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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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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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
함경남도와 함경북도를 통칭하는 지명.
이칭
이칭
관북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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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함경남도와 함경북도를 통칭하는 지명.
내용

이 지역을 관북지방이라고도 한다. 함경이란 함흥경성의 머리글자를 합하여 만든 지명이다. 본래 숙신(肅愼)국의 땅이었는데 일명 읍루(挹婁)ㆍ물길(勿吉)[^7]ㆍ 말갈(靺鞨)여진(女眞) 등의 명칭이 있었다.

서기전 2세기경에 주1가 이곳에 현도군(玄免郡)을 함흥 부근에 설치하였고, 뒤에 옥저(沃沮)국이 설치되었다. 이곳에는 주2ㆍ남옥저[^3]ㆍ북옥저[^4] 등이 있었다. 56년(태조왕 4)에 고구려가 동옥저를 멸하여 영토를 넓혔고 3세기경에는 신라의 영토가 영흥평야(永興平野)까지 다다랐다.

7세기에는 발해 영토가 영흥에서 신라와 경계를 이루었고 신라 말기에는 여진족의 근거지가 되었다. 고려 성종정평 이남이 삭방도(朔方道)에 들었고, 정종동계(東界)로 바뀌었다. 한편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3개 관문( 정주ㆍ선덕ㆍ원흥)과 장성(長城)을 축조하였다.

문종 때에는 동북면(東北面)이라 하였고 예종 때에는 여진족을 축출하여 9개 성을 두었다가 2년 후에 되돌려 주었다. 인종 때에는 주5의 영토였다가 뒤에 주6가 다스렸다. 1356년(공민왕 5)에 원나라가 지배하던 8개 주를 회복하여 함경산맥 동쪽해안의 칠보산(七寶山) 남쪽이 고려의 영토가 되면서 강릉삭방도(江陵朔方道)라 하였다.

1388년(우왕 14)에 삭방도를 따로 분리하였다. 1413년(태종 13) 관내에 영흥길주가 있다 하여 영길도(永吉道)라 하였고, 1416년에 영흥을 강등하여 화주목(和州牧)이라 하고 함주를 승격하여 함흥부(咸興府)라 하였다. 관찰사 본영(本營)을 함흥에 두고 함길도(咸吉道)로 고쳤다.

세종 때에는 김종서(金宗瑞)에게 명하여 육진을 설치하였다. 1470년(성종 1)에 함흥을 강등하고 본영을 영흥으로 옮겨 영안도(永安道)로 고쳤다가 1509년(중종 4)에 함흥부 및 관찰영을 복구하고 함경도로 개칭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23부제로 개편되면서 함흥부ㆍ갑산부ㆍ경성부 등 3부로 되었고, 1896년에 13도제로 개편되면서 함경남도함경북도로 나누어졌다.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대동지지(大東地志)』
주석
주1

중국에서 역대로 존재하였던 전한, 후한, 촉한, 성한, 북한, 남한 따위를 두루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2

개마고원 동쪽지방

주3

함흥평야지방

주4

북동해안지방

주5

여진족 완안부의 추장 아구다가 지금의 만주, 몽골, 화베이(華北) 땅에 북송과 요를 무찌르고 1115년에 세운 나라. 1234년 9대 120년 만에 몽고 제국에 망하였다. 우리말샘

주6

1271년에 몽고 제국의 제5대 황제 쿠빌라이가 대도(大都)에 도읍하고 세운 나라. 1279년에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 본토를 중심으로 몽고, 티베트를 영유하여 몽고 지상주의 입장에서 민족적 신분제를 세웠으나 1368년에 주원장을 중심으로 한 한족의 봉기로 망하였다. 우리말샘

주7

중국 수나라ㆍ당나라 때에 둥베이(東北) 지방에서 한반도 북부에 거주한 퉁구스계의 여러 민족을 통틀어 이르는 말. 만주족의 선조로 뒤에 7부로 나뉘었으며, 속말 말갈(粟末靺鞨)을 중심으로 발해를 세웠는데, 흑수 말갈(黑水靺鞨)은 이에 대립하여 나중에 금(金)을 세웠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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