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지안 ()

실록포쇄형지안 / 포쇄
실록포쇄형지안 / 포쇄
조선시대사
개념
‘형지’를 문서나 대장으로 정리한 문건이나 책.
정의
‘형지’를 문서나 대장으로 정리한 문건이나 책.
개설

형지기라고도 한다. 형지는 시대·문헌에 따라 의미가 조금씩 다르나 대체로 ‘사실의 전말’에 대한 기록 혹은 그림(도면)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사실의 자초지종(自初至終) 또는 일이 되어 가는 형편을 뜻하며, 사적·형적 등을 달리 표현하는 속문으로 추측된다.

삼국시대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으로 사용된 ‘형지’ 또는 ‘형지안’은 한자의 의미를 살린 우리 나라 말로 ‘두락지(斗落只)’의 예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즉 전근대 사회에 공·사용으로 널리 쓰이던 용어로 사건의 전후사정을 기록한 전말이나 상황보고라 할 수 있다.

사원형지(寺院形止)는 사원의 모습을 그대로 보고한 것이며, 노비형지안(奴婢形止案)은 노비의 인적사항을 정리한 명단이다. 사건의 경우 사건의 자초지종 및 경과·진행과정이며, 건물의 형지는 위치·구조·목재·기와·도면 등 건물에 대한 내용이 포함된다.

형지에 대한 초기 기록을 보면, ≪삼국유사 三國遺事≫<의해 義解> 보양이목조(寶壤梨木條)에 “또 경인년 진양부첩(晉陽府貼)에 오도안찰사(五道按察使)가 각 도 선교사원(禪敎寺院)의 시창연월형지(始創年月形止)를 심검(審檢)·성적(成籍)할 때 차사원인 동경장서기(東京掌書記) 이선(李僐)이 검심(審檢)·기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법전인 ≪속대전 續大典≫ 호전 어염조(魚鹽條)에는 “각 아문 어전절수(魚箭折受)를 궁가전토(宮家田土) 매매례(賣買例)에 의거해 먼저 형지(形止) 및 탈(頉)의 유무를 묻고 본도(本道)의 사핵(査覈)이 회관(回關)되기를 기다려 비로소 허락하나 미리 차인을 보내는 것은 절대 금지한다.”는 규정이 있다.

≪수교집록 受敎輯錄≫ 호전 제전조(諸田條)에는 “각 도(道) 제언(堤堰)은 당상이 맡고, 신칙(申飭)·핵심(覆審)·수축(修築)한 형지에 모경(冒耕)한 유무를 각별히 적간(摘奸)한다. 만약 모경을 폐기한 자가 있으면 수령 및 향소(鄕所)의 색리가 사목에 의거해 죄를 매길 것.”이라 하였다.

형지의 유형

조선왕조실록에서 형지에 대한 기록을 정리하면 ① 전투형지(戰鬪形止: 防禦·結陣·賊中·軍糧·屯田·練兵·駐屯·海寇·倭城·侵犯·接戰 등), ② 산천형지, ③ 구황형지(救荒形止), ④ 재상형지(災傷形止), ⑤ 농사형지, ⑥ 통상적형지, ⑦ 그림으로 된 도면형지 등 매우 다양하다. 이를 차례로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1. 전투형지와 관련한 내용으로 첫째 방어형지는 중앙의 무관직 관료를 각 지역 군사시설 특히 변방지역 등 국방요충지에 파견한 후, 장비·인력·군량 등을 제대로 갖추고 적의 침입에 대비해 어떠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는지 그 형편을 살펴보거나 중앙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 보고내용이 방어형지이다.

둘째 결진형지(結陣形止)는 군사훈련시 적의 침입을 가정해 전투대형으로 진을 치는 연습을 하는데 진을 친 모습을 의미한다.

셋째 적중형지(賊中形止)는 비전투시에 적국의 국경을 넘어 들어가 그 나라의 상황을 정탐해 본국에 보고하거나 전시에 적의 무리에 들어가 군사작전계획이나 동태를 살펴 아군의 대비책을 마련했는데, 이러한 보고내용이 적중형지이다. 아울러 반란을 일으킨 무리나 도적의 내부형편도 이와같이 표현하였다.

