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군 ()

대동여지도 중 강원도 김화, 철원 부분
대동여지도 중 강원도 김화, 철원 부분
인문지리
지명
강원특별자치도 북서부에 위치한 군.
정의
강원특별자치도 북서부에 위치한 군.
개설

동쪽은 김화군, 서쪽은 이천군과 황해도 금천군, 남쪽은 경기도 연천군, 북쪽은 평강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6°56′∼127°24′, 북위 38°05′∼ 38°24′에 위치하며, 면적 841㎢, 인구 5만2418명(1944년 현재)이다. 6개 면 33개 이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철원읍 관전리이다.

자연환경

남부는 대체로 산지를 이루어 금학산(金鶴山, 947m) · 고대산(高臺山, 832m) 등의 산지가 솟아 있다. 그 밖에 대부분의 지역은 고원성의 평야지대를 이루는데, 신생대 제4기 홍적세 때에 현무암이 열하분출해 기존의 하곡 위를 흘러 형성된 200∼500m의 철원 · 평강용암대지의 일부이다.

임진강 지류인 한탄강이 군의 동부를 남북으로 흐르는데, 용암대지 위를 흐르면서 전형적인 유년기의 침식곡을 형성하며, 하안에는 주상절리(柱狀節理)와 수직단애가 발달해 곳곳에 절경을 이루고, 역곡천이 군의 서부를 동서로 흐른다.

이들 하천 유역에는 비교적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선창벌 · 대야잔평 등은 예로부터 넓고 토지가 비옥하기로 유명하다.

기후는 내륙에 위치하며 일반고도가 높아서, 기온교차가 심한 대륙성기후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연평균기온 9.5℃, 1월 평균기온 -7.9℃, 8월 평균기온 24.4℃이며, 연강수량 1,366㎜이다. 우리 나라 3대 다우지 가운데 하나이며, 여름철에는 집중강우로 홍수피해가 심하다.

역사

고대

선사시대에 이 지역을 중심으로 사람이 거주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유적은 비교적 많은 편이다. 1978년에 이웃 지역인 경기도 연천군 전곡면 전곡리에서 구석기유적이 발굴 조사되어 수십만 년 전에 한탄강을 끼고 인류가 거주했음을 알게 되었고, 최근에는 철원군 내의 한탄강변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되었다.

신석기시대에도 사람이 거주했음은 당시의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고 있음을 보아 짐작할 수 있으며, 청동기시대에는 토성리의 토성(土城)과 여러 곳에 산재해 있는 고인돌을 통해 이 지역에 성읍국가(城邑國家)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의 유물로 민무늬토기 · 간돌도끼 · 간돌칼 · 돌화살촉 · 별도끼 · 돌창 등이 철원읍 · 동송읍 · 원남면 등에서 출토되었다. 철기문화가 싹트기 시작한 초기철기시대에는 연맹왕국을 이루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당시 이 곳에는 진국(辰國)이 형성되어 그 속에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영토로서 철원(鐵圓) 또는 모을동비(毛乙冬非)라 칭하다가, 통일신라에 흡수된 뒤 경덕왕 때에는 철성군(鐵城郡)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901년(효공왕 5)송악(松嶽 : 지금의 개성)에서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弓裔)가 905년에 이 곳으로 도읍을 옮겨 풍천원(楓川原 : 지금의 북면 홍원리)에서 13년간 통치를 하였다. 그리고 918년에는 왕건(王建)이 이 곳에서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였다.

고려시대

919년(태조 2) 송악으로 천도하면서 동주(東州)로 개칭했으며, 995년(성종 14)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 혁파하고 1018년(현종 9) 지주사(知州事)를 두었다. 고려 중기 이후 5도양계의 지방제도가 확립되면서 교주도에 속하였다.

