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업은행 ()

경제
단체
우리나라 산업 개발과 국민경제의 발전을 위해 설립된 은행.
목차
정의
우리나라 산업 개발과 국민경제의 발전을 위해 설립된 은행.
연원 및 변천

1918년 이후 존속하여 오던 조선식산은행을 승계하여 1954년 4월 설립되었다. 일제강점하 일본금융권의 일부분으로 존립하였던 우리나라의 금융시장은 광복을 계기로 고립의 위기에 있었고, 그러한 상황하에서 금융기관은 미약하나마 이전의 전문적 분담기능을 상실한 채 단기상업금융업무만으로 그 명맥을 유지할 뿐, 장기산업금융 본래의 기능은 수행하지 못하였다.

정부는 전재복구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산업금융기관의 설립을 위하여 1951년 5월 당시 임시수도 부산에서 한국산업은행법안의 기초에 착수하여 그 해 10월 법 초안을 국회에 회부하였다. 그러나 이 법안은 전쟁의 와중에서 심의가 보류되었다가 휴전 후인 1953년 11월 국회를 통과하여 12월 법률 제302호로 공포되었다.

정부가 1954년 의결기관인 이사회와 집행책임자인 총재를 정점으로 하는 직제구성과 정부출자금 1,000만 원 납입을 완료함으로써 이 은행이 발족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취지로 설립된 이 은행은 「한국산업은행법」에 천명하듯이, 그 목적을 국책에 순응하여 산업의 개발과 국민경제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중요 산업자금을 공급, 관리함에 두고 있으며, 이의 원활한 달성을 위하여 그 성격과 기능면에서 보통의 금융기관과 다른 점을 가지고 있다.

즉, 이 은행은 정부의 단독출자에 의한 공법인으로 자금공급에 있어서 전력·석회·철강 등 기간산업과 중요 산업을 지원대상으로 하여 다른 금융기관이 공급하기 곤란하거나 취급이 불가능한 산업자금을 공급하는 등 선별적인 금융을 하고 있다. 재원을 조달하는 것도 재정자금, 산업금융채권의 발행, 외국자본의 차입, 특수기금을 활용하는 등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정부정책에 적극적으로 부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한국은행법」과 「은행법」의 적용을 배제하고 있다.

이러한 성격과 기능을 가지는 이 은행은 설립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재복구와 경제개발계획수행의 추진역으로서 경제개발에 중추적 구실을 담당했다. 즉, 초창기에는 전재를 복구하고 자립경제의 모색을 위한 안정적인 산업기반을 구축하는데 정책의 초점이 놓여짐에 따라, 대충자금·정부차입금·산업금융채권발행대전(産業金融債券發行代錢)을 주요 재원으로 하여 기간산업 분야에 대한 자금공급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비료·시멘트·판유리 등 3대 산업의 건설을 비롯하여 6·25전쟁으로 피해가 컸던 발전·배전 부문의 복구와 전재탄광의 보수 및 시설증강을 중점지원하였다. 이 밖에 수리·광업·섬유를 비롯하여 화학·제철·제련·기계 부문과 주택 부문 등 각 분야에 걸쳐 광범하게 자금을 공급하여 국민경제규모를 급속도로 확대시켰다.

전재복구단계를 거쳐 경제개발계획의 실시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 은행은 명실상부한 개발계획 추진의 분담자의 소임을 부여받게 됨에 따라 그 기능과 역할이 배가되었다. 즉,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기간 중 증자, 산업금융채권의 일반매출 개시 등 내자조달을 적극화하면서 외자도입을 위한 지급보증업무를 취급함으로써 개발계획 수행에 소요되는 외자를 민간기업이 조달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이와 함께 중소기업자금과 수산자금을 중소기업은행과 수산업협동조합에 각각 이관하고 성업공사(成業公社)를 발족시켜 불건전 채권을 승계시킴으로써, 체제정비를 통한 개발금융지원기능을 강화하여 수입대체산업·수출산업 및 중요 생활필수품생산업을 적극 육성하였다.