넷째 군량형지(軍量形止)는 군대를 유지하고 전시에 대비하기 위해 필요한 곡식을 비축해야 하였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각 지역별로 군량을 어느 정도 준비해 두었는지 점검해 부족분을 확인하고 이를 보충하는 조치를 취했는데, 곡식의 종류와 양 등을 점검한 결과와 보고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다섯째 둔전형지(屯田形止)는 군량을 확보하는 방법의 하나로 군인들이 직접 농사를 지어 생산된 곡식을 군인들의 양식으로 삼았는데 그 토지의 위치·규모·비옥도·생산량 등을 의미한다.

조선시대 선조(宣祖) 년간에 실시된 훈련도감 둔전의 형태를 보면, 둔전은 지방에 근무하는 관료가 주도해 둔전으로 개간할 적지를 선정하고 개간에 필요한 노동력과 소요되는 비용을 마련해 시행했다.

그리고 둔전과 관련해 시행해야 할 모든 일에 대해서는 자료를 갖추어 감사와 어사에게 보내 허가를 받도록 하였다. 즉 둔전형지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조목조목 정리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여섯째 연병형지(練兵形止)는 군사훈련의 구체적 실상을 말하는 것으로, 지방 수령의 주요 업무임과 동시에 중앙정부의 목민관(牧民官)에 대한 주요 감사대상이며 인사고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서 매우 중시된 사항이다.

일곱째 주둔형지(駐屯形止)는 주로 정규군의 주둔 지역과 그 형태를 말하지만 때로는 적군·반도(叛徒)들이 모여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 여덟째 해구형지(海寇形止)는 연해지역에 침입한 적이 노략질하는 상황이다.

아홉째 왜성형지는 일본인들이 성을 쌓는 기술과 그 형태를 말한다. 우리 나라의 성과 일본성은 구조 차이가 매우 컸으므로 전시에는 전술전략상 그들의 축성에 대한 구체적 정보가 필요하였다.

열째 침범·접전 형지는 적이 침범한 지역·시기·규모와 실제로 적과 싸운 형편을 의미한다. 선조 년간에 오랑캐 침입에 대해 의논하면서 “일을 잘 아는 선전관을 급히 종성·동관 등에 보내 오랑캐가 침범한 형지와 접전한 절차와 적의 무리의 다소와 적병의 거동을 상세히 묻고 급히 와서 아뢰게 한 것”에서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1. 산천형지는 어떤 특정지역의 지형지세를 말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압록강·위화도·거제도좌수영·울릉도·운봉·강화·덕적도·송정포 등지의 형지가 기록되어 있다.

내용이 명시된 강화유수의 본부형지에는 “지형지물·군사·전함·성곽·지휘체계를 비롯해 각궁(角弓)·우시(羽矢)·도검(刀劍)·창·기계·조총 등 각종 무기류와 각종 깃발 및 병고(兵庫)·전죽(箭竹)”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송정포형지에는 “뒤는 산 앞이 바다로 지세가 감돌아 안고 있다. 백성이 400호 가량되고 민선이 수십 척으로 배를 정박하는 장소로 최적격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이를 통해 산천형지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다.

  1. 산성형지는 산성주변의 지형지세와 규모·구조 등은 물론 성 내부의 군사훈련·군량미·운영내역 등을 포함한다. 영조대에 함경남도병사 신덕하(申德夏)에게 철옹산성의 형지를 묻자 “① 운산 등 네 고을의 군병은 본부로 하여금 합조(合操)하게 하고, ② 군량 10만 석이 점점 줄어 3만여 석밖에 남지 않았으니 마땅히 본부의 세납미(稅納米)로써 남겨두어 군량을 삼아야 하고, ③ 본부의 9개 창고가 모두 성 밖에 있으니 이를 성안으로 옮겨야 합니다.”라고 보고한 데서 산성형지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2. 구황형지는 백성들이 굶주릴 때 국가에서 곡식을 내어 구제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선조대에 특별히 어사를 파견해 여항(閭巷)을 출입하면서 구황에 대한 형지를 두루 살펴 적간(摘奸)하고 소홀한 수령은 치죄(治罪)하라 하였다.

정조대에는 구휼 대상이 되는 고을이름만 거론할 것이 아니라 각역·진보·산성·목장 등에 진제소(賑濟所)를 몇 군데 설치했고 기민(饑民) 몇 명을 구제했는지에 대해서도 기록하도록 강조하였다.