1254년(고종 41)에 현령관(縣令官)으로 직제를 내렸다가 뒤에 다시 승격시켜 목사(牧使)로 하였다. 1310년(충선왕 2) 목(牧)을 두는 제도를 폐할 때 다시 철원으로 개칭하고 직제를 낮추어 철원부로 하였다.

1217년(고종 4) 거란이 침입했을 때 한 무리가 철원을 공략하고 남하한 일이 있으며, 1231년 몽고군의 침략 때에는 그 통로로서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특히 1253년의 제5차침입 때에는 방호별감(防護別監) 백돈명(白敦明)의 실책으로 성이 함락되기도 했으나 주민들은 끝까지 항전하였다.

1290년(충렬왕 16) 합단적(哈丹賊)의 침입 때에도 적들이 회양에서 김화 · 철원을 거쳐 경기도 양주로 남하한 일이 있으며, 왜구의 침입이 심각하던 우왕 때에는 철원으로 천도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1434년(세종 16)에 강원도에 편입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1432년 호구수 351호 770명, 시위군 62명이었다. 군사제도에 있어서는 오위도총부 예하 의흥위(義興衛)의 좌부(左部)에 속한 회양진(淮陽鎭) 내에 편입되어 있었다.

역마제(驛馬制)에 있어서는 《증보문헌비고》 여지고(輿地考)에 의하면 전국의 역로 중 제2로로서, 양주의 누원(樓院), 포천의 파발막(擺撥幕) · 만세교(萬歲橋), 영평(永平 : 지금의 파주)의 양문역(梁文驛), 철원의 풍전(豐田)을 거쳐 김화로 이어지며, 연천 · 철원 · 평강으로 연결되는 길도 있었다.

봉수로(烽燧路)는 김화의 소이산(所伊山)에서 봉수를 올리면 철원의 적골산(適骨山)에서 받아 경기도 영평의 미로곡(未老谷)을 거쳐 서울남산으로 전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서울을 점령한 왜군의 제4진이 동두천을 거쳐 철원 · 평강 · 김화를 점령한 뒤 함경남도 안변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피해가 극심했으나 곧 관군과 의병들의 활약으로 수복되었다.

병자호란 때에는 적이 서울을 침입하는 통로가 되었는데, 당시 철원지역 옆의 김화 자모산성(慈母山城)에서 적과 대치하던 관찰사 홍명구(洪命耉)가 순절했으며, 철원의 정방산성(正方山城)에서는 성이 함락되자 김응해(金應海)가 분을 못 이겨 자결했다가 부하들의 응급구호로 소생했으니, 모두 이 지방과 관계 있는 충신들이다.

1746년(영조 22) 춘천부에 있던 강원도병마방어사부(江原道兵馬防禦使府)를 철원으로 옮기고 관하에 3부(춘천 · 회양 · 이천) · 6현(금성 · 김화 · 낭천 · 평강 · 양구 · 안협)을 두었다. 1778년(정조 2)에 편찬된 《철원군읍지》에 의하면 행정구역은 동변면 등 9개 면으로 호구수 3,604호 1만5147명(남자 8,101명, 여자 7,046명)이었다.

근대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철원군으로 고쳐 춘천부에 속했다가 다음 해 강원도에 소속되었다. 1907년 군대해산과 함께 전국에서 의병봉기가 일어나자 철원에서는 김규식(金奎植) · 안상근(安尙根) · 유학근(兪學根) 등이 활약하였다.

이들은 다른 의병군과 협조해 1907년 9월 20일 의병 100여 명이 갈말면 지포리에서, 3월 16일 철원 서북 10리 지점에서, 4월 1일 의병 50여 명이 지포리에서, 1910년 8월 10일 의병 13명이 토성리에서 각각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1907년 11월 14일에 일본군은 철원군 지방에서 의병들과 관계된 마을의 집 22채를 소각시키기도 하였다.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자 이 군에서는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3월 10일부터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날 철원읍에서 박연서(朴淵瑞) · 박용철(朴容喆) 등을 중심으로 2,000여 명이 만세운동을 했으며, 3월 11일에는 갈말면 토성리와 문혜리에서 1,000명이, 4월 8일에는 내문면 독검리에서 최재명(崔在明) · 최재청(崔在淸) 등이 주동이 되어 700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러한 시위에 대해 일본헌병과 보조원들의 발포로 많은 주민이 죽임을 당하거나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1931년 4월 철원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41년 10월에는 경기도 삭녕군 내문면 · 인목면 · 마장면이 철원군으로 편입되었다.

