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리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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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리 전투위령비
현리 전투위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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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중공군의 5월 공세 때 국군 제3군단이 중공군과 북한군 3개 군단의 공격을 받고 방어에 실패하여 현리지역에서 하진부리 부근까지 후퇴한 전투.
내용 요약

현리전투는 중공군의 5월 공세 때 국군이 중공군과 북한군의 공격을 받고 방어에 실패하여 현리지역에서 하진부리 부근까지 후퇴한 전투이다. ‘5월 공세’는 1951년 5월 16일부터 중공군이 2개 병단 약 54만 명의 병력을 동원한 공격으로 국군은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오마치고개까지 점령당했다. 국군은 후퇴하여 하진부리 부근에 집결, 부대를 재편성하였으나 철수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퇴각하였다. 이 결과 국군은 지휘체제가 와해되고 많은 병력이 손실을 입었으며, 주요 장비를 거의 모두 파괴하거나 유기하였다. 6·25전쟁 사상 가장 큰 패전으로 기록되었다.

정의
1951년 중공군의 5월 공세 때 국군 제3군단이 중공군과 북한군 3개 군단의 공격을 받고 방어에 실패하여 현리지역에서 하진부리 부근까지 후퇴한 전투.
역사적 배경

1951년 3월 말 유엔군이 캔사스선(문산∼연천∼화천저수지∼양구∼간성을 잇는 선)까지 진출하자 공산군은 전선 분할과 양익 포위공격으로 유엔군을 서울 이남으로 격퇴시킨다는 작전계획을 세우고 1951년 4월 22일부터 29일까지 약 3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서부와 중서부전선에서 공세를 취했다.

4월 공세 이후 공산군은 계속해서 중동부전선의 돌출된 국군을 섬멸한다는 작전계획 하에 2개 병단 약 54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1951년 5월 16일부터 일명 ‘5월 공세’를 개시했다.

이 때 공산군은 미 제10군단 우측의 국군 제5·7사단, 국군 제3군단 예하의 제3·9사단, 그리고 국군 제1군단 예하의 수도사단, 제11사단을 공격목표로 하였다. 특히 강원도 인제지역의 국군 제3군단이 주요목표였으며, 이를 위해 공산군은 이 지역으로 중공군 2개 군단(제20·27군단)과 북한군 1개 군단(제5군단)을 투입하였다.

경과

중공군의 대공세는 5월 16일 16시경부터 강력한 공격준비포격을 신호로 시작되었다. 1시간여의 포격에 뒤이어 보병부대의 공격이 시작되었으며, 특히 국군 제7사단 정면에 집중적인 공격이 실시되었다. 이 지역은 중공군의 종심기동 부대가 빠른 시간 내에 국군의 후방으로 진출하기 위한 주요 기동로로 계획한 곳이었다. 국군 제7사단 지역에는 중공군 3개 사단이 투입되었다.

제7사단의 전방연대들은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20시경에 진지를 피탈당하고 통신마저 두절되면서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 무렵 오마치고개를 차단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중공군 제20군단 예하의 제60사단 제178연대 제2대대가 국군이 배치된 진지를 우회해 신속하게 국군 후방으로 진출해 갔다. 그 결과 중공군 첨병중대가 17일 04시에, 대대가 07시에 국군 제3군단의 주요 보급로인 오마치고개 일대를 점령하였다.

오마치고개의 피탈로 퇴로를 차단당한 국군 제3군단은 17일 13시 경부터 현리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현리에는 국군 제3사단과 제9사단, 군단직할부대, 제7사단 제5연대, 수도사단 제1연대 제1대대대 등 많은 병력이 혼재된 상황이 되었고, 유일한 철수로인 오마치고개가 중공군에게 점령되었다는 상황이 전파되면서 장병들의 불안과 동요가 확산되었다.

국군 제3군단은 17일 17시 30분경부터 포위망 돌파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때는 이미 2개 사단 규모의 중공군이 오마치고개와 침교 일대를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군 제3군단은 전방의 압력과 후방의 위협에 압도되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부대가 분산됨으로써 산악지대를 따라 60㎞를 후퇴한 뒤 하진부리 부근에 집결하여 부대를 재편성하게 되었다. 5월 20일 하진부리에 집결한 병력은 제9사단이 40%, 제3사단이 34.2%에 불과하였다.

미 제8군사령관은 제3군단장에게 하진부리에서 더 이상 철수하지 말 것을 명령하였지만, 제3군단은 5월 21일 다시 제3사단이 송계리로, 제9사단이 대화로, 군단사령부가 영월로 각각 퇴각하였다.

결과

철수과정에서 국군 제3군단은 지휘체제가 와해되고 많은 병력의 손실을 입었으며, 주요 장비를 거의 모두 파괴하거나 유기하였다. 반면에 국군을 추격한 북한군과 중공군은 속사리와 강릉지역으로 남하하여 유엔군 전선에 큰 돌파구를 만들었다. 미 제8군에서는 예비대인 미 제3사단을 투입하여 전선을 수습하고 다시 전세를 만회했다

국군 제3군단은 방어작전에 실패함은 물론, 인접 부대와의 협조나 부대의 통제 및 후방 방호대책 등에 큰 실책을 범하여 6·25전쟁사상 가장 큰 패전의 기록을 남겼다. 이에 따라 1951년 5월 21일 18시부로 담당 지역을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에 인계하고 1951년 5월 26일 국군 제3군단은 해체의 비운을 맞이하였다.

참고문헌

『우리가 겪은 6·25전쟁』(대한민국육군협회, 2013)
『현리-한계전투』(육군본부 군사연구소, 2009)
『현리전투』(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8)
『한국전쟁요약』(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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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박동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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