 삼국시대의 매장유물이 노출되어 발견되었다. 발굴조사는 1991년 7월에 창원대학교박물관에 의해 긴급 구제발굴이 실시된 뒤, 1993년과 1995년 모두 3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내용

중산동고분군은 2∼7세기대까지의 신라고분이 조사되었다. 신라고분의 시기별 변천과정은 크게 전기의 움무덤〔土壙墓〕축조기, 중기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墓〕·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여러덧널식돌덧널무덤〔多槨式石槨墓〕축조기, 후기의 돌방무덤〔石室墳〕축조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의 움무덤 축조기에는 삼한 초기의 덧널무덤〔木槨墓〕채용기를 지나 2세기 후반대에 이르러 (장)방형 덧널무덤이 출현한다. 이러한 덧널무덤은 신라 고유의 묘제라 할 수 있는 돌무지덧널무덤 축조기인 5세기 초까지 모두 5단계 과정으로 변한다.

제1단계는 Ⅶ지구 1·4호분이 대표적이다. 전체 무덤구덩이의 장단비가 1.42∼1.57:1이고 무덤 형태는 네모모양에 가까우며 딸린덧널〔副槨〕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유형의 특징은 무덤구덩이 내부의 모서리에 원형 목주가 배치되어 있는 점이다. 이것은 덧널의 조립, 배치 등 덧널무덤 축조와 관계되는 것 같다. 무덤의 장축은 동서방향이다. 출토유물은 이른 시기의 대부광구호(臺附廣口壺), 완류, 낮은 굽다리를 가진 굽다리접시, 주머니모양작은항아리, 연질소성의 컵모양토기, 다량의 쇠투겁창〔鐵矛〕과 S자형재갈, 양익형화살촉 등이 대표적이다.

제2단계는 Ⅷ-90호분이 대표적이다. 무덤구덩이의 형태가 장방형에서 세장방형으로 변해가는 과정으로 장단비는 2.1:1 정도이다. 목주는 무덤구덩이의 네 모서리부에 있으며, 횡방형의 딸린덧널이 출현하고 있다. 전체적인 무덤의 구조로 보아, 신라식 덧널무덤 직전 단계로 생각된다. 유물은 신선로모양토기·화로모양토기·큰항아리 등 신기종의 토기가 추가 부장되며 철제단검이 매납되었다.

제3단계는 C-3호분이 대표적이다. 으뜸·딸린덧널식〔主·副槨式〕덧널무덤이 축조되는 시기로서 이른바 신라식 덧널무덤 유형의 출현기라 할 수 있다. 무덤구덩이의 장단비는 3:1 이상으로 길어지며, 무덤구덩이와 덧널 사이의 보강부에는 냇돌이 추가되는 특성이 보인다. 오리토기〔鴨形土器〕·신선로모양토기 등 이형토기들이 부장되었다.

제4단계는 ⅠA지구 23·34·74·75·100호분 등이 있으며, 조사된 덧널무덤 중 다수가 이 단계에 속한다. 중산동고분군에서 이 단계에 처음으로 방형상의 둘레돌〔護石〕이 출현한다. 으뜸덧널의 시신 안치부 바닥에 몸체가 긴 쇠투겁창이 철도레일처럼 펼쳐져 부장되는 특색이 있다. ⅠA지구 74·75·100호분에서 갑주류(甲冑類)가 등장하고 호형토기류의 부장 모습이 주목된다.

제5단계는 ⅠA지구 51·58호분, Ⅷ지구 14호분이 대표적이다. 신라 중기의 대표적 묘제인 돌무지덧널무덤 출현기이다. 외덧널식〔單槨式〕에서 여러덧널식〔多槨式〕묘제로의 변화가 보이며, 으뜸·딸린덧널의 길이 비가 1:1 정도로 접근한다. 무덤구덩이와 덧널 사이의 보강시설은 거의 돌로서 채워진다. 신라 돌무지덧널무덤 출현기의 고분으로 알려져 있는 경주 황남동 109호분 3·4덧널과 평행한 시기이다.

중기의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이다. 시기는 5세기대 이후로 완성형의 돌무지덧널이 등장한다. 아울러 ⅠA지구 151·80호분과 같은 구덩식돌덧널무덤도 분포한다.

후기의 돌방무덤은 앞트기식〔橫口式〕과 굴식〔橫穴式〕두 종류가 있다. 중산동고분군의 경우, 먼저 Ⅲ지구 13·14호분 등과 같은 앞트기식돌방무덤이 지상식으로 축조되었으며, 나중에 Ⅳ지구 7·12호분, ⅠC지구 4호분과 같은 굴식돌방무덤이 조영되었다.

의의와 평가

중산동고분군에는 2∼7세기에 이르는 삼국시대 신라 전기간에 걸친 고분이 약 850여 기나 존재하며 약 8,0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로써 그 동안 신라고분 고고학 연구에 있어서 문제점으로 지적된 자료적 한계가 극복되었고, 신라고분의 변천과정을 기술함에 있어 표식적인 중요 자료가 확보되었다.

이 고분군은 지리적으로 신라 중심지에서 다소 벗어난 외곽에 위치하지만, 경주분지에서 외동→울산→부산으로 이어지는 지리적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어 그 중요한 입지를 가늠케 한다.

이 고분군은 2∼7세기에 이르는 신라고분의 각 시기별 변천과정, 껴묻거리의 내용, 매장관념, 사상 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즉, 신라식 덧널무덤의 변천과정은 당시 신라사회에 내재되어 있던 매장관념을 알려주는 것이다. 따라서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이행되는 과정의 주체적 요인은 외부문화의 충격 속에 채택된 것이라기보다는 재지의 선대 묘제인 신라식 덧널무덤에서 자체적으로 변화, 전개된 것이라고 판단된다.

한편 이 고분군에서는 둘레돌을 가진 대형봉토분이 출현하고, 판갑옷·투구, 다양한 형태의 창과 큰칼의 다량 매장이 이뤄졌는데, 이는 중산리를 중심으로 강력한 무장세력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중요하다.

아울러 청동기시대의 장방형 주거지가 1993년에 조사된 바 있고, 신라시대의 이음독무덤〔合口式甕棺墓〕, 독널돌덧널〔甕棺石槨〕유구, 그 외 주조쇠도끼 거푸집 등의 야철유적 흔적 등이 확인되었다. 이로써 중산리유적은 신라시대 고분군임과 동시에 청동기시대부터 신라시대에 이르는 장기간에 걸쳐 생활했던 터전으로 여겨진다.

참고문헌

『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울산 중산리유적」Ⅰ(『창원대학교박물관 학술조사보고』제40책, 창원대학교박물관, 2006)
「신라식 토광목곽묘의 검토」(김형곤,『창원사학』3, 1997)
「중산리출토 철부의 금속학적 연구」(김수기, 한양대학교산업대학원석사학위논문, 1993)
「울산 중산리유적 발굴을 통하여 본 신라묘제의 기원」(이성주, 제1회영남고고학회학술발표회발표 및 토론요지, 1992)
「울산 중산리유적 발굴조사 개보」(김형곤, 제35회전국역사학대회발표요지, 1992)
집필자
김선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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