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장천 1호분 ( )

선사문화
유적
중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集安市) 황백향(黃伯鄕) 장천촌(長川村)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비천도 · 보살도 관련 벽화무덤. 횡혈식석실분.
이칭
이칭
집안통구고분군 장천묘구 제1호묘
정의
중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集安市) 황백향(黃伯鄕) 장천촌(長川村)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비천도 · 보살도 관련 벽화무덤. 횡혈식석실분.
개설

고분은 압록강 대안의 장천분지(長川盆地) 동부 낮은 언덕 한가운데 있으며, 장천2호분과 함께 장천고분군 최대의 봉토돌방무덤〔封土石室墓〕이다. 고분의 서북 가까운 거리에 장천2호분이 자리잡고 있다. 장천1호분은 1970년에 길림성 문물공작대와 집안현 문물보관소가 발굴조사하였다. 발굴 당시 이미 도굴당하여 모든 부장 유물은 도난당한 상태였다.

내용

봉분의 둘레는 88.8m, 높이는 약 6m이며, 무덤길〔墓道〕·앞방〔前室〕·용도·널방〔玄室〕으로 이루어진 2실분으로 무덤길의 방향은 서향이다. 앞방·용도·널방 내부 전면에 벽화가 그려졌는데, 앞방과 용도에는 석면(石面)에 백회를 덧입히고 그 위에 벽화를 그린데 비해, 널방 내부에는 석면 위에 직접 벽화를 그렸다.

앞방의 천장구조는 평행굄과 삼각굄이 차례로 교차한 평행 3층, 삼각 3층의 변형평행삼각굄이며, 널방의 천장은 5층의 평행굄이다. 현실에는 2기의 석관대(石棺臺)가 나란히 놓여 있다. 널방 벽면 상부에는 일정간격으로 못구멍을 뚫어놓았는데 동벽 8군데, 남·북벽 각 7군데이고, 서벽은 용도와 직결되는 까닭에 이 같은 못구멍이 없다.

앞방 네 벽 모서리에는 자색 기둥과 들보를 그려 목조건물의 내부와 같은 효과를 나타내려 하였다. 그런데 각 벽면 하단에도 들보와 거의 같은 굵기의 자색 띠를 그려 넣음으로써 오히려 각 벽면이 자색 띠로 둘러싸인 독립된 화면과 같은 느낌을 준다.

벽화는 앞방·용도·널방뿐 아니라 널방 입구 돌문과 널방 관대에도 그렸으나 퇴색하여 알아볼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앞방의 벽화는 재래의 풍속과 내세에의 기원을 담은 내용으로 채워져 소재가 다양하고 풍부하다.

무덤길과 잇닿은 앞방 서벽 좌우에는 무덤방을 지키는 위사(衛士)를 배치하였는데, 투구와 칼로 무장한 실물크기의 모습이다. 실물크기의 인물은 널방·용도와 연결되는 동벽 좌우에도 그렸는데, 평복차림의 문지기 2인이 용도를 향해 서 있는 모습이다.

남벽에는 자색 띠로 상·중·하로 구분된 화면에 정자에 앉은 묘주인 부부가 무용·합창하는 것을 보고 들으며 음식을 드는 장면을 그렸다. 하반부는 퇴색하여 어떤 내용의 그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북벽은 큰 나무 아래 앉은 묘주인이 귀빈과 함께 각종 놀이를 보며 즐기는 백희기악장면과 일단의 수렵대가 각종 동물을 사냥하는 장면을 그린 수렵도로 구성되어 있다. 하부의 수렵도는 사슴·호랑이·멧돼지 등을 사냥하는 장면이다. 이 중에는 동굴 속에 숨은 흑곰을 투시하여 그린 특이한 부분도 있다.

