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미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오위도총부도총관, 좌찬성,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공보(公甫)
시호
문양(文襄)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21년(세종 3)
사망 연도
1471년(성종 2)
본관
청주(淸州)
주요 관직
오위도총부도총관|좌찬성|이조판서
정의
조선 전기에, 오위도총부도총관, 좌찬성,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공보(公甫). 한수(韓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개국공신 한상경(韓尙敬)이고, 아버지는 함길도관찰출척사 한혜(韓惠)이며, 어머니는 성달생(成達生)의 딸이다. 그의 처는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언니로, 윤번(尹璠)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38년(세종 20) 18세의 나이에 음보로 충의위사용(忠義衛司勇)이 되고, 부사직으로 감찰을 역임하였다. 나주판관을 거쳐 1452년(문종 2) 형조도관좌랑(刑曹都官佐郎)에 제수되었다. 다음 해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갈 때 그를 보좌한 공로를 인정받아 군자판관이 되었다.

1455년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세조가 즉위하자 추충좌익공신(推忠佐翼功臣) 3등에 책록되고 통훈대부(通訓大夫)가 되었다. 1456년(세조 2) 절충장군행호분시위사대호군지사간원사(折衝將軍行虎賁侍衛司大護軍知司諫院事)로 옮겨진 뒤 그 해 6월 동부승지로, 7월에 우부승지로, 10월에 좌부승지로 승진하였다.

1457년 우승지로 재직중 세자의 질병을 열심히 간호해 왕의 칭찬을 받았다. 1458년 9월 가선대부(嘉善大夫)로서 호조참판이 되고, 서원군(西原君)에 봉해졌다. 1461년 하삼도(下三道)의 부호(富戶)를 추쇄(推刷: 부역 또는 병역 기피자를 찾아냄.)해 평안도·황해도·강원도 등에 이주시켰다.

또한 안집도순찰사(安集都巡察使)가 되어 제방을 쌓고 진전(陳田)을 개간하는 등 북방 개척에 큰 공적을 세웠다. 1463년 자헌대부(資憲大夫)로서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 때 세조는 군액 부족을 우려해 3도의 군적(軍籍)을 정비하도록 하였다.

호구(戶口)의 증감을 정확하게 조사해 왕의 뜻에 부합하였다. 1465년 정헌대부(正憲大夫)로서 겸사복장(兼司僕將)이 되었다가 오위도총부도총관으로 옮겼다. 1467년 숭정대부(崇政大夫)로서 평안도병마수군절도사 겸 영변대도호부사로 부임하였다.

그 해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평안도의 정병(精兵)을 이끌고 가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또한 숭록대부 우찬성 겸 오위도총부도총관이 되었다. 1469년(예종 1) 좌찬성으로 옮기고 이조판서를 겸하였다.

1470년 보국숭록대부에 승품되고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471년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고, 이어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참고문헌

『세조실록(世祖實錄)』
『예종실록(睿宗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식우집(拭疣集)』
『삼탄집(三灘集)』
집필자
한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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