현대

광복과 함께 38선 이북지역으로 들어갔다가 1950년 6 · 25사변을 치르고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면서 이전의 1읍 9면 중 지금의 철원읍 · 동송읍 · 갈말읍 · 신서면(연천군)은 수복되었으나 어운면의 일부는 비무장지대로 들어갔고, 북면 · 묘장면은 일부가 북한으로, 내문면 · 인목면 · 마장면은 일부가 비무장지대로 있고, 대부분은 북한지역으로 되었다.

유물ㆍ유적

이 군의 선사시대 유적은 한탄강 유역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주로 남한지역에 해당하는 김화읍 · 철원읍 · 갈말읍 · 동송읍에서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토기와 석기들이 발견되었다.

북한지역으로 흡수된 곳에서도 비슷한 유물들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최근까지는 발굴된 바 없다. 북한이나 비무장지대에 들어가 있는 지역의 유적은 1942년에 발간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의하면 어운면 이길리에 모성사(慕聖祠), 내문면 오동리에 사효각이 있다.

고대의 성으로 마장면 대전리의 가실현성지(加實縣城址)는 길이 약 250m가 남아 있고, 인목면 승양리의 성산(城山)이라고 불리는 높이 1∼3m, 너비 1.5∼2.1m, 둘레 약 400m의 산성이 있는데 궁예시대에 건축한 것으로 전해지며, 내문면 마방리의 토성은 높이 0.9∼2.1m, 너비 2∼4m, 둘레 약 700m의 네모꼴 산성으로 역시 궁예 때 축조되었다고 한다. 또한, 북면 홍원리와 어운면 중강리에 걸쳐 있는 풍천원도성터는 평원에 있는 궁예 때의 도성터로서 흙과 돌을 섞어 외성을 쌓았는데, 높이 1.2∼3.6m, 너비 2∼6m, 둘레 약 6,000m 규모이고, 내성은 높이 2.1m, 너비 2.6m, 둘레 약 400m로 내 · 외성 모두 네모꼴이다.

고분으로는 마장면 왕피리에 고려 말의 장군이었던 최사유(崔士柔)의 묘가 있으며, 장포리 새말에 옛 무덤이라고 전하는 무덤, 인목면 승양리에 너비 4m, 높이 1.5m 크기의 무덤, 내문면 마방리에 동서 4m, 남북 6m, 높이 2.1m의 말무덤이라 전하는 것들이 있다. 그 밖에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석곽분이 어운면 강산리에 20기, 중강리 가칠동에 5기가 있다.

불교유적으로는 인목면 승양리 탑산동의 34절터에서 높이 195㎝의 사각오층석탑과 기왓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인목면 검사리의 검사지(檢寺址)와 신현리 사동의 절터에는 주춧돌과 기왓조각을 비롯해 파손된 석불이 있다. 내문면 반석리 대동의 나한암지(羅漢庵址)에도 석축과 기왓조각이 흩어져 있었으며, 부근의 암굴에는 작은 석불 10구가 안치되어 있었다.

오동리의 용복사지(龍福寺址)에서도 기왓조각이 많이 발견되었고, 묘장면 산명리 상진명동의 절터에도 기왓조각과 석불상이 있었으며, 북면 용학리고암산(高巖山) 절터에서는 주춧돌을 비롯해 자연석에 입불(立佛)과 좌불(座佛)을 하나씩 돋을새김으로 조각한 것, 그리고 부도 30기가 발견되었다.