상부의 백희기악도는 씨름·원숭이곡예·거문고소리에 맞추어 춤추는 장면과 공놀이곡예 등 각종 놀이장면으로 이루어졌다. 여러 곳에 하인의 복장을 한 남녀서역인이 등장하고 있어 당대 고구려사회구성과 관련해 주목된다. 묘주인이 앉은 곳과 가까운 화면 중심부에는 주위인물들에 비해 두드러지게 큰 흰 개 한 마리와 흰 말 한 마리를 그렸는데, 묘주인의 종교의식과 관련된 존재로 생각된다. 백희기악도의 각 장면에 등장하는 인물과 동물들 사이의 크고 작은 공간에는 사람머리 크기의 연꽃과 연봉오리가 수없이 그려졌다. 이같은 표현은 단순히 빈 공간을 채우려는 의도에서이기보다는 불교와 관련된 특정의식의 소산으로 보인다.

앞방 천장굄부 벽화는 불교적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1층 평행굄 각 면에는 사신(四神)을 배치하였는데, 앞방에서 무덤길을 향해 바라보는 자세를 기준으로 할 때 좌청룡·우백호·전주작(前朱雀)·후현무(後玄武) 순이다. 전벽굄부의 암수주작 뒤로는 날개와 같은 갈기가 달린 기린 한 쌍을 더하였다.

2·3층 평행삼각굄에는 예불도·보살도·전투도를 배치하였다. 예불도는 전실의 후면굄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보살도는 예불도를 중심으로 하여 좌우면에 있다. 예불도의 불상은 선정인(禪定印)의 자세이고, 불상을 향해 묘주인 부부로 보이는 남녀 2인이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자세로 부처에 대한 공경을 나타내고 있다. 이 같은 장면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는 처음 나타나는 것이다.

동벽 상단과 천장굄부 2·3층 각 면 양끝에는 2인의 동자가 연꽃에서 화생하는 장면을 묘사하였다. 이 같은 도상은 삼실총 벽화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묘주인의 내세 연꽃화생을 희구하는 뜻이 담겨진 표현이다.

4·5층 평행삼각굄 각 면은 다양한 자세로 하늘을 나는 비천(飛天)·백학(白鶴)·보주(寶珠) 등으로 장식하였다. 6층 평행굄 각 면에는 완함(阮咸)·장각(長角)·횡적(橫笛) 등의 악기를 다루는 각종 기악천(伎樂天)을 그렸다. 이들 비천과 기악천들은 모두 부처님을 찬양하고 공양하는 천인(天人)들이다.

평행삼각굄층의 네 모서리 삼각석 전면에는 하늘세계를 떠받드는 난쟁이 역사(力士)를 그렸다. 면마다 한 사람씩 화면을 가득 메운 역사들은 하나같이 짧은 바지에 상체를 드러낸 채 힘을 다해 하늘을 떠받는 자세이다. 통구 4호분·통구 5호분에서도 이들이 실물크기의 수두인신(獸頭人身)의 모습으로 묘실주벽 모서리에 나타난다. 이들 난쟁이 역사는 북위 운강석굴(雲岡石窟)의 부조에서 볼 수 있는 주유(朱儒)와 그 모습이 비슷하다.

각층 천장굄석 밑면에는 고구려 특유의 꽃잎 끝이 뾰족한 연꽃의 옆모습을 여러 개 그려 넣었다. 연꽃은 비천이나 기악천보다 크며 일정간격으로 배치하였다. 천장석벽화는 퇴색하여 어떤 내용의 벽화가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용도의 양벽에는 실물크기의 인물이 있는데, 긴 막대부채를 든 시녀 2인이다. 이 같은 실물크기의 인물은 삼실총과 쌍영총 벽화에도 보인다. 널방 입구의 돌문 및 널방 내부 전면은 활짝 핀 연꽃으로 장식하였다. 이들 연꽃은 거의 대부분 지름 16∼17㎝ 크기의 활짝 핀 모습을 하였으며, 화면에 맞추어 위아래·좌우로 열을 이루고 있다.

