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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崔賢)

북한인물

 1907년∼1982년.   북한의 군인·정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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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1907년∼1982년.북한의 군인·정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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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본명은 득권. 1907년 중국의 길림성(吉林省) 훈춘현(琿春縣)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에 동북항일연군 제1단장이 되어 보천보전투에 참가하였다. 광복 후 김일성 등과 함께 귀국하여 민족보위성(현 인민무력성) 부상(副相), 조선노동당 중앙위원, 인민무력부장(현 인민무력성)을 지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그의 아버지 최화심은 홍범도(洪範圖) 장군 아래서 독립군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 역시 어린 시절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고 자라났고, 독립군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0년 경신참변 때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가 속해 있는 독립군 부대를 따라 연해주로 이주하였다. 그 뒤 간도로 돌아와 민족주의 단체인 동만청년총동맹에 가입하였으며, 1925년 중국 군벌당국에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7년간 연길 감옥에서 복역하였고, 이 때 공산주의자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출옥 후인 1932년 7월연길현에서 적위대에 가입하였으며, 곧 연길현 유격대에 참가하였다. 그가 김일성(金日成)과 첫 상봉을 한 것은 1933년 9월이었다. 성격이 거칠고 무식하였으나, 군사활동에서는 돋보이는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유격대 내에서 빠른 승진을 하여 1936년에는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제1사 제1단 단장이 되었으며, 부대편제의 개편 뒤에는 동북항일연군 제3방면군 제13단 단장을 맡았다.
그러나 정치군사 지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여 광복 후 그의 활동영역이 주로 군내에 국한된 것도 이 때문이었으며, 1942년 7월에 결성된 동북항일연군 교도려(敎導旅)에서도 이미 이 정치군사 지식의 부재로 인해서 연장(連長)이상의 직책을 맡을 수 없었다. 항일 유격대 출신 여전사인 김철호와 결혼하였다.
광복 후 내무성 산하 38선 경비여단장을 거쳐서 조선인민군 제2사단장이 되었다. 한국전쟁중에는 제2군단장으로 활동하면서 인민군 후퇴시기에 유엔군의 배후에서 유격전을 전개한 것으로 유명하다. 1956년 4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제3차 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6월 민족보위성 부상이 되었다.
1958년 4월에는 내각 체신상, 1966년 10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제2차 대표자회에서 정치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68년 말에서 1969년 초에 있었던 군 수뇌부 숙청사건을 계기로 민족보위상이 되었고, 1972년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면서 중앙인민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70년대 당 정치위원·군사위원과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인민무력부장(민족보위상의 개칭) 등 막강한 직책들을 지녔다.
1976년 5월에 오진우(吳振宇)에게 인민무력부장의 자리를 넘겨주었다. 1980년 10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6차 대회에서도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정치위원과 군사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나, 1982년 4월 10일 사망하였다. 1997년까지 북한의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제1비서를 지냈던 최용해가 그의 아들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조선로동당연구  (이종석, 역사비평사, 1995)

  • 『김일성과 민주항일전쟁』 ( 와다 하루끼 저, 이종석 옮김,창작과비평사,1992)

  • 『북한인물록(北韓人物錄)』 (국회도서관,1979)

  • 東北抗日遊擊日記  (周保中, 北京 人民出版社, 1991)

  • 東北地區革命歷史文件匯集  (甲)

  • 現代史資料  (姜德相 編, 東京 みすず書房, 1976)

  • 「최현동지의 략력」 (『로동신문』,1982.4.10.)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2001년)
이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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