이 밖에도 북면 홍원리의 절터에는 높이 3.45m의 팔각형 석등이 있는데 기단부에는 연꽃무늬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으며, 어운면 중강리에는 높이 2.1m의 팔각형 삼층석탑과 비를 세울 때 비좌(碑坐)로 사용했던 가로 45㎝, 세로 90㎝ 크기의 귀부(龜趺)가 있다.

교육ㆍ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향교가 중심이 되어 많은 유생들의 교육을 맡았으며, 각 촌락에는 서당이 설치되어 한문교육이 이루어졌다. 서원으로는 1809년(순조 9) 어운면 이길리에 순흥안씨문중에서 공자 · 주자 · 안향(安珦) 등을 배향한 모성사(慕聖祠)가 세워졌다.

뒤에 안재(安在)를 추가로 배향했으며, 매년 2월과 8월에 안씨종중과 지방유림들이 모여 성대한 석전제(釋奠祭)를 지냈다. 38선 이북에 위치했으므로 광복 이후에는 공산주의자들의 탄압으로 석전제가 중지되었으며, 1950년 6 · 25사변으로 사당마저 완전히 소실되었다.

근대교육기관으로는 1909년 봉명학교가 설립되어 신문화운동과 배일사상을 교육시켰으며, 1914년 정의학교 · 배영학교 등이 설립되어 육영사업에 힘썼으나, 1919년 3 · 1운동 이후 일제탄압으로 폐교되었다.

1913년 일본인 아동을 위한 6년제 소학교와 한국인을 위한 4년제 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그 밖에 철원간이농업학교 · 일본어보급소 등이 설치되었으며, 1939년 철원고등여학교, 1941년 철원중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194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7개교가 있다.

산업ㆍ교통

넓고 기름진 철원평야를 중심으로 논농사 위주의 농업이 이루어진다. 고암산(高巖山, 780m) 기슭의 봉래지(蓬萊池) 등 여러 곳의 저수지를 비롯해 한탄강과 역곡천의 관개수리가 잘 갖추어져 농업용수원이 되고 있으며, 쌀의 생산량이 강원도 제1위를 차지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 · 콩 · 옥수수 · 채소 등이며, 농가부업으로는 양봉 · 양잠 등이 이루어진다. 특히 이 지역은 산악지대여서 양봉하기에 자연적 조건이 적합하다. 그 밖에 사과재배와 축산업도 활발하다.

공업은 도자기제조업이 이루어지며, 광업은 금 · 은 · 유화철 · 아연 등이 매장되어 있으나 채광활동은 부진하다. 교통은 경원선이 이 군의 중앙부를 남북으로 통과하며, 대광리 · 철원 · 월정리 등의 역이 설치되어 있다. 한편 철원읍에서 금강산전기철도가 동북부로 분기되어 사요역 · 동철원역을 통과해 종점인 내금강에 이른다.

도로는 서울∼원산간의 1등도로가 면의 중동부를 통과하며, 철원∼안협, 철원∼김화를 잇는 지방도가 통과한다. 그 밖에 각 주요 지역에 등외도로가 연결되어 있어 교통이 편리한 편이다. 관광지로는 용암대지 위를 한탄강이 흐르면서 하안에 형성된 주상절리 · 수직단애 등의 독특한 자연경관을 들 수 있다.

읍ㆍ면

내문면

군의 북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73.17㎢, 인구 5,089명(1944년 현재). 내문면(乃文面) 면 소재지는 창동리이다. 본래 경기도 삭녕군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이 군에 편입되었다.

추가령구조곡 내의 용암대지로서 낮은 지대도 높이 200m 이상이며, 동쪽은 효성산(曉聲山, 596m)이 솟아 있다. 임진강의 지류인 역곡천이 면의 남부를 서류하며, 북쪽에서 흘러내려 오는 소지류들을 합류한다.

