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 설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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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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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말기의 학자 · 문장가인 최치원에 관한 문헌설화.
내용 요약

최치원설화는 신라 말기의 학자·문장가인 최치원에 관한 문헌설화이다. 최치원이 당나라에 있을 때 무덤에서 나온 두 여자와 시를 주고받고 하룻밤 정을 나누었다는 내용의 설화이다. 설화이지만 내용 구성면에서 소설적 면모가 다분하여 소설로 보기도 한다. 설화의 성립 연대는 고려 초기나 중기 이전으로 추측되며, 작자는 알 수 없고 현재 전하지 않는 설화집 『수이전』에 수록되었던 것만 밝혀져 있다. 설화의 내용에서 주인공들이 20여 수의 한시로 자신들의 의사를 표시하고 있어 후대의 한문소설류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는 데서 이 설화의 문학사적 의의가 있다.

목차
정의
신라 말기의 학자 · 문장가인 최치원에 관한 문헌설화.
내용

최치원이 당나라에 있을 때의 일화에 관련된 문헌설화이다. 한 편의 설화이기는 하나, 내용 구성면에서 다분히 소설적 면모를 띠고 있어 소설로 보는 경우도 있다.

이 설화는 원래 『수이전(殊異傳)』에 수록되었던 것인데, 성임(成任)『태평통재(太平通載)』 권68에는 ‘최치원(崔致遠)’이라는 이름 아래 전재되어 있고, 그 뒤 권문해(權文海)의 『대동운부군옥』 권15에는 ‘선녀홍대(仙女紅袋)’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어 전한다.

같은 내용이기는 하나 「선녀홍대」가 「최치원」보다 약 5분의 1 정도로 축약되어 있다. 『태평통재』에 수록된 설화의 내용을 요약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최치원이 12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한 뒤 율수현(溧水縣)의 현위(縣尉)가 되었는데, 항상 고을 남쪽의 초현관(招賢館)에 가서 놀았다. 초현관 앞에는 쌍녀분(雙女墳)이라는 오래된 무덤이 있었는데, 예로부터 많은 명현들이 노는 곳이었다.

어느 날 최치원이 쌍녀분에 관한 시를 지어 읊었더니, 홀연히 취금(翠襟)이라는 시녀가 나타나 쌍녀분의 주인공인 팔낭자(八娘子)와 구낭자(九娘子)가 최치원의 시에 대해 화답한 시를 가져다주었다.

시를 읽고 감동한 최치원이 다시 두 여인을 만나고자 하는 시를 지어 보내고 초조히 기다리노라니, 얼마 뒤 이상한 향기가 진동하면서 아름다운 두 여인이 나타났다.

서로 인사를 나눈 뒤에 최치원이 두 여인의 사연을 듣고자 하였다. 원래 그들은 율수현의 부자 장씨(張氏)의 딸들로, 언니가 18세, 동생이 16세 되던 해에 그녀들의 아버지가 시집보내고자 언니는 소금장수에게, 동생은 차[茶]장수에게 정혼하였다.

그러나 그녀들의 뜻은 달랐기에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 없었고, 그 때문에 고민하다가 마침내 죽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여인을 함께 묻고 쌍녀분이라 이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한을 품고 죽은 그녀들은 마음을 알아줄 사람을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다가, 마침 최치원 같은 수재를 만나 회포를 풀게 되어 기쁘다고 말하였다.

세 사람은 곧 술자리를 베풀고 시로써 화답하여 즐기다가 흥취가 절정에 이르자, 최치원이 서로 인연을 맺자고 청하니 두 여인 또한 좋다고 하였다. 이에 세 사람이 베개를 나란히 하여 정을 나누니 그 기쁨이 한량없었다.

이렇게 즐기다가 달이 지고 닭이 울자, 두 여인은 이제 작별할 시간이 되었다면서 시를 지어 바치고는 사라져 버렸다. 최치원은 그 다음날 지난밤 일을 회상하며 쌍녀분에 이르러 그 주위를 배회하면서 장가(長歌)를 지어 부른다. 그 뒤 최치원은 신라에 돌아와 여러 명승지를 유람하고 최후로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버린다.

