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 ()

산업
개념
자신의 의사를 상대방에게 알리는 전달방식.
정의
자신의 의사를 상대방에게 알리는 전달방식.
개설

우편은 전신·전화와 함께 통신의 한 방법으로, 사람이 사회생활을 영위함에 있어 자기의 의사를 상대쪽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문자나 그 밖의 기호로 표시한 문서를 인마(人馬)·선차(船車) 또는 항공기 따위의 운송수단을 이용하여 송달하는 서비스업이다. 우편사업은 서신의 송달을 목적으로 시작되었으나 인쇄문화의 발달에 따라 신문·잡지 등의 정기간행물과 서적류의 전달수단으로 취급범위가 확대되었다.

소형포장된 화물의 간이운송수단인 소포우편이 등장하였으며, 전파에 의한 중간매개방법이 개발되어 전자우편이라는 최신의 제도가 탄생됨으로써 우편의 기정개념이 모호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 있어서 우편이란 우편기관에서 취급하는 문서 또는 물품의 전달사업을 총칭하며, 때로는 우편환·우편대체 등의 부대사업도 우편사업에 포함시킨다.

우편이라는 용어는 1840년에 영국에서 개발한 페니 포스트 시스템(penny post system)을 가리키는 것이며, 옛날의 역참제도와 구별된다. 우편의 기능은 만국우편연합이 채택한 견해에 따르면, “국민적 단합을 돕고 정부와 국민 사이를 친근하게 하며, 지역의 고립화를 방지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며, 고객과 공급자를 연결시키고 지식과 문화를 널리 보급시켜 준다.”고 하였다.

이 소박한 표현대로 우편은 국민생활에 한시라도 끊겨서는 아니 될, 인체에 비유하면 중추신경 역할을 할 뿐 아니라, 특히 현대와 같이 국제화사회·정보화시대에 있어서는 그 사명이 더욱 가중된다.

한편, 전신은 전기에너지의 작용에 의하여 문자·부호 또는 영상을 유선·무선의 연결방식으로 원격지에 신속히 송출하는 통신방법을 말한다.

전신은 일반적으로는 전보라고 하며, 우리나라에 도래되어 초기에는 전선이라는 용어가 쓰이기도 하였으며, 광의(廣義)로는 음성을 전달하는 전화와 함께 전기통신의 준말로 쓰이기도 한다. 전신은 근대과학의 소산으로 일반 교통수단에 의존하는 또 하나의 통신방법인 우편과는 속보성(速報性)에 있어 크게 다르다.

그러나 전신의 발명 이전에도 속보통신의 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봉수제도(烽燧制度)가 있었으나, 이는 간단한 경보(警報)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유럽 각국에서는 좀더 복잡한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의 발명에 주력하여 18세기에는 여러 가지 방식의 통신방법이 시험되었다.

전신이라는 용어는 텔레그래프(telegraph)의 역어(譯語)이다. 텔레(tele) 즉 원방(遠方)의 뜻과 쓴다[書]는 그래프(graph)의 그리스어가 결합된 것으로, 1794년부터 쓰여졌음을 보아도 그 기원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완전하지 못하여 널리 이용되지는 못하였다.

오늘날의 전신은 미국인 모스(Morse, S. F. B.)가 발명한 방식으로, 1843년 5월에 워싱턴∼볼티모어 간 40마일 구간에서 최초로 개통됨으로써 실용화되기 시작하여 통신의 혁신을 이룩하였다. 1895년 이탈리아의 마르코니(Marconi, M. G.)가 무선전신을 발명하였으며, 그 뒤 발전을 거듭하였다.

연혁

고대의 통신제도

오늘날 고도로 발달된 모든 통신방식은 분명히 문명의 소산이다. 그러나 인류의 원시시대에도 통신을 필요로 하였고, 그때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었으니, 구전·신호·봉화 따위를 들 수 있다.

그 뒤 문자의 발명으로 서신의 송달을 가능하게 하였고, 종이의 발명은 이를 더욱 쉽게 하였다. 그러므로 통신의 역사는 인류문화사와 걸음을 같이 하였다고도 하겠다.

서신 전달의 통신수단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참제를 거쳐 근대에 이르렀다. 우리나라는 488년(신라 소지왕 9)에 처음으로 사방(四方)에 우역(郵驛)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조선시대를 이어오면서 국력의 성장과 전란으로 인하여 성쇠를 거듭하였으나, 그의 완비는 보지 못하고 겨우 관군용(官軍用) 통신의 명맥만 유지하였으며, 민간통신에 있어서는 끝내 제도화되지 못한 상태에서 개화기를 맞아야 하였다.

우편제도의 도입

  1. 근대 우편제도의 탄생: 근대우편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의 힐(Hill, R.)은 우편제도의 근본적인 개선에 착안하여 1837년 1월 「우편제도의 개혁-그 중요성과 실용성」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가 주장한 골자는, 첫째 요금을 저렴하게 하고, 둘째 요금은 거리의 원근에 관계없이 균일제로 하며, 셋째 요금은 선납(先納)을 원칙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 획기적인 제안에 대하여 당시의 우정 당국은 “광망(狂妄)하고도 공상적인 미치광이의 잠꼬대”라고 극력 반대하였다. 그러나 국민의 여론이 이를 지지하고 신문의 성원을 얻어, 오랜 논쟁 끝에 드디어 힐의 제안이 의회를 통과하였다.