주요 경작지로 하천 유역, 대지 위의 평탄면, 산간분지, 산악의 경사면 등이 이용되고 있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 · 보리 · 콩 · 조 · 감자 · 목화 등이다. 교통은 창동리를 중심으로 주요 마을에 등외도로가 통과하며, 묘장 · 마장 · 북 · 인목 등과 연결되어 있으나 불편한 편이다. 따라서 장거리여행은 경원선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유적으로는 오동리에 사효각(四孝閣)이 있으며, 반석리에 나한암지(羅漢庵址), 석불 10체, 마방리에 말무덤이라 불리는 호리병 모양의 고분 2기 등이 있다. 사효각은 조선 중기의 강릉김씨(江陵金氏) 김학유(金學儒) · 김병진(金秉晉) 부자와 김학유의 동생 김학옥(金學玉) · 김병순(金秉舜) 부자 등 네 사람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며, 매년 강릉김씨종중과 민 · 관이 합동으로 추모제를 올렸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창동(倉洞) · 독검(篤儉) · 오동(梧桐) · 반석(班石) · 내문(乃文) · 마방(馬放) 등 6개 이가 있다.

마장면

군의 서단에 위치한 면. 면적 73.46㎢, 인구 6,976명(1944년 현재). 마장면(馬場面) 면 소재지는 장포리이다. 본래 경기도의 옛 삭녕군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이 군에 편입되었다.

마식령산맥의 여맥이 뻗어내려 서북부는 산지를 이루는데, 북쪽은 영영산(靈影山, 583m), 서쪽은 부압산(浮鴨山, 442m) · 추가령(楸哥嶺, 425m) 등이 솟아 있으며, 그 밖에 대부분의 지역은 평지를 이룬다. 역곡천이 면의 동남부를 서류하며, 하천 유역에는 소규모의 비옥한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 · 콩 · 밀 · 조 · 감자 등이며, 농가부업으로는 양봉 · 양잠 · 축우 등이 이루어진다. 광업은 북서부 산지 일부가 안협광산과 이어져 유화철이 생산된다. 교통은 철원∼안협을 잇는 지방도가 이 면의 남부를 동서로 통과하며, 주요 마을에 등외도로가 통과하고, 내문 · 인목 등과 연결되어 있어 편리한 편이다.

유적으로는 대전리에 가실현성지, 왕피리에 최사유부처의 묘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장포(長浦) · 남원(南院) · 대전(大田) · 왕피(往避) · 입석(立石) · 밀암(密巖) 등 6개 이가 있다.

묘장면

[묘장면(畝長面)]

군의 중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62.59㎢, 인구 7,577명(1944년 현재). 묘장면(畝長面) 면 소재지는 중세리이다. 중앙부의 지구대를 사이에 두고, 남쪽은 야월산(夜月山, 487m), 북쪽은 효성산 등의 산지가 솟아 있으며, 용암분출로 형성된 산이다. 이들 산지 사이를 역곡천 및 산명호에서 발원하는 계류가 동서로 흐른다.

하천 유역에는 비옥한 철원평야가 형성되어 논농사가 이루어지며, 산간지대에서는 밭농사가 행해져, 면의 2대농산물은 저지대의 미곡과 산지대의 콩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 · 콩 등이며, 농가부업으로는 양잠 · 축우 등이 이루어지며, 특히 소는 철원우라 해 매매가 활발하다.

교통은 경원선이 면의 동남부를 통과하며, 이와 거의 병행해 서울∼원산간 1등도로가 통과한다. 중앙부의 지구대를 따라 철원∼안협을 잇는 지방도가 통과하며, 인목 · 철원 · 북 · 내문 등과 연결되어 있어 편리한 편이다. 특히 대마리는 대소도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중세(中細) · 대마(大馬) · 가단(加丹) · 산명(山明) 등 4개 이가 있다.

