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대왕 ()

목차
고대사
인물
고구려의 제7대(재위: 146년~165년) 왕.
이칭
이칭
수성(遂成)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71년(태조왕 19)
사망 연도
165년(차대왕 20)
출생지
미상
주요 관직
관련 사건
후한(後漢) 유주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의 고구려 침공 격퇴
목차
정의
고구려의 제7대(재위: 146년~165년) 왕.
내용

재위기간은 146년(혹은 121년)부터 165년까지이며 이름은 수성(遂成)이다.『삼국사기』에 따르면 태조왕의 동생이나, 『후한서(後漢書)』에서는 태조왕 궁(宮)의 사자(嗣子)라고 표현하고 있어 양자를 부자 관계로 전하고 있다. 용감하나 인자함이 적은 성품이었다.

121년(태조왕 69)에 후한(後漢)의 유주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 등의 고구려침공을 격파하였고, 그 공으로 군사와 국정 전반에 관한 업무를 장악하였다. 이에 더욱 그 세력이 커져 측근세력들과 더불어 왕위찬탈까지 꾀하다가, 마침내 태조왕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즉위 당시 76세였다고 한다. 즉위 후 147년(차대왕 2)에는 측근세력인 관나 패자(貫那沛者) 미유(彌儒), 환나 우태(桓那于台) 어지류(菸支留), 비류나 조의(沸流那皂衣) 양신(陽神) 등을 각각 좌보(左輔)·중외대부(中畏大夫)에 임명하여 자기 세력을 강화하는 한편 태조왕의 측근세력인 우보(右輔) 고복장(高福章)과 태조왕의 아들인 막근(莫勤)·막덕(莫德)을 제거하고, 나아가 자신의 동생 백고(伯固)를 핍박하는 등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재위기간 동안에 천재지변이 되풀이되면서 사회불안이 계속되는 가운데 165년 연나 조의(椽那皂衣) 명림답부(明臨答夫)에게 살해당하였다. 동생 신대왕 백고에게 살해당하였다는 설도 있다.한편 『후한서(後漢書)』에서는 『삼국사기』와 달리 태조왕 궁의 사망 및 차대왕 수성이 즉위한 때를 121년으로 기록하는 한편, 122년에는 수성이 후한에 중국인 포로들을 송환하는 등 평화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고 전한다. 이처럼 중국 측 사서의 기록과 『삼국사기』 기록 간에 시차가 크게 나기 때문에 『삼국사기』 초기 기록 및 왕계의 신빙성에 대한 논란이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후한서(後漢書)』
집필자
서영대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