그리하여 1839년 8월 17일 국왕의 재가를 얻음으로써 새로운 제도가 1840년 5월부터 실시되고, 이와 함께 세계 최초의 우표가 발행되었다. 신식우편제도로 불리는 이 제도는 구미 각국이 다투어 채용하였으나, 우리나라에의 도입에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1. 우편제도의 견문: 쇄국주의 조선이 외국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한 것은 1876년(고종 13) 일본과의 조일수호조규 체결에서 비롯된다. 이 조약 부록에는 우편이용에 관한 조항이 제기되어 있어 외국과의 국교 개시에는 우편제도의 실시가 선행조건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우편제도에 관한 지식을 우리나라에 전한 사람은 김홍집(金弘集)이다.

그는 1880년 6월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어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주일 청국공사관 참찬관(參贊官) 황준헌(黃遵憲) 등과의 접촉에서 우편에 관한 지식을 얻었고, 그가 가지고 온 『조선책략(朝鮮策略)』에도 우편에 관한 간단한 언급이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황준헌의 소개로 들여온 정관응(鄭觀應)의 『이언(易言)』에 우편과 전보에 관한 소상한 해설이 있었다. 『이언』은 이 밖에 서구의 근대 문물제도를 36항목에 걸쳐 해설, 소개한 신지식의 백과사전격인 진서(珍書)로 국왕 이하 조야(朝野)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1883년에는 한글번역본과 함께 정부에 의하여 복각(復刻) 출판되기도 하였다.

그 뒤 1881년 일본의 문물염탐을 목적으로 이른바 신사유람단을 파견하였는데, 이때 일본의 우편제도를 관제(官制)·규칙(規則)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조사, 복명하였다. 지금 남아 있는 기록으로 보아 우편사업에 가장 중점을 두었던 것 같다.

우편제도의 창설

우정사의 설치

근대식 우편제도가 국내에 소개되는 한편, 미국·영국을 비롯한 구미 각국과 외교통상의 길이 트이자 우편의 실시가 절실히 요청되어 구체적인 조처가 취해졌다.

즉 1882년 12월 5일에 개설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 우정사(郵程司)가 분치(分置)되어 우편·전신사무를 관장할 기구가 마련된 셈인데, 우정사를 담당할 협판(協辦)에는 홍영식(洪英植)을 임명하였다.

홍영식의 미국 시찰

우정사 설치에 이어 4월에는 우편업무 실습을 위하여 조창교(趙昌敎) 등 수명의 유학생을 일본에 파견하였고, 홍영식도 그 해 6월 보빙사절단의 부사(副使)가 되어 정사(正使) 민영익(閔泳翊)과 함께 미국의 문물제도를 시찰할 기회를 얻어 뉴욕 우체국과 전신국을 시찰하는 등 발달된 미국의 통신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가 미국으로 가는 도중 일본에 잠시 머물렀을 때 그곳 신문(東京橫濱日日新聞, 1883.8.8.)에 “한국이 금번 우편제도를 개설하는데, 일본으로부터 3명의 요원을 고용한다.”는 기사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출발하기 전에 이미 우편을 개설하는 것으로 정부방침이 결정되었던 것 같다.

우정국의 개설

홍영식은 미국시찰에서 우편창설에 대한 확고한 결심을 하고 귀국후 국왕을 설득하여 드디어 1884년 3월 27일 “외국과의 교류를 위해 우정총국(郵征總局)을 설치하여 우편사업을 시작하며 홍영식을 총판(總辦)에 임명한다.”는 국왕의 전교(傳敎)가 내리니,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체신부는 양력으로 환산한 4월 22일을 체신의 날로 정하였다. 그러나 우정총국이 개설된 날짜는 홍영식이 총판에 임명된 4월 23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개업의 준비

총판에 임명된 홍영식은 본격적인 준비작업에 들어갔는데, 그 진척상황은 다음과 같다.

① 우정국 청사: 중부(中部) 견평방(堅平坊)에 있는 전의감(典醫監) 건물을 개수하여 사용하였다. 이 건물은 종로구 견지동 39번지에 현존하며, 지금은 체신기념관이 되었고 1970년 10월 12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② 우표: 5종(5문·10문·25문·50문·100문)의 우표(당시에는 郵鈔)를 일본에서 제조하였다.

③ 요원의 임명: 15명의 사사(司事)를 임명하였는데, 외국에 유학 또는 시찰경험이 있거나 동문학(同文學)에서 영어를 수학한 사람을 주축으로 신진기예의 엘리트를 망라하였으며, 그 중에는 이상재(李商在)·남궁 억(南宮檍)·신낙균(申洛均)·조창교·안종수(安宗洙) 등이 있었다. 이 밖에 일본인 오비[小尾捕明]·미야자키[宮崎言成]도 고용하였다.