북면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102.77㎢, 인구 1만2647명(1944년 현재). 북면(北面) 면 소재지는 회산리이다. 대부분의 지역이 철원고원에 속해 높이 250∼350m의 평탄면을 이루며, 북쪽에서 남쪽으로 완경사를 이룬다.

서남쪽은 효성산, 서북쪽은 고암산 등의 산지가 솟아 있으며, 용암분출로 형성된 산지이다. 북부 봉래지의 물은 역곡천으로 되어 남류하며, 관개용수원이 되고 있다. 고원지대는 개간사업의 실시로 인해 경작지로 변모해 가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 · 콩 · 조 등이며, 농가부업으로는 양봉 · 양잠 · 축우 등이 이루어지고, 사과재배도 활발하다. 교통은 경원선이 면 동부를 통과하며 월정리역이 설치되어 있다. 이와 거의 병행해 서울∼원산간 1등도로와 평강∼철원을 잇는 지방도가 통과하며, 철원 · 묘장 · 마장 · 평강 등과 연결되어 교통이 편리한 편이다.

유적으로는 용학리에 이름 미상의 사지(寺址), 석불 2기, 부도 3기, 초석, 홍원리∼회산리에 풍천원도성지(楓川原都城址), 홍원리에 팔각형오층석등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회산(回山) · 유정(楡井) · 홍원(洪元) · 외학(外鶴) · 보막(洑幕) · 용학(龍鶴) 등 6개 이가 있다.

어운면

군의 동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65.19㎢, 인구 1만2088명(1944년 현재). 어운면(於雲面) 면 소재지는 하갈리이다. 추가령구조곡 내의 용암대지로서 북쪽은 300∼400m 등의 산이 솟아 산지를 이루며, 저지대는 용암분출에 의한 독특한 지형을 이룬다.

한탄강이 면의 동남부를 흐르며, 강안의 현무암대지를 침식, 아름다운 협곡미를 나타낸다. 하갈리와 중강리는 대체로 평지로 되어 있는데, 관개수리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으며 개간사업의 실시로 인해 이 군의 주요 미작지대를 이룬다.

북부 산간지대에서는 밭농사가 행해지며, 신탄 등도 생산된다. 주요 농산물은 쌀 · 콩 등이며, 농가부업으로는 양봉 · 양잠 등이 이루어진다. 교통은 경원선이 면의 북서부를, 금강산전기철도가 면의 동부를 각각 통과하며, 양지 · 이길역이 설치되어 있다.

도로는 서울∼원산간의 1등도로가 면의 북서부를, 철원∼김화를 잇는 지방도가 면의 동부를 지나며, 주요 지역에 등외도로가 통과하고 철원 · 북 · 김화군 등과 연결되어 있어 편리한 편이다.

유적으로는 이길리에 모성사가 있으며, 북면과의 경계에 궁예의 고도가 있어 성벽 · 전초(殿礎) 등이 남아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2개교가 있다. 하갈(下葛) · 양지(陽地) · 이길(二吉) · 강산(江山) · 중강(中江) 등 5개 이가 있다.

인목면

군의 서북단에 위치한 면. 면적 73.29㎢, 인구 8,041명(1944년 현재). 인목면(寅目面) 면 소재지는 도밀리이다. 본래 경기도의 옛 삭녕군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이 군으로 편입되었다. 동남쪽은 야월산, 서쪽은 추가령, 남쪽은 천덕산 등의 산지가 솟아 있으며, 그 여맥이 면내에 미쳤으나 중북부 지역은 대체로 평지를 이룬다.

역곡천이 면의 북부를 서류하다가 남쪽으로 곡류한다. 하천유역에는 비교적 대규모의 비옥한 평야가 형성되어 있으며, 관개수리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 농산물의 경작에 적당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 · 콩 · 조 · 보리 등이며, 농가부업으로는 양잠 · 축우 등이 이루어진다. 특히, 콩은 인접한 연천군과 같이 연철대두(漣鐵大豆)라 해 품질이 우수하다.