이는 빈민구제에 있어 곡식이나 기타 구휼 물품이 굶주린 백성들에게 공정하게 분배되었는지 면밀히 점검해 구체적 내용을 파악하고자 했으니 그 내용이 바로 구황형지이다.

  1. 재상형지는 천재지변 등 자연재앙으로 인해 백성들이 입은 피해 상황을 말한다. 정조·순조대의 기록에는 화재·폭우로 인한 피해 상황이 적혀 있다.

  2. 농사형지는 농사의 작황이나 흉풍의 상황으로서 조선시대와 같은 농업 위주의 경제체제하에서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즉 가뭄과 장마, 병충해, 기타 자연재해 등으로 인해 농작물 피해가 발생할 때마다 이를 상세하게 파악해 대책을 세우는 일이 임금(중앙정부)이나 지방 수령의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전통시대에는 농사의 작황에 따라 국가적 행사의 개최여부를 결정 할 정도로 중요한 사안이었다.

  1. 통상적 형지는 특정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일반적으로 형편·사정·추이 등을 의미하는 경우이다. 예를 들면 군량 운송에 있어 육운(陸運)하는 형지, 대동세곡 호송형지, 아무아무개의 출입하는 형지, 거행하는 형지, 무엇을 살펴본 형지, 주도면밀한 형지, 문서보관 형지, 국청(鞫廳)이 열리는 궐내형지, 비가 내린 형지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면 형지는 형편·모습·사정·추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보편적 용어였다고 볼 수 있다.

  2. 도면형지는 주요사안의 경우 문자로 서술한 내용만으로는 구체적 현장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울 경우 산천·가옥·지형 등을 그림으로 그린 것을 말한다. 그림으로 그리는 대상은 산성·총묘·능묘·건물·궁장(穹墻)·왕후 태생지 등이었다.

대개 보고 받는 측에서 현지에 가 보기가 어려울 경우 그림을 그려오게 하여 이를 보고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세종실록≫·≪삼강행실도≫ 등 각종 서적에 많은 그림이 나오는 것처럼 구체적 서술이 어려운 경우 쉽고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도면형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고 본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형지기·형지안이라 하던 것을 조선시대에는 일반적으로 형지안이라 했으며, 이는 관공서의 기록을 의미하였다. 그 외 일반적으로 형지안이라고 할 때에는 내노비(內奴婢)·사노비(寺奴婢)·역노비(驛奴婢) 등의 각종 노비를 매 3년마다 샅샅이 조사해 이들의 실태를 상세히 기록한 원적부(原籍簿)를 의미하기도 한다.

≪속대전≫에 “무릇 오래된 전민상송(田民相訟) 사건은 한결같이 대소시한(大小時限)을 정해서 시행하고···, 내노비(內奴婢)는 선두안(宣頭案)에 넣고, 역노비(驛奴婢)는 형지안에 넣을 것이다.”라 하여 노비 가운데 역노비를 형지안에 기록한다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형지안수정채(形止案修整債)는 형지안을 수정하는 데 드는 비용으로 별도의 예산을 마련하였다.

즉 ≪육전조례 六典條例≫ 병전·병조·마색(馬色) 용하조(用下條)에 보면 형지안 수정채는 삼년에 한 번 항식으로 전 30량 9전을 책정하였다. 세부 내역은 양역(兩驛)의 형지안 수정채 12량 9전, 집리(執吏)·서리에게 소용되는 피대채(皮帒債)와 본색(本色) 소용(所用) 피대채 각 4량, 상직서리(上直書吏)의 금채(衾債) 10량으로 규정하였다

형지안에 대해서 ‘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문서’의 개념으로는 ≪태종실록≫에 “지금 고려의 음악은 대개 중국의 제도입니다. 지금 신등이 충주사고(忠州史庫)의 형지안을 상고하니 송나라 때 반악도(頒樂圖) 사도(四道)가 있습니다.”라고 한 규정이 있다.