④ 법규의 정의: 「우정규칙(郵征規則)」·「경성내우정왕복개설규법(京城內郵征往復開設規法)」·「경성인천간왕복우정규법(京城仁川間往復郵征規法)」·「우정국사무장정」·「우정총국직제장정」 등 5종의 법규를 제정, 간행하였는데, 이들 법규는 근대적 체재를 갖춘 최초의 법규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활판인쇄이어서 서지학적 가치도 매우 크다.

업무의 개시와 좌절

1884년 10월 1일(양력 11월 18일) 서울∼인천 간에 신식우편제도가 실시되고, 다음해 1월부터는 부산 등지에도 확대 실시하기로 예정되었다. 당시에 실시되었던 업무의 내용은 일본·미국을 본떴고, 서울 성내(城內)는 1일 2회 배달, 서울∼인천 간은 당일중에 배달되었다. 만국우편연합에 가입할 때까지의 편법으로 일본의 중개에 의한 외국우편교환도 가능하였다.

그 뒤 10월 17일 우정국 개설 축하연을 계기로 갑신정변이 발발하였다. 개화파에 의한 혁명 기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근대화의 선행사업으로 시작되었던 우편사업도 좌절의 비운을 맞았음은 애석한 일이다. 우정국은 10월 21일에 혁파되었는데, 이 짧은 기간의 취급상황은 분명하지 않고 다만 그때 쓰여진 우표가 15장 가량 현존할 뿐이다.

우편사업의 재개

자주적 재개의 준비

갑신정변의 실패로 개화(開化)의 꿈은 무산되고 우편 재개의 기운은 좀처럼 성숙하지 못하는 동안 일본의 우체국이 계속 존치되는 구실을 주었고, 청나라의 우표를 사용하는 해관우편(海關郵便)마저 이 땅에 설치되어 통신권을 외국이 지배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러던 중 1893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우편사업 재개의 첫 조처가 취해졌다. 즉 그 해 8월 17일 전보총국(電報總局)을 전우총국(電郵總局)으로 개편하고 미국 정부의 지원을 얻어 우편을 재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실시가 천연되다가 사사건건 일본의 간섭을 받는 갑오경장에 이어진다.

일본 영향하의 우편 재개

일본은 조선의 내정을 개혁한다는 미명 아래 갑오개혁이라는 성급한 내정개혁을 강요하면서도 통신권 장악에 야심을 품은 그들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는 우편사업의 재개에는 극히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삼국간섭으로 표면화된 열강의 주시를 받자, 대한정책도 약간 신중을 기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95년 6월 1일부터 서울과 인천에 우체사(郵遞司)를 설치하고 중단 10년 만에 우편사업이 재개되었다. 서울·인천에 이어 점차로 주요지에 우체사가 설치되고 1899년에 각 군·읍에까지 확장됨으로써 전국의 우편망은 일단 완비를 보았다[표 1]. 당시의 제도, 취급종목 등은 대체로 선진국에 비해 손색이 없었으나 다만 외국과의 우편교류는 완전히 봉쇄되었다.

[표1]우편기관 설치현황 ① 우체사

지명 업무개시일 지명 업무개시일
漢城 1895. 6. 1. 三和 1897.12.15.
仁川 1895. 6. 1. 務安 1897.12.29.
開城 1895. 8. 1. 金城 1897.12.29.
水原 1895. 8.10. 江陵 1898. 1. 5.
忠州 1895.10.21. 寧邊 1898. 1.15.
安東 1895.10.21.
(1897.3.23.)
淸州 1898. 2.25.
安城 1898. 2.25.
大邱 1895.10.21. 鐵原 1898. 3.19.
東萊 1895.10.21. 安東 1898. 3.26.
公州 1896. 2.16. 北靑 1898. 3.26.
全州 1896. 2.16. 沃溝 1899. 7.22.
南原 1896. 2.16. 昌原 1899. 8.20
羅州 1896. 2.16.
(1897.12.25.)
城津 1899. 9.10
殷山 1901. 7. 1
平壤 1896. 4.25. 麻浦 1901.10.21.
義州 1896. 4.25. 敦義 1901.11. 1.
春川 1896. 6. 5. 門外 1901.11. 1.
元山 1896. 6. 5. 草梁 1902. 1. 1.
咸興 1896. 6. 5. 恩津 1902. 7.10.
海州 1896. 6. 5. 慶州 1902. 8.15.
洪州 1896. 6. 5. 長興 1902. 8.15.
鏡城 1896. 6.15. 瑞興 1902. 8.15.
江界 1896. 6.15. 碧潼 1902. 8.15.
晉州 1896. 7.25. 濟州 1902. 8.15.
定州 1896.10. 5. 桃洞 1903. 9. 1.
慶興 1896.12.27. 始興 1903. 9.18.
尙州 1897. 3.23. 振威 1904. 7.10.
光州 1897.12.25. 鍾城 (未開始)

② 임시우체사(군·읍)

지역 업무개시일 비고
경기 1898.4. 1. 38개군
충남·충북·황해·강원 1898.5.15 104개군
전북·전남·경북·경남· 평남·평북·함남·함북 1898.6. 1. 199개군
鎭南郡 1900.5.16. 設郡
鰲川郡 1901.6. 1. 設郡
주:( )안은 폐지일자임.