이어, 제2차 및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수행되는 과정에서 종래 개발금융에 따르던 주택금융을 한국주택은행에 이관하는 한편, 1969년 한국산업은행의 출자기업체 관리에 관한 법률의 제정을 계기로 막강한 지주관리기능(持株管理機能)을 가지게 되는 등 그 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수출증대와 중화학공업화의 추진에 필요한 막대한 설비자금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국민투자기금대출업무의 취급, 외국환업무의 확대 등 업무의 다양화를 추구하였다.

특히, 이 기간 중 기계·전자·석유화학 등 중화학공업에 집중적으로 자금을 공급하여 산업구조의 고도화정책을 금융면에서 뒷받침하는 한편, 수출산업의 육성을 위하여 수출산업설비금융을 실시함으로써 우리나라 수출산업의 기반조성에도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중화학공업의 건설을 위한 지원은 제4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기간에도 계속되었다. 이 계획의 후반에 이르러서는 고도성장에 따른 인플레이션 압력가중 등 그 부작용이 심화되었고, 제2차 석유파동으로 세계경기가 침체국면으로 접어드는 등 대내외 경제여건이 악화되자 이에 대응하여 중화학공업투자조정·기술개발·산업기초설비확충 등 산업의 구조조정과 체질강화를 위한 지원에 주력하였다.

이 은행은 설립 후 30년 간 경제개발과정에서 경제여건의 변천에 따라 그 기능과 체제를 강화하면서 정부의 산업 및 산업금융정책에 부응하여 중요 산업에 자금을 공급함으로써 산업금융의 중추기관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1954년 발족 이후 이 은행의 전체 금융기관에서 차지하는 시설자금의 비중은 약 40%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투융자활동(投融資活動) 외에도 개발금융 영역의 확대와 기법의 개발을 위하여 1972년에 한국산업리스주식회사를, 1977년에는 새한종합금융주식회사를 설립하여 국내 금융시장의 발전을 도모하였다. 또한, 1977년 뉴욕에 한국연합금융회사를, 1981년에는 싱가포르에 산업금융유한공사를, 1986년에는 홍콩에 산은아주금융유한공사를 설립하여 외자도입 체제를 강화함과 동시에 국제화시대에 우리 기업의 해외진출을 위한 교량역할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이 밖에 국내외경제와 산업경제의 조사·연구 및 통계조사를 통한 정책건의와 경영 및 기술지도에 의한 기업합리화 유도로 산업발전에 기여하였음도 빼놓을 수 없는 업적으로 평가된다. 1994년 1월 상업증권지분을 제일은행에 매각하였고, 9월 대한주택공사와 인수불계약을 체결하였다. 1995년 11월 ㈜한양 정리계획안을 인가하였으며, 1998년 7월 한일은행과 협병을 선언하였다.

1996년 말 당시 주요 사업은 자금운용·수수료·신탁업무 등이었다. 관계회사로는 한국상업은행유한공사·뉴욕한국상업은행·한국상업은행독일유한회사·인도네시아한국상업은행·상은리스㈜·상업투자자문㈜ 등이 있었다. 총자산은 31조 4369억 원, 자본금 8500억 원, 예수금 17조 8804억 원, 총대출금 13조 9660억 원, 영업수익 2조 2524억 원이었다. 종업원은 관리사무직 7,695명, 생산직 68명 등을 합쳐 7,763명이었다.

현황

2008년 정부의 민영화 방침에 따라 산업은행이 2009년 10월에 설립된 산은금융그룹(KDB금융그룹)의 자회사로 편입됨으로써 KDB산업은행으로 새롭게 출범하였다. 민영화 이후 KDB산업은행의 주요 업무는 기업금융, 투자금융, 국제금융, 수신 및 개인금융 등이며, 2010년 대우건설을 인수하였다. 2015년 산업은행은 산은금융지주, 정책금융공사와 합병하여 통합산업은행으로 출범하였다. 정부가 지배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으며, 본점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은행로 14(여의도동 16-3)에 있다.

참고문헌

『연차보고서』(한국산업은행, 1986)
『한국금융연감』(은행계사, 1985)
『한국산업은행삼십년사』(한국산업은행, 1984)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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