이상의 내용에서 볼 때, 이 설화는 설화라기보다는 소설에 매우 접근한 모습을 보여 주며, 최초의 수록자나 작자는 알 수 없다. 『태평통재』에는 『수이전』에서 나왔다고 하였고, 『대동운부군옥』에서도 그 출전을 『수이전』으로 밝히면서, 참고 문헌에는 『태평통재』도 기록하고 있다.

결국에는 처음 『수이전』에 수록되어 있던 것이 『태평통재』로, 이것이 다시 축약되어 『대동운부군옥』에 수록된 것이다. 그러나 『대동운부군옥』은 『수이전』에서 곧바로 왔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최치원설화」와 「선녀홍대설화」는 그 근원이 같다. 다만, 전자에 비하여 후자가 5분의 1 정도 축약되어 있는데, 첫부분과 끝부분이 생략되어 있고 다수 등장하는 한시가 대부분 빠져 있으며, 이야기의 줄거리도 많이 축약되어 있다.

이 설화는 내용상 중국 남송(南宋) 때의 『육조사적편류(六朝事迹編類)』의 분릉문(墳陵門) 제13 쌍녀분기(雙女墳記)와 공통되는 바가 많아 상호 연관성이 있다 할 수 있다.

또한, 당나라의 전기소설인 장작(張鷟)의 「유선굴(遊仙窟)」과도 공통되는 점이 많아 그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 중국의 이야기들이 전래되어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역사적 인물인 최치원에 결부되었던 것이다.

최치원은 오랫동안 중국에 살았던 인물이기에 이들 중국 설화들과 잘 어울릴 수 있었고, 또 그의 시재(詩才)가 그곳에서 높이 평가되었기에 설화 속에서도 그의 시가 죽은 두 여인의 혼까지 움직일 수 있는 것으로 묘사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설화의 내용에서 혼교설화(魂交說話) · 주1 · 애정설화(愛情說話) 등의 요소를 볼 수 있는데, 이 설화가 중국 육조 시대(六朝時代), 그리고 당나라 시대 신괴류(神怪類)의 전기적 설화소설에서 다분히 영향을 받고 있음을 말하는 예이다.

이 설화의 성립 연대는 주인공인 최치원의 연대로 보아 고려 초기나 적어도 중기 이전으로 추측된다. 신라 말엽 이후 많은 최치원 관계 설화가 생성, 구전되면서 이 설화도 생성되었고, 이것이 처음 『수이전』에 수록되었다가 『태평통재』에서 『대동운부군옥』의 순서로 전개되었으며, 이야기 중의 혼교설화 · 재생설화적 요소는 『금오신화』나 기타 많은 조선 시대 국문소설의 혼교적 · 재생적 요소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던 것이다.

또, 설화의 내용 중 주인공들의 의사표시가 대부분 한시로 나타나 있어 전체적으로 20여 수의 시가 등장하는데, 이러한 설화소설 속의 삽입 시는 후대 한문소설류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는 데에서 이 설화의 문학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한편, 조선 시대 소설로 「최치원전」 또는 「최고운전」 · 「최문헌전」 등의 최치원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있지만, 이 「최치원설화」와 공통되는 점은 별로 없다. 「최치원전」은 지하국대적제치설화(地下國大賊除治說話) 등 다양한 조선 시대 구전설화의 집대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의 민족적 민중 의식이 표출되어 있어 성립 연대는 조선 중기 이후로 보이며, 설화적 내용에 있어서는 공통적인 요소가 없기 때문에 「최치원설화」와의 직접적인 상호 영향 관계는 인정되지 않는다.

참고문헌

『태평통재(太平通載)』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육조사적편류(六朝事迹編類)』
「최치원과 전설문학: 고운설화를 중심으로」(장덕순, 『아카데미논총』4, 세계평화교수아카데미, 1976)
「최치원전의 소설성」(조수학, 『영남어문학』2집, 영남대학교국문과, 1975)
「신라수이전소고 속」(최강현, 『국어국문학』26, 국어국문학회, 1963)
「수이전과 최고운전」(김갑복, 『성대문학』7, 성균관대학교문학회, 1961)
주석
주1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내용의 설화. 이 유형의 설화는 죽음과 탄생이 반드시 나타나야 한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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