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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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천역(賤役)에 종사하던 조례(皂隷) · 나장(羅將) · 일수(日守) · 조창군(漕倉軍) · 수군(水軍) · 봉군(烽軍) · 역보(驛保) 등을 통칭하는 말.
이칭
이칭
칠반천역
목차
정의
조선 후기 천역(賤役)에 종사하던 조례(皂隷) · 나장(羅將) · 일수(日守) · 조창군(漕倉軍) · 수군(水軍) · 봉군(烽軍) · 역보(驛保) 등을 통칭하는 말.
내용

원래의 명칭은 칠반천역(七般賤役)이다. 조례는 중앙의 각 관서에 배속되어 관서 및 고급 관원의 호위와 사령(使令)을 맡았던 경아전(京衙前)이고, 나장의금부 · 병조 · 형조 · 오위도총부 · 사헌부 · 사간원 · 평시서(平市署) · 전옥서(典獄署) 및 각 진(鎭) 등 주로 병정 또는 형정 관계의 관서에서 고급 관원의 시종과 경찰 · 주1 · 주2로서의 임무를 맡았던 경아전 · 외아전이다. 일수는 지방 관아와 역(驛)에서 사령 등의 잡사에 복무하였던 외아전으로 일수양반(日守兩班)이라고도 하였다.

조군은 조곡(租穀)의 조운(漕運)과 파선(破船)의 수리 및 선박의 보호 등을 임무로 하던 사람이고, 수군은 각 수영(水營)에 배속되어 주3하던 해군이며, 봉군은 주4 위에서 기거하면서 주5과 주연야화(晝煙夜火)의 신호 및 전령 등을 담당하였다. 한편, 역보는 역리(驛吏) · 역졸(驛卒)이라고도 하는데 각 역에 배속되어 역마(驛馬)의 사육과 그 밖의 잡사에 종사할 임무를 맡았다.

이들은 모두 신분적으로는 양인이었으나 역이 천한 신량역천(身良役賤)층의 일부로 양반은 물론 일반 양인으로부터도 천대를 받았다. 특히, 조군 · 수군 · 봉군 · 역보 등은 천역 중에서도 가장 힘든 고역(苦役)으로 간주되었으므로 일반 양인들은 이들의 역에 차정되는 것을 매우 꺼렸다. 또한, 조군 · 수군 · 봉군 · 역보들도 고역을 견디지 못하고 자주 도망하였다. 이러한 천역의 이탈을 막기 위해 도망자를 논죄하였을 뿐 아니라, 지속적인 확보를 위해 이들 천역을 세전시켰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조선초기(朝鮮初期) 신분제(身分制) 연구(硏究)」(유승원, 서울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85)
「조선후기(朝鮮後期)의 조군(漕軍)」(김용곤, 『명지사론』1, 1983)
「조선초기(朝鮮初期)의 역리(驛吏)의 신분적(身分的) 지위(地位)」(유승원, 『성심여자대학논문집』10, 1979)
「조선전기(朝鮮前期) 조운시고(漕運試考)」(최완기, 『백산학보』20, 1976)
「조선초기(朝鮮初期)의 신양역천계층(身良役賤階層)」(유승원, 『한국사론』1, 1973)
「조선후기(朝鮮後期)의 수군(水軍)」(이재룡, 『한국사연구』5, 1970)
「李朝貢納制の硏究」(田川孝三, 『東洋文庫』, 1964)
주석
주1

순라군이 경계하느라고 일정한 지역을 돌아다니거나 지키던 일. 우리말샘

주2

옥에 갇힌 사람을 맡아 지키던 사람. 우리말샘

주3

번을 섬. 또는 상번을 함. 우리말샘

주4

봉화를 올리던 둑. 전국에 걸쳐 여러 개가 있었는데, 특히 남산은 각 지방의 경보(警報)를 중앙에 전달하는 국방상 중대한 임무를 전담하는 곳으로 다른 곳과 달리 다섯 개나 있었다. 우리말샘

주5

높은 곳에 올라가 멀리 살펴보며 경계함. 우리말샘

집필자
이성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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