외국 우편의 실시

우리나라의 우편제도는 외국과의 연락을 일차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이는 1884년 창업 당시 국왕의 전교에 명시되었고, 1893년 12월 21일 전우총국의 개편 발족 때에도 만국우편연합에의 가입을 스위스 정부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방해공작으로 묵살당하고 외국우편은 재한(在韓) 일본우체국을 이용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되니 자주적인 외국우편 실시는 바랄 수가 없었는데, 때마침 국왕의 아관파천(俄館播遷)사건이 일어나 일본세력이 축출되고 친러·친미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1897년 5월 워싱턴에서 개최된 만국우편연합 제5차총회에 주미공사 이범진(李範晉)을 수석대표로, 민상호(閔商鎬)를 대표로 참석시켜 연합의 개정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외교사상 최초의 국제기구 가입에 성공하였다.

정부는 프랑스우편관리 클레망세(Clemencet, J. V. E.)를 고빙(顧聘)하여 준비를 갖추고, 1900년 1월 1일부터 선진국과 동일한 제도 아래 세계를 향한 우편연락의 길을 열었다. 외국우편의 개시와 함께 관리기구인 통신원(通信院)이 설치되고 우체국의 증설, 우표의 국내 인쇄, 우편엽서의 취급 등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았다.

일본의 통신권 침탈

일본 통신망의 확장

우편제도의 완비에 따라 청나라의 해관우편은 쉽게 폐지시킬 수가 있었으나, 불법으로 설치한 일본우체국은 강력한 철수요구에도 불응하고 무력을 배경으로 더욱 확장에 광분하여 1905년 3월 말 당시 60여 개의 우체국을 전국 주요지에 설치하여 우편권이 이원화되는, 독립국가로서 있을 수 없는 괴이한 현상에 놓이게 되었다.

통신기관의 강제 통합

러일전쟁이 개전되자 일본군은 서울에 입성하였고, 1904년 2월 22일에는 우리의 주권이 무시된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었다. 이어서 3월 12일에는 한국침략의 원흉 이토[伊藤博文]가 내한하여 한국침략정책을 협의하였다. 하야시[林權助] 공사는 그의 대한사견개요(對韓私見槪要)에서 “우편·전신에 관한 특권은 일본 정부의 특권으로 하고 그 경영을 넓힌다.”고 하여 그들의 야욕을 표면화시켰다.

그리하여 한국 정부로 하여금 우편·전신사업의 관리를 일본 정부에 위탁하게 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그 해 12월 한국 정부에 정식으로 요구하는 한편, 무력으로 일부 통신기관을 점거하기에 이르렀다. 교섭과정에서 참정대신 조병식(趙秉式)은 사직하고, 통신원 총판 민상호는 이를 극력 반대하다가 1905년 3월 30일자로 해임되었다.

다음날 4월 1일에 외부대신 이하영(李夏榮)과 일본공사 하야시 간에 통신기관합동에 관한 협정서가 체결되었다. 국가의 중추신경이라 할 수 있는 통신기관을 일본에게 강탈당한 우리나라가 겪어야 했던 민족적 수난은 필연의 결과라 하겠다.

일제강점기의 우편

강제접수와 관민의 항거

강제로 체결된 협정에 따라 통신기관은 5월 18일 한성우체사(漢城郵遞司)의 접수로 시작되어 7월 2일 강계(江界)를 마지막으로 일본의 손에 넘어갔다[표 2].

[표2]일본측에 접수된 우편기관

郵 遞 司 領受所 臨時
郵遞司
總司 一等司 二等司 支司
1 16 27 3 2 343 392
주 : 諸書에 인용되는 일본측의 기록은 잘못된 것임.

그러나 군·읍에 소재하는 임시우체사까지 완전 접수하는 데는 수개월의 시일이 걸렸다.

접수에 있어서는 반드시 군대와 경찰을 앞세워 거의 강점하다시피 하였고, 따라서 이에 항거하는 종업원과의 마찰이 각처에서 벌어졌다. 한편 통신원과 한성우체사·전보사의 직원은 전원 사퇴하였고, 지방에서도 대부분의 간부는 봉급을 배액으로 인상한다는 감언에도 굴하지 않고 일본의 관리됨을 기피하여 직장을 떠났다[표 3].

[표3]직원의 거취동태

구분 접수 직전
(1905.4.30.)
접수 이후
(1905.7.1.)
통신원 25 -
우체사 주임관 28 6
판임관 207 83
260 89

일본 당국은 재한(在韓) 우체국과 군대와 함께 진주한 야전우체국에 상당수의 요원이 확보되어 있어서 본국에서 약간의 증원을 받음으로써 방대한 타국의 통신기관을 쉽게 장악할 수 있었으나, 의병(義兵)의 대일항전이 치열하였던 1907년에는 통신기관의 23% 이상이 의병의 습격을 받아 폐쇄당하는 불안한 상태가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

식민 위주의 통신정책

1910년 한국의 주권을 완전히 찬탈한 후에는 본격적인 식민정책이 강행되고 통신기관도 착취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요직은 모조리 그들이 차지했고 벽지에까지 일본인 우체국장을 배치하였는데, 대부분이 일본인 입주 제1호가 되어 본래의 임무 이외에 정치·경제·사회, 기타 한국경영에 참고될 사항을 조사, 보고하는 정보원의 특수임무도 함께 부여되었다.

