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정봉수(鄭鳳壽)와 김여기(金礪器)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당시의 경내 건물로는 사우(祠宇)·신문(神門)·동재(東齋)·서재(西齋)·강당·대중문(大中門) 등이 있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71년(고종 8)경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50년대 이후의 사항은 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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