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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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문화
개념
땅을 얕게 파고 별다른 구조물을 마련하지 않은 채 시체를 직접 땅 속에 묻는 무덤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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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땅을 얕게 파고 별다른 구조물을 마련하지 않은 채 시체를 직접 땅 속에 묻는 무덤양식.
개설

구석기시대 이래 지금까지 인류가 마련한 가장 보편적인 묘제의 하나이지만, 구조가 간단하고 시체가 곧 썩어버리기 때문에 유구의 흔적을 확인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오늘날 이러한 유구의 발견 예는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

내용

토장으로서 인류 최고(最古)의 무덤은 구석기시대 중기의 무스테리안(Mousterian) 문화유적에서 발견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기의 것은 시체만을 땅 속에 묻는 간단한 방법이었다. 시체의 자세는 펴묻기〔伸展葬〕 또는 굽혀묻기〔屈葬〕였고, 껴묻거리로 석기나 동물의 고기 등을 넣었던 예도 있다.

중국의 신석기시대에는 얕은 구덩이를 판 후 시체를 바로 눕히거나 굽혀묻기한 토장이 유행하였으며 시체의 둘레에는 토기를 껴묻고 있다. 일본의 조몬시대(繩文時代)에는 시체를 보통 굽혀묻기의 자세로 세우거나 또는 굽혀묻은 뒤 지상에 흙을 돋우어 무덤표시〔墓標〕를 해 놓았다.

한편, 우리 나라의 토장 예는 대부분 두만강유역 등 동북지방에서 확인되고 있다. 1929년에 조사된 함경북도 웅기읍 송평동(松坪洞) 유적에서는 움집터·조개더미 등과 함께 매장유구가 확인되었다. 매장된 14구의 시체는 모두 머리를 동쪽으로 둔 채 똑바로 눕혀진 자세〔東枕仰臥伸展葬〕였다. 껴묻거리로는 양다리 사이에 10여 개의 돌살촉을 놓거나 머리맡에 항아리〔彩陶〕를 배치해 두었다. 이 무덤 중 일부는 조개더미의 밑바닥을 파내고 시체를 안치해 패각묘(貝殼墓)의 모습을 보이는 것도 있었다.

회령군 벽성면 봉의 흑구산(黑狗山) 유적에서는 급경사면에 계단식으로 파 들어간 곳에서 동침으로 펴묻기한 시체가 발견되었다. 여기에는 돌도끼〔石斧〕·돌살촉·가락바퀴〔紡鍾車〕·뼈검〔骨劍〕·옥팔찌〔玉環〕·대롱옥〔管玉〕 등이 껴묻혀 있었다.

이와 같은 토장법은 종성군 동관(潼關) 부근의 두만강변의 경사지대에서도 자주 발견되고 있으며, 만주지방의 소영자(小營子) 유적 등지에서도 확인되었다. 따라서 토장법은 청동기시대에 반도의 동북지방과 만주 일원에서 유행했던 특수한 무덤양식의 하나로 생각된다.

반면에, 이 지역에서는 한반도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무덤양식인 고인돌이 한 기도 확인되지 않고 있어 지역에 따라 무덤양식의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근에는 삼천포 늑도(勒島)의 초기철기시대 조개더미 유적에서도 토장이 대량으로 조사되어 예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의 고분』(김원룡,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4)
『朝鮮古代の墓制』(梅原末治, 座石寶刊行會, 1946)
집필자
지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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