그 뒤 1931년 만주사변 발발 후에는 대륙과의 통신거점으로,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전시체제 아래에서 전쟁수행의 수단으로 통신사업이 운영되었다.

사업의 확장과 제도의 신설

일본이 통신권을 장악한 40년 동안에 세운(世運)의 진전에 따라 우편기관도 약간 증설되었으나 주로 일본인 거류지에 집중되었다.

우체국의 보급률에 있어서는 일본 본토의 8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또한 그간에 제도의 신설도 있기는 하였으나[표 4], 이 역시 일본인의 본토연락 및 송금과 물자의 수송이 주가 되었기 때문에 한국인을 위한 진정한 서비스제공은 끝내 외면하다가 8·15광복의 날을 맞게 되었다.

[표4]특수취급업무의 신설

업무종류 신설시기 업무종류 신설시기
소 포 1905. 7. 내용증명 1910.11.
가격표기 1905. 7. 속 달 1910.11.
대금인환 1905. 7. 시내우편 1911. 3.
집금우편 1905. 7. 요금후납 1912. 4.
소송서류 1905. 7. 요금별납 1919. 5.
접수시각증명 1908.11. 항공우편 1929. 4.
연하우편 1909.12. 군사우편 1931.11.
광복 후의 변천

과도기의 우편

8·15광복의 시점에서 일본의 우편사업은 거의 마비상태에 있었다. 제2차세계대전이 치열해지면서 인력의 부족과 물자의 고갈로 1944년경에는 대부분의 특수취급이 중지되고 긴급우편제도를 실시하여 공문서 전달 또는 전쟁업무 수행에 긴급히 필요한 우편물에 한하여 송달이 보장되는 최악의 상태에서 광복을 맞았다.

그 뒤 광복 직후의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어 미군정 당국도 효과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못하고 취급을 중지하였던 업무를 부활하는 정도의 미봉책으로 현상 유지에 급급하였다.

정부수립과 사업의 재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우편업무는 체신부가 관장하게 되었다. 엄밀히 따진다면 우리 민족이 자주적으로 우편사업을 운영한 것은 이때부터로 볼 수 있다.

새 정부는 ① 체신의 자주성 확립, ② 통신사업의 정비확충, ③ 우체국의 1면(面) 1국(局) 설치 등 의욕적인 통신정책을 표방하고 우편사업의 재건에 착수하고 단시일에 업무의 정상화를 이룩하여 장차 비약적인 발전이 기대되었다.

민족적 수난의 극복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불의의 침공으로 6·25전쟁이라는 민족적 참극을 초래함에 따라 정비도상에 있던 우편사업도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우체국 건물의 80%가 파괴되고 피침지역의 우편시설과 기물도 대부분 멸실되었다[표 5]. 국군의 반격작전 전개에 따라서 1950년 9월 22일에는 육군·해군·공군 부대에 야전우체국(뒤에 군사우체국으로 개칭)이 설치되고 군사우편의 취급이 개시되었다.

[표5]6·25당시의 우체국건물 피해상황

피해내용 패해수(개소)
전소전파 50
대 파 115
반 파 276
일부파괴 56
496

군사우편은 전후방을 연결하여 국군의 사기앙양과 작전수행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평양지구에까지 우편선이 일시 연장되었다. 한편, 1953년 7월 정전협정 성립과 함께 피해를 입었던 우편시설도 본격적인 복구에 들어갔으나, 1960년 말에야 겨우 전쟁 전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면 1국 제도의 완성

5·16군사혁명 이후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일환으로 통신사업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건국 이래의 목표였던 1면 1우체국의 설치에 착수하여 1966년 말에 이의 실현을 보아 농어촌의 진흥·개발과 농어민의 생활문화의 향상에 기여하게 되었다.

우편사업의 현황과 전망

우편기관의 보급과 작업

한국경제의 급속한 발전에 따라 우편기관도 매년 증가되어 일제강점기에 비하면 7배에 가까운 신장을 보았고, 교통수단의 발달에 따라 우편의 신속화도 어느 정도는 성취되었다. 1980년대 우편작업의 기계화는 아직 미흡한 단계에 있었으나 규격봉투의 제정, 우편번호의 실시 등으로 작업의 능률은 향상되었다.

그러나 우편기관의 보급률은 선진국에 비하여 크게 뒤떨어졌을 뿐 아니라 만국우편연합이 권고하는 표준 설치기준에도 미달되었다. 하지만 1990년대 개인 컴퓨터의 보급이 보편화되어 이른바 전자우편(Email)이라는 새로운 전신체제가 도입됨에 따라 전래적인 우편체제는 이제 21세기를 맞아 전기를 맞게된 것이다.