다음으로 ‘노비의 내력을 기록한 관아의 문서’라는 뜻으로 사용된 예는 ≪태종실록≫에 각사노비쇄권색(各司奴婢刷卷色)을 조목으로 상계(上啓)하면서 “전에는 경차관(敬差官)이 다만 각사노비(各司奴婢)의 생산을 형지안에 기록했을 따름이어서 지금 고쳐서 성적(成籍)하고저 하나 증빙해 고찰하기가 실로 어렵습니다. 각 관에 산접해 있는 원·가속노비는 늙고 어림을 물론하고 나이·이름, 조부모·부모 이름을 상세히 추쇄한 도목장을 상납하고, 각년 형지안에 부기(附記)된 물고(사망) 노비를 각별히 도목장으로 상납하는 것 등의 일은 각 도 감사에게 이문(移文)할 것.”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안(案)이라는 것은 관부문서(官府文書)의 성례(成例) 및 송옥논정(訟獄論定)한 것을 말한다. 조선의 관공기록(官公記錄)으로 형지안이라 한 것은 모모실록형지안(某某實錄形止案), 모모사고실록봉안형지안(某某史庫實錄奉安形止案), 실록포쇄형지안(實錄曝曬形止案), 고출시형지안(考出時形止案) 등으로서 모년모월모일 실록의 현상조사기록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안(案)의 용례는 양안(量案)·전답안(田畓案)·수조안(收租案)·호안(戶案)·선생안(先生案)·노비안(奴婢案)·공안(貢案) 등으로 국가기관 및 민간에서 작성하는 각종 서류에서 폭넓게 찾아볼수 있다.

형지안과는 명칭이 조금 다른 판안(判案)은 ≪고려사 高麗史≫ 두경승전(杜景升傳)에 “경승이 동열과 함께 아뢰기를 식목도감에서 소장하는 판안(判案)은 국가의 귀경(龜鏡)인데, 부질(部秩)이 착란되어 점차 계고(稽考)하기 어려우니 마땅히 검토할 수 있도록 등사(謄寫)해 간직하게 하소서 하니 이에 따랐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판안의 개념을 정확하게 밝힐 수는 없지만 형지안의 안(案)과 유사하다고 추정된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해 볼 때 형지안(形止案) 또는 형지기(形止記)라는 말은 어떤 물건의 형상 및 사건의 역사적 경과를 상세히 서술한 문서라고 할 수 있다.

형지안의 종류

형지안의 종류에는 고려 현종 22년(1031)에 작성된 <정도사오층석탑조성형지기 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 <고려식목도감형지안 高麗式目都監形止案>, <제산릉형지안 諸山陵形止案>, <창고궁사노비생산형지안 倉庫宮司奴婢生産形止案>, <각역전운조역노비형지안 各驛轉運助役奴婢形止案>, <모사고형지안 某史庫形止案> 등이 있다.

<정도사오층석탑조성형지기 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는 1031년(고려 현종 22) 1월 4일 고려국 상주계내(尙州界內) 약목군(若木郡)에 세워진 정도사오층석탑을 만든 상황을 기록한 고문서로서 현존하고 있다.

이 석탑조성기는 고려시대의 이두(吏讀)로 기록된 고문서로 한자차용표기법(漢字借用表記法) 연구에 귀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의 향리구조와 직역관계, 군현제도와 불사조성 등의 연구에도 필요한 자료이다.

한편 <고려식목형지안 高麗式目形止案>은 고려시대 식목도감에서 작성한 형지안으로 ≪문종실록 文宗實錄≫에 일부가 초출(抄出)되어 있다.

내용을 보면 귀주성·영주성·맹주성·인주성 및 그 외 41성의 규모와 성에 배치된 도령중랑장·중랑장·섭랑장·낭장·별장·교위·대정·초군·대좌군·대우군·대마·대노·대보창·병보창·대합군 등의 인원을 구체적으로 정리하였다.

여기에 기록된 장교·사병은 고려시대 전성기 때 서북지방 군사조직과 직급별 액수로 군사제도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다만 위의 내용은 <고려식목형지안>의 일부를 초출(抄出)해 전체 내용을 알 수는 없다는 한계가 있다.

조선시대 형지안의 종류와 내용을 보면, 첫째 <식목도감형지안>은 고려시대이래 작성해온 것으로 내용 가운데에는 각 고을의 염분(鹽盆) 자리수와 어량(魚梁)의 망소(網所), 곽전(藿田)의 결복(結卜)을 빠짐없이 기록해 거기에서 생산되는 소금과 해산물을 국가에서 부세(賦稅)의 징수기준으로 삼았다.

