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제명 ()

현대음악
인물
해방 이후 경성음악학교 교장,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학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성악가 · 작곡자 · 교육자 ·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현석(玄石), 쿠로야마 사이메이[玄山濟明]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3년(고종 40) 1월 6일
사망 연도
1960년 10월 16일
본관
연주(延州)
출생지
경상북도 대구
관련 사건
동우회사건
내용 요약

현제명은 해방 이후 경성음악학교 교장,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학장 등을 역임한 성악가, 작곡가, 교육자로·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하여 교회음악을 통해 서양음악을 접했다. 1927년 미국 건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 후 연주 및 창작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32년 『현제명 작곡집』 제1집을 발간하였으며, 조선음악가협회를 창설했다. 1933년 연희전문학교에 재직하며 관현악단·취주악단·합창단·중창단 등을 조직했다. 1937년 ‘동우회 사건’을 전후,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지지하는 가요를 작곡했다.

정의
해방 이후 경성음악학교 교장,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학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성악가 · 작곡자 · 교육자 · 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본관은 연주(延州). 호는 현석(玄石)이고 창씨개명한 이름은 쿠로야마 사이메이(玄山濟明)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3년 1월 6일 경상북도 대구 남산동에서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하여 교회음악을 통해 서양음악에 접하였다. 대구의 기독교학교인 계성학교를 거쳐 1924년 평양 숭실학교 대학부를 졸업하고 전주 신흥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1925년 미국 시카고 무디성경학교(Moody Bible School)에 입학하였다가 인디애나주에 있는 건음악학교(The Gunn school of Music)로 옮겨 1년간 수학하여 1927년 6월 졸업하고 음악학사(B.M.)가 되었다.

귀국한 후 연주 및 창작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29년 2월 27일 공회당에서 귀국독창회를 열었을 때 자작곡인 주1을 노래불렀고, 같은 해 9월 연희전문학교에서 음악전임강사로 부임하였다. 1929년부터 발매된 빅타음반에 창작 가곡 및 외국 가곡을 취입하였다. 1932년 2월 『현제명 작곡집』 제1집을 발간하였으며, 4월 조선음악가협회를 창설하는 데도 앞장섰다. 1933년 홍난파와 함께 작곡발표회를 가졌으며, 같은 해 교육 면에서도 연희전문학교에 재직하며 관현악단 · 취주악단 · 합창단 · 중창단 등을 조직하였고, 교양과목과 특별활동의 음악부를 육성하여 음악보급에 힘썼다. 이후 1936년 6월 미국 시카고음악연구원에서 「자연발성법의 원리와 그 결과」라는 논문으로 음악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고 전해진다. 졸업 후 유럽을 거쳐 1937년 2월 귀국하였다.

1937년 ‘동우회(同友會) 주3을 전후하여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지지하는 가요를 작곡하고 친일단체에 가입하였다. 1937년 5월 창립된 친일문예단체인 조선문예회 위원으로 참여하였고, 6월 ‘동우회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어 고초를 치렀으며, 7월 조선문예회 작품발표회에서 자신이 작곡한 「송별」, 「장성(長城)의 파수(把守)」를 발표하였다. 9월 30일 매일신보사가 주최하고 조선문예회가 후원한 ‘바오딩[保定] 전첩(戰捷) 축하 기념연주회’에서 「송별」, 「장성의 파수」를 다시 연주하였고, 「정의의 사(師)여」와 「장성의 파수」를 직접 노래하였다. 10월 경성고등음악학원이 주최하고 경성군사후원연맹과 경기도군사후원연맹이 후원하는 ‘음악보국대연주회’에 출연해 「전지(戰地)로」를 독창하였고, 출연자 수익금 모두를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한 국방헌금에 헌납할 것을 결의하였다.

1938년 6월 사상전향자를 회원으로 하면서 반공을 내세운 대동민우회에 동우회사건 관련자들과 함께 가입하였고 ‘ 전향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0월 음악을 통해 주2를 굳게 하자는 취지의 경성음악협회를 조직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간사에 선임되었다. 1941년 9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10월 평의원에 선임되었다. 1943년 2월 경성후생실내악단이 주최하고 국민총력조선연맹이 후원한 국민음악연주회에서 「바다로 가면」과 「이 결의」를 개창지도하였고, 3월에는 ‘전의양양국민대합창음악회’에서 「아시아의 힘」과 「십억의 진군」 등을 불렀다. 1944년 4월 조선연극문화협회 회원자격심사회의 부문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고, 5월 경성후생실내악단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며, 7월 조선음악협회 이사로 선입되었고, 8월 음악기예자 자격시험 심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5월 ‘결전음악 수립과 활발한 공연 공적’을 기려 신태양사가 주는 조선예술상을 수상하였고, 부상으로 받은 500원을 해군휼병금으로 헌납하였다.

해방 후 1945년 9월 고려교향악단을 조직해 1948년까지 이사장으로 운영하였으며, 1945년 9월 한국민주당 발기인 겸 중앙위원회 문교부 위원에 선임되었다. 1946년 2월 경성음악연구원이 경성음악학교로 인가받으며 교장으로 취임하였고, 8월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학부로 편입되면서 초대 음악부장을 맡았으며 1952년 학장이 되었다. 1949년 1월 문교부 예술위원회 음악분과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고, 1953년 한국음악가협회를 창립하여 초대 이사장으로 선출되었고, 1954년 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선임되었다. 1954년과 1955년에 미국 NBC교향악단의 내한공연 등을 주선하였고, 1955년 마닐라 아시아음악회의 참석과 1958년 유네스코국제음악회의 참가 등을 계기로 한국음악의 국제적 진출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1954년 제1회 예술원상을 받았다. 1960년 10월 16일에 고혈압으로 사망하였다. 사후 1965년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대표작품으로 가극 「춘향전」 · 「왕자 호동」 등이 있고, 가곡 「고향생각」 · 「산들바람」 · 「그집앞」 · 「희망의 나라로」 · 「나물캐는 처녀」 등이 있다.

참고문헌

『동아일보』(1931.2.13)
『한겨레음악대사전』(송방송, 보고사, 2012)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9(친일반민족행위자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2009)
주석
주1

후에 「고향생각」

주2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뜻으로,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조선인의 정신을 말살하고 조선을 착취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구호. 우리말샘

주3

1937년에 일제가 수양 동우회와 관련된 180여 명의 지식인을 검거한 사건. 41명이 기소되었다가 무죄로 석방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지식인 다수가 친일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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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이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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