우편서비스의 현황

1980년대 우편사업을 전신·전화사업과 함께 체신부가 전담하는 동안 정부의 통신정책이 전신전화사업에 편중된 경향이 없지 않았다.

이에 따라 우편서비스는 일제강점기로부터 이어온 특수취급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 뒤 행정우편·특급우편·민원우편 등을 개발, 실시하였다. 1981년부터 전신전화사업이 공영화되어 분리운영하게 됨에 따라 우편사업의 불건전 운영이 취약성으로 노출되었다.

1990년대 전자우편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면서 전래적인 우편과 함께 정보통신부가 총괄 담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전래의 우편업무는 서비스 측면에서 많이 개선되었으나, 전자우편의 상대적인 비중에 의해 선진국 수준의 우편체제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전자우편의 경우 우편 전달체계는 신속하나 상대의 컴퓨터 기능에 따라 전달 내용이 그대로 전달되는 데는 아직도 한계가 있고, 통신망의 이용료도 비싼 편이다.

우편의 이용 상황

광복 후 우편의 이용률은 꾸준히 증가하였다. 그러나 국민소득의 증가를 감안할 때 선진국에 비하여 극히 저조하다. 우편 선호도의 차이를 국민성에 돌리기도 하나 정부시책의 미흡에도 원인이 있다 하겠다. 1982년 12월 문교부·체신부·문화공보부 등 3부 합동으로 전개된 편지쓰기운동은 수입증대책이 될 뿐 아니라 국민정서의 순화, 민족단합의 차원에서도 적절한 시책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1990년대 정보화시대를 맞으면서 정보통신에 의한 전자우편이 보편화되면서 종래의 우편이용 상황은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간단한 서신은 이제 전자우편이 차지하는 가 하면 소포의 경우도 우편보다는 물류의 보편화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 다만 아직도 전자우편이 통일된 주소체계 등이 이뤄지지 않고 공개적인 통합시스템으로 운영되지 못한 실정에 있어 여전히 한계는 있다.

우편사의 재조명

우리 선인들이 경륜의 부족으로 통신사업에 무관심했던 약점을 이용하여 일본은 통신기관의 진출을 침략의 급선무로 삼았다. 선점·침탈의 수법으로 한국병탄에 앞서기 5년 전인 1905년에 완전히 장악한 사실은 한국침략사에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역사적 사실이므로, 이에 대한 연구도 통신사업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과 함께 한층 제고되어야 할 과제라 하겠다.

전신사업의 도입

전신사업의 견문

실용기에 들어간 전신은 단시일에 구미 각국이 채택하게 되었다. 동양에서는 일본이 1869년(東京∼橫濱), 중국이 1881년(上海∼天津)에 각각 국내선을 개통한 정도였고, 우리나라에서는 이보다 더욱 늦어졌다. 우리 나라에도 전신에 관한 정보가 중국을 내왕하는 사신을 통하여 일찍이 들어와 ‘일순만리전신(一瞬萬里傳信)’이라는 표현으로 조야(朝野)의 관심사가 되었다.

1876년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김기수(金綺秀)에게 국왕이 친히, “일본에서는 전신·화륜(火輪)·농기(農器)를 제일급무로 삼는다는데 들은 바가 있느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김기수는 일본 공무성(工務省)의 안내를 받아 전신의 실태를 살펴보고 감탄하여 소상한 기록인 『일동기유(日東紀游)』도 남겼으나, 그의 범상한 눈에는 다만 진기한 사물로만 비쳤던 듯 국왕의 질문에도 애매모호한 답변을 하였으며, 여론을 환기시킨 흔적도 찾을 수 없다.

그 뒤 1881년에 일본에 파견된 신사유람단에 의하여 일본의 전신제도가 조사, 보고되고, 같은 해 영선사(領選使)에 인솔된 유학생들이 톈진(天津)의 전기창(電氣廠)에 배속되어 전신의 실기를 습득하고 귀국할 때에는 전화기 2대 등 통신기재도 들여와 전신개설의 기운이 점차 성숙되었다.

이 밖에 영국인 홉슨(Hobson, B.)의 『박물신편(博物新編)』, 정관응의 『이언』 등의 서적을 중국에서 들여와 이를 통하여서도 전신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한일간 해저전선 개통

1882년 12월 5일 외교통상사무를 비롯한 시급한 업무를 관장할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을 개설하고 우정사를 두어 전신·우편·철도 등의 교통통신사업을 분장하였다.

당시의 우리 정부는 제1차적인 사업을 전신의 개설로 정하고 한중간(仁川∼上海) 해저전선의 부설을 계획하였는데, 이때에 일본이 선수를 써 1882년 12월 7일에 한일간(釜山∼長崎)의 해저전선부설권을 요구해 왔다.

교섭과정에서 독판(督辦) 조영하(趙寧夏)가 반대하였으나 민영목(閔泳穆)과 교체되어 1883년 1월 24일에 조약(釜山國設海底電線條約)이 체결되었다. 당시 동양의 해저전신선은 덴마크의 대북부전신회사(大北部電信會社, Great Northern Telegraphy Company)가 독점하여 일본은 단독으로는 해저선을 부설할 권한이 없었고 그 능력도 없는 터였다. 이에 일본은 덴마크가 한국과 국교가 없는 점을 이용하여 한국의 동의를 조건으로 사전에 그들에게 면허장을 교부하였다.

