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문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대사헌, 병조참판, 함경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자예(子藝)
시호
공간(恭簡)
이칭
서천군(西川君)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46년(세종 28)
사망 연도
1507년(중종 2)
본관
청주(淸州)
주요 관직
동지중추부사|대사헌|병조참판|오위도총부도총관|함경도관찰사
정의
조선 전기에, 대사헌, 병조참판, 함경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예(子藝). 할아버지는 함길도관찰사 한혜(韓惠)이고, 아버지는 좌찬성 익대좌리공신(翊戴佐理功臣) 한계희(韓繼禧)이며, 어머니는 증호조참판 여계(呂稽)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공신의 자제로서 1462년(세조 8) 음보(蔭補)로 문소전지기(文昭殿直)에 임명된 뒤 세자익위사세마 겸 선전관(世子翊衛司洗馬兼宣傳官)·이조정랑·군기시첨정·부정(副正)을 거쳐, 부평·철원·강화의 부사를 역임하였다.

1478년(성종 9) 충훈부경력(忠勳府經歷)이 되고, 집의·제용감정(濟用監正)·통례원좌우통례(通禮院左右通禮)를 거쳐, 1492년 우부승지·좌승지를 역임하였다. 1495년(연산군 1) 가선대부가 되고 아버지의 봉작(封爵)을 물려받아 서천군(西川君)에 봉하여졌다.

이듬해 개성부유수, 이어 한성부좌윤이 되고, 1498년 동지중추부사로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00년 대사헌이 되고, 이 해 다시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병조와 공조의 참판을 지냈다.

이어 공조판서로서 오위도총부도총관이 되었다. 1506년 함경도관찰사 겸 함흥부윤이 되었다. 이 해 중종반정에 가담,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加資)되어 함경도관찰사를 지냈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참고문헌

『성종실록(成宗實錄)』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중종실록(中宗實錄)』
『이악정집(二樂亭集)』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집필자
정만조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