둘째 <제산릉형지안 諸山陵形止案>은 봉상시(奉常寺)에서 작성·관리하는 것으로 산수(山水)의 오고 간 것을 기록하며, 필요할 경우 도면으로 그려 구체적인 지형지세를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와 관련해 임금이나 왕족 등의 능을 관리하는 대장(臺帳)도 <모능형지안 某陵形止案>이라 하여 능참봉과 관련자들이 작성 보관하였다. 여기에는 당초 능의 위치선정과 제반 장의절차, 평소 관리내용은 물론 천장(遷葬)할 경우 여기에 대한 전말도 기록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셋째 <모모사고형지안 某某史庫形止案>은 실록 등 서책을 보관하기 위해 전국의 4개 처에 나누어 설치한 사고에 보관된 전적의 목록·책수·진열위치 등을 상세하게 기록한 문서이다.

이 형지안을 통해 보관된 서책을 쉽게 찾을 수 있고, 수시로 열람하거나 일년중 일정한 시기에 포쇄(曝曬)한 뒤 이를 본래 위치에 정돈하며, 책의 재고조사와 관리자 교체로 인한 인수인계시에 근거서류가 되었다고 보여진다.

넷째 각사(各司)·창고(倉庫)·궁사(宮司) 노비형지안은 각사노비추쇄색이 계목(啓目)하며, 기록 방법은 1414년(태종 14, 갑오년) 변정도감의 예에 의거하였다.

원속·가속노비는 노유(老幼)를 막론하고 나이·이름·조부모·부모의 이름을 기록하며, 도목장(都目狀)에 상납(上納)한 것과 각년 형지안에 올린 물고(物故, 死亡)한 노비, 각별 도목장에 상납한 것을 상세히 추고해 각도 감사(監司)에게 이문(移文)하도록 했다.

그리고 각사노비 형지안에 기록하고도 도망·피역(避役)한 자를 진고(陳告)하면 1구(口)당 저화(楮貨) 50장을 상급(賞給)하고, 형지안에 누락된 노비 진고시에는 1구당 저화 100장을 상급하며, 이러한 사항을 알고도 신고하지 않으면 일족·절린(切隣)과 이정장(里正長)을 율에 의거 논죄(論罪)한다는 규정을 두었다.

1979년 보물로 지정된 ≪병와유고 甁窩遺稿≫의 일부인 <탐라순력도 耽羅巡歷圖>에는 제주도 방어형지가 있다. 여기에는 관내 8개 지역에 대해 조점(操點)한 기록이 있다.

지역은 대정(大靜)·명월(明月)·애월(涯月)·제주(濟州)·조천(朝天)·별방(別防)·정의(旌義)·서귀(西歸) 등이며 각 지역별로 지방관인 현감을 비롯해 조방장(助防將)·중군(中軍)·성장(城將)·치총(雉摠)과 인민, 전답, 문묘의 제기·제복·서책, 성정군(城丁軍)·군기집물(軍器什物)·목자보인(牧子保人)·마(馬)·흑우(黑牛)· 창곡(倉穀)의 구체적인 수치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이를 합산해 인민 9,552호(戶) 43,515구(口), 전(田) 3,640결, 목장(牧場) 64개소에 국마(國馬) 9,372필(匹), 국우(國牛) 703두(頭), 41과원(果園) 안에 귤을 비롯한 유실수(有實樹) 7,309주(株)를 종합적으로 기록하였다.

또한 이 내용을 매우 사실적인 그림으로 그려 첩(帖)의 형태로 만들었기 때문에 도면으로된 형지안의 내용을 고찰 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제주시에서는 이 자료를 근거로 제주관아의 건물복원, 문화상품 개발 등과 같은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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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속대전(續大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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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와유고-탐라순력도-(甁窩遺稿-耽羅巡歷圖-)』(제주시 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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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두연구』(홍기문, 과학원출판사, 1957)
『한국상대고문서자료집성』(이기백 편저, 일지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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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사석탑조성형지기(淨兜寺石塔造成形止記)의 이두(吏讀)에 대하여」(이철수, 『한국학연구』 6·7합집, 199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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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淨兜寺石塔造成形止記」(鮎貝房之進, 『雜攷』 6 上, 1934)
「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の硏究 (1) -高麗朝顯宗朝における若木郡の構造-」(武田幸男, 『朝鮮學報』 25,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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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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