교통은 철원∼안협을 잇는 지방도가 면의 북부를 통과하며, 주요 지역에 등외도로가 통과하고 묘장 · 마장 등과 연결되어 있으나 불편한 편이다.

유적으로는 승양리에 궁예시대의 산성지, 이름 미상의 사지와 오층석탑, 고분인 고려총(高麗塚), 검사리에 검사지(檢寺址), 신현리에 이름 미상의 사지와 석불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도밀(道密) · 검사(檢寺) · 승양(承陽) · 신현(薪峴) · 덕산(德山) · 갈현(葛峴) 등 6개 이가 있다.

광복 후의 변천

강원도(북한) 남서부에 있는 군. 동쪽은 평강군 · 철원군(남한), 서쪽은 황해북도 토산군, 남쪽은 개성직할시 장풍군과 경기도 연천군과 접해 있다. 동경 126°47′∼127°16′, 북위 38°09′∼38°28′에 위치하며, 면적 554㎢, 인구 12만4000여 명(1996년 추정)이다.

1952년 12월 이전의 철원군 마장면 · 인목면 · 내문면의 전체, 북면 · 어운면의 일부, 이천군 안협면 · 동면의 전체, 서면의 일부, 황해도 금천군 토산면의 일부, 연천군 삭녕면의 전체, 서남면의 일부, 평강군 서면의 일부로 이루어졌으며, 1960년 6개 이가 개성직할시 장풍군에 이속되었다.

행정구역은 철원읍과 유대포(流大浦) · 문암(文巖) · 저탄(猪灘) · 정동(定洞) · 월암(月巖) · 하식참(下食站) · 외학(外鶴) · 보막(洑幕) · 용학(龍鶴) · 반석(班石) · 내문(乃文) · 오동(梧洞) · 대전(大田) · 왕피(往避) · 상하(上下) · 입석(立石) · 마방(馬放) · 밀암(密巖) · 상마산(上馬山) · 삭녕(朔寧) · 오탄(五炭) · 검사(儉寺) · 회산(回山) · 유정(楡井) · 독검(篤儉) · 마장(馬場) · 부압(浮鴨) · 송현(松峴) · 갈현 · 가승(佳承) · 삼사(三沙) · 적동(積洞) · 적산(積山) · 중강(中江) · 강산 · 도밀(道密) 등 36개 이가 있으며, 군 소재지는 철원읍이다.

군의 동부에는 평강철원고원이 있고, 북서부 경계지역에는 마식령산맥이 뻗어 있다. 북부에는 대왕덕산 · 기대봉 등이 솟아 있으나 서남부 지역에는 비교적 넓은 고원평야가 있어 산림은 군 전체 넓이의 54%를 차지한다. 수종은 소나무 · 참나무가 대부분이다.

이 군은 수리시설이 되어 있어 쌀 · 옥수수 생산이 많고, 무 · 배추 · 고추 등도 많이 재배한다. 산기슭에는 밤나무 · 호두나무도 많이 있다. 지하자원으로는 석탄 · 자철광이 있고 부압리에는 슬레이트광산이 있다.

지방산업은 과일가공 · 청량음료 · 가구 · 천 · 농기계 등의 공장들이 있으며, 특히 왕골로 만든 주단과 방석은 이 군의 특산물이다. 교통망으로는 이천 · 토산 · 평강 방면으로 도로가 연결되어 있고, 임진강을 이용해 뗏목도 수송된다.

참고문헌

『강원도지』(강원도지편찬위원회, 1959)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1991)
『지방행정구역발전사』(내무부, 1979)
『철원군읍지』-향토지:철원·김화·평강(문화재보호협회철원군지부, 1977)
관련 미디어 (3)
집필자
노도양·최복규·한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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