단순한 중개역할만으로 막중한 이권을 얻은 일본은 조약에 규정된 “25년간 이 해저선과 이(利)를 다투는 전선의 가설을 못한다.”는 조항을 확대해석하여 한국 국내 전선의 가설을 견제하는 등 한일외교상 가장 말썽이 많던 전선분쟁(電線紛爭)의 소지를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1884년 2월 15일 부산에 설치된 일본 전신국을 통한 세계 각국과의 전신이 개통되었으나, 순전한 외국선이고 또 일본인 거류민의 이용을 위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한국전신의 개설은 인천-서울-의주를 연결하는 서로전선(西路電線)을 그 시발점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전신사업의 개설

서로전선의 개통

우정사가 설치된 뒤 1883년에는 전신 개설에 대비하여 일본에 유학생을 보내 실무수습을 시키는 한편, 미국 상사에 전신기 8좌(座)를 주문하는 등 서서히 전신 개설의 준비가 진행되던 중 1884년 갑신정변이 발발하여 모든 계획이 중단되고 급기야는 타의에 의한 전신 개설을 보게 되었다.

갑신정변이 청나라측에 유리하게 수습됨을 계기로 정변 사판(査辦)의 임무를 띠고 내한한 회판북양사의(會辦北洋事宜) 우대챙(吳大硎)의 건의에 따라 청나라의 차관으로 인천∼서울 간, 서울∼의주 간에 이른바 서로전선을 가설하게 되었다.

서로전선의 가설은 1885년 6월 6일에 조인된 중조전선조약(中朝電線條約, 일명 義州電線合同)에 의거, 청나라 전보국으로부터 10만 냥을 무이자, 5년 거치, 20년 상환의 조건으로 차관하고, 중국에서 파견된 기술진에 의하여 인천으로부터 기공, 공사구간별로 개통되어, 의주에 이르러 중국과 연결하였다.

업무의 운영은 조약규정에 따라 청나라 전보총국 관할하의 한성전보총국(漢城電報總局, 지방은 分局)이 전담하고, 총판(總辦)을 비롯한 요직도 그들이 차지하였다. 그러나 공사에 필요한 전주(電柱)와 노력을 우리측이 부담하였고 선로 보호를 정부가 책임졌으며, 차관도 연차적으로 상환중에 있었으므로 경영의 주권이 법적으로는 한국 정부에 있었다고 보겠다.

조선전보총국의 설치

서로전선 개설과 함께 일본은 서울∼부산 간의 전선가설을 강력히 요구해 왔다. 정부도 전국 주요지, 특히 각도(各道: 감영소재지)와의 연락을 위하여 독자적인 전선 가설이 긴요하게 되었으나, 일본 및 청나라와 체결된 조약에 구애되어 논쟁이 거듭되었다. 그러다가 1887년 3월 13일 조선전보총국을 개설하고 홍철주(洪澈周)를 총판에 임명함과 동시에 공사를 추진하여 남로전선(南路電線)이 개통되었다.

이어서 북로전선, 청주지선, 동칠릉(東七陵: 현재의 동구릉) 선이 개통되었는데, 북로전선은 함흥까지 계획되어 한로선(韓露線)을 형성하여 유럽과 연락될 예정이었으나 일본의 반대로 원산에 머물렀다. 그리고 동칠릉선은 익종왕후(翼宗王后: 대왕대비 조씨)가 안장된 유릉에 국왕의 조석문안을 위한 대상(大祥)이 끝날 때까지의 임시선이었다.

1888년 6월 1일 남로전선개통(南路電線開通)(서울-공주-전주-대구-부산), 1889년 4월 15일 청주지선개통(淸州支線開通)(공주∼청주), 1890년 4월 동칠릉선개통(서울∼동칠릉), 1891년 6월 25일 북로전선개통(서울―춘천―원산)이 있었다. 조선전보총국은 우편사업을 겸장하기 위한 조처로 1893년 8월 17일 전우총국(電郵總局)으로 개편되었다.

전신사업의 중단

전신이 개설된 후 10년간에 국내의 간선(幹線)이 겨우 개통되고 우편사업의 재개와 함께 통신사업의 발전이 기대되던 시기에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이어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일본군은 군사작전을 위하여 서울∼인천 간, 서울∼부산 간에 군용전신을 불법가설하였고, 청나라가 운영하던 서로전선을 접수하였으며, 북로전선도 작전용으로 강제점유하였다.

이로써 한국은 남로전선만을 장악하는 결과가 되었으나, 이 역시 동학농민군에 의하여 전주 부근에서 절단되었을 뿐 아니라 나머지 구간도 일본군이 수시로 환용(換用)하기 때문에 모든 전선이 거의 중단상태에 이르렀다.