널방 천장석 그림은 일월성신도(日月星辰圖)로 별들은 ‘X’자로 교차하는 대각선에 의해 4개의 정삼각형으로 나누어진 화면 속에 배치하였다. 일상(日像)·월상(月像)은 각기 원 속의 삼족오(三足烏)와 두꺼비·옥토끼로 표현하였다. 두꺼비·옥토끼가 함께 나타나는 월상은 전형적인 사신도 벽화고분에서 흔히 보이는 후기양식이다. 관좌에도 그림이 있었던 흔적이 있으나 퇴색하여 내용은 알 수 없으며, 도굴로 인하여 별다른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특징

장천1호분은 묘실 벽화의 불교적 내용이 특히 주목된다. 특히 다양한 형태의 연꽃 표현이 발견된다. 연봉오리·측면연꽃·평명연곷 등의 기본 형태 외에도 화염연꽃·화생(化生)연꽃과 같이 다른 벽화무덤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연꽃 표현도 있다. 널방 벽 및 천장고임은 순전히 연꽃으로 장식되었으며, 앞방 천장고임에서 여래·보살·비천 사이의 공간을 장식하는 것도 모두 갖가지 형태의 연꽃이다.

연봉오리는 앞방 오른벽과 앞방 천장고임에서도 볼 수 있다. 측면연꽃은 앞방 벽과 천장고임, 널방 문 등에서 발견된다. 평면연꽃은 널방 문과 벽, 천장고임에 그려졌으며, 꽃심은 홍색이나 백색으로 채색되었다. 줄기와 잎, 꽃이 하나로 표현된 연은 화염연꽃과 화생연꽃의 형태로만 찾아진다. 화염연꽃은 앞방 오른벽 상단부에 화생연꽃과 번갈아 행을 이루며 배치되었다. 화생연꽃은 앞방 벽 상단 및 천장고임에 2인 화생의 형태로 표현된다.

장천 1호분에서 연꽃은 어느 고분벽화에서보다도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며, 무덤칸 벽화에서 지니는 비중도 높다. 화염연꽃과 2인 화생연꽃은 특히 눈길을 끄는 표현으로 벽화를 구성하는 제반 요소와 함께 그 의미를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의의와 평가

이상과 같이 장천1호분은 마치 불교 사원과 같은 느낌을 준다. 당시 세속적 생활상이나 도교적 신화로 채워진 중국남조의 고분벽화와 한문화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북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고구려만의 특징이다.

또한 앞방 천장굄부의 예불도·보살도·비천도와 무덤안을 가득 메운 연꽃그림은 장천1호분의 피장자가 상당히 독실한 불교도였다는 것을 알려 준다. 즉 이 무덤은 당시 고구려 귀족불교신앙의 내용과 성격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그리고 제반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볼 때, 이 고분의 축조 및 벽화 제작시기는 대개 5세기 후반, 고구려 전성기의 어느 한 시점일 것으로 추정된다. 장전1호분이 보여주는 5세기 북위(北魏) 석굴사원예술과의 유사성은 고구려 장수왕 때를 중심으로 한 고구려와 북위의 활발한 교류문화적 측면을 밝히는데 기초적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지니고 있다.

참고문헌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전호태, 사계절, 2001)
『고구려(高句麗)의 고고문물(考古文物)』(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6)
「5세기 고구려 고분벽화의 불교적 요소와 그 연원」(김진순, 『미술사학연구』제258호, 2008)
「고구려의 괴뢰자(傀儡子)와 장천1호분 앞방 왼쪽 벽 벽화」(안상복, 『한국민속학』제37집, 2003)
「고구려 고분벽화의 복식에 관한 연구·장천 1호분, 삼실총 벽화를 중심으로·」(홍정민, 『한복문화』제4권 3호, 2001)
「집안장천1호벽화묘(集安長川1號壁畵墓)」(길림성문물공작대·집안현문물보관소, 『동북고고와 역사』1, 1982)
집필자
전호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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