전신사업의 재건

청일전쟁을 전후해서 일본은 무력을 배경으로 우리나라의 내정개혁에 착수하여 1894년에는 육조(六曹) 폐지를 단행하였다. 공조(工曹)와 전우총국이 통합된 공무아문(工務衙門)이 발족되고 전신업무도 관장하였으며, 현업전신기관으로 전신사(電信司)를 두었으나 실제로 전신업무가 정상화되지는 못하였다. 1895년에는 다시 기구가 개편되고 전신업무는 농상공부의 소관이 되었으며, 전신사는 전보사(電報司)로 개칭되었다.

1896년 7월에 겨우 서울∼의주선이 개통되고 인천·원산·공주선은 1897년에 개통되었다. 그 뒤 전신선이 확장되어 1905년 3월 당시 서울·개성·평양·의주·인천·원산·공주·삼화·전주·무안·대구·부산·안주·금성(金城)·옥구·창원·운산·함흥·해주·은산·북청·성진·경성(鏡城)·영천·충주·광주·은진·수원·진위 등지에 전보사가 설치되었다.

그 밖의 지방은 가까운 전보사에서 특사(特使) 또는 우편으로 송달하는 방법에 의하여 전국이 전신의 이용권에 들게 되었다. 한편, 1902년 3월 20일에는 한성∼인천 간에 처음으로 공중용 전화가 개통되었다. 이와는 별개로 궁내부의 전용전화도 있었다.

일제 침략하의 전신

일본의 통신권 침탈

1884년 해저전선 부설로 부산에 전신거점을 확보한 일본은 계속해서 한국의 전신권 획득을 노리다가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재빨리 부산-서울-인천간 군용전신을 불법가설하였다. 강화(講和) 후에도 철수에 불응하고 1894년 12월 부산·서울·인천의 재한(在韓) 일본우체국에 연결시켜 일반전보를 취급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에는 북한 주요지에 군용통신소를 고정 배치하여 전신권을 확보한 뒤 급기야 1905년 4월 1일 한일통신기관 합동에 관한 협정을 강제 체결하여 우리나라의 통신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전신정책

한국의 통신사업을 자국의 자본으로 정비, 발전시키겠다는 명분 아래 통신권을 강탈한 일본 정부가 제1차로 1906년에 행한 전신선의 확장은 목포∼부산, 목포∼서울, 인천∼군산, 인천∼목포, 인천∼부산, 인천∼진남포로, 순전히 경제침략의 거점에 집중된 한 가지 사례만으로도 통신정책의 방향을 엿볼 수 있겠다.

또한, 1907년 의병의 항일투쟁이 치열해지고 전신선의 파괴가 빈발하자 이의 복구비를 요구하였다. 또 1908년부터 3년간 의병 출동지역을 중심으로 경비전화의 가설비로 약 40만 엔(円)의 예산을 우리 정부가 부담하여 130여 개의 경비전화선을 가설하여 우리 의병의 탄압작전용으로 제공되었다. 다만, 일부 전화선의 유휴시간을 이용한 일반전신의 취급이 허용되었지만 이는 국민을 기만하기 위한 술책에 불과하였다.

일제가 통신기관을 장악하였던 40년간(1905∼1945) 한국의 전신정책은 ① 일본인 거류민의 편의 제공, ② 한국민 탄압의 수단, ③ 대륙진출의 중계역할, ④ 전쟁수행의 도구화 등으로 이용될 뿐 한국민의 복지향상은 외면하였고, 1941년에는 급기야 ‘한글’전보마저 폐지하였다.

광복 후의 전신

전신사업의 파괴와 복구

제2차세계대전의 말기에는 물자의 결핍으로 전신사업이 마비상태에 있어서 중요 통신망만을 유지할 목적으로 지하국(地下局:전 서울중학교 자리)을 건설하는 도중에 광복을 맞았다.

사상 처음으로 자주적인 전신사업의 운영이 시작되었으나 기존시설의 복구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6·25전쟁이 발발하여 북한남침지역의 전신시설이 거의 파괴되어 이의 복구에 다시 수년이 걸렸다.

전신사업의 사양화와 장래의 전망

그 뒤 전신사업은 순조로운 발전을 거듭하여 시설의 현대화, 서비스의 다양화로 그 이용도수가 매년 증가하여 1970년대 초반에 절정에 이르렀고, 이·동(里洞)민의 이용을 편리하게 하였다. 한편, 국제화의 추세에 따라 국제전신의 비약적인 발전을 보았으나 전화의 급격한 보급으로 의사전달의 역할은 전화에 잠식되었다.

1980년대 이후에는 전신의 감소추세가 두드러지게 나타나 이제 전신은 사양사업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앞으로의 21세기 전신사업은 형식적인 이점과 기록성의 장점을 살려 경조(慶弔) 전보, 모사(模寫) 전보 등의 이용확대를 도모하고, 우편과 연결하는 전자우편제도의 실시 등으로 그 활로를 찾을 것으로 전망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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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개화사연구』(이광린, 일조각,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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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전기통신사업사』(체신부, 1970)
『한국우정사』Ⅰ(체신부, 1970)
『전기통신사업팔십년사』(체신부, 1966)
『구한국시대의 우표와 우정』(진기홍, 경문각, 1964)
「한국체신사」(진기홍, 『한국문화사대계』Ⅲ,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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