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우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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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 ‘광개토대왕’명 호우
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 ‘광개토대왕’명 호우
고대사
유적
문화재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시기의 돌무지덧널무덤. 적석목곽분. 사적.
이칭
이칭
노서동 제140호분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2011년 07월 28일 지정)
소재지
경북 경주시 노동동 261 등
정의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시기의 돌무지덧널무덤. 적석목곽분. 사적.
개설

광복 직후인 1946년 한국인에 의해 최초로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유적이다. 삼국시대 신라의 수도 경주에 분포하는 전형적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다. 부장품으로 고구려광개토대왕을 기념하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 호우(壺杅)가 출토되어 신라고분 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본래 호우총은 경주노서리고분군의 일원으로서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된 바 있으나 2011년 7월 28일에 경주노서리고분군을 비롯한 5개 고분군이 경주 대릉원 일원으로 통합되면서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내용

경주 노서동 제140호분으로 1946년 국립박물관이 은령총(銀鈴塚)과 함께 발굴하여 두 고분을 봉토가 연접된 표형(瓢形) 쌍분(雙墳)으로 추정하였다. 발굴에서 두 고분의 봉토 주위로 두른 호석(護石)이 일부씩 드러나 이를 정(正) 원형으로 복원할 경우 봉토 일부가 겹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발굴 당시 봉분은 파괴되어 있어 불확실하였으며, 그 겹친다고 본 부분 또한 극히 미미하고,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에서 호석은 반드시 정 원형으로 설치되지 않은 경우도 많아 이후의 연구에서는 각각 별개의 고분이었을 것으로 재해석되었다.

고분은 민가 건축으로 이미 오래 전에 파괴되어 봉분은 삭평되고 주변보다 약 2m 높은 대지상으로 남아 있었다. 발굴조사 결과, 지하에 토광을 파고 그 안에 덧널을 설치한 다음 덧널 위에 냇돌을 쌓아 적석부를 구축하고, 그 위로 봉토를 덮은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으로 밝혀졌다. 토광의 규모는 동서 길이 7.3m, 남북 너비 4.5m, 깊이 약 2m였다. 토광 바닥에는 냇돌을 두 겹 정도 깔고 그 위에 다시 잔자갈을 40㎝ 정도 깔아 덧널의 바닥층을 만들어 덧널을 설치하였으며, 덧널 벽과 토광 벽 사이에도 냇돌을 채웠다. 덧널의 규모는 발굴보고서에서 동서 길이 4.2m, 남북 너비 1.4m, 높이 약 1.2m로 추정하였으나, 덧널은 원래 발굴 당시 덧널 선으로 본 부분보다 더 바깥쪽에서 발견된 석단(石段) 위에 설치되어 있었을 것이므로 그보다 큰 규모였을 것이다. 덧널 안에는 약간 서쪽으로 치우쳐 가운데에 피장자를 안치한 나무널을 놓고, 그 동쪽에는 중요 부장품을 배치하였다. 나무널은 길이 약 2.4m, 너비 1m 내외로 추정되었으며, 나무널의 내면은 흑칠(黑漆)을 한 위에 다시 붉은 색의 주칠(朱漆)을 하였다. 덧널 위에는 덧널을 설치한 토광선보다 더 넓은 범위인 동서 길이 약 9m, 남북 너비 약 6m 범위로 냇돌을 쌓아 적석부를 구축하였는데, 상부가 파괴되었으나 구(舊) 지표 위로 80∼90㎝ 정도 남아 있었고, 원래의 높이는 대략 1.5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적석부 상면에는 점토가 피복되어 있었다. 적석부 위로 쌓은 봉토는 삭평되었으나 잔존한 호석으로 복원해 보면, 원래 봉분의 직경은 약 16m, 높이 4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규모로 보아 호우총은 외형상으로는 신라 돌무지덧널무덤 가운데 중 · 소형에 속하는 것이다.

중요 출토유물을 살펴보면, 목관 안의 머리를 동쪽으로 둔 피장자는 금동관과 관수식, 세환식(細環式) 금귀걸이, 끝에 비취곡옥이 달린 유리구슬 목걸이, 금팔찌 1쌍과 금반지 · 은반지 각각 5쌍, 은제과대(銀製銙帶)와 요패(腰佩) 등의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었으며, 피장자가 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금동장 환두대도(環頭大刀)가 나무널 안에서 출토되었다. 이 환두대도는 손잡이 머리장식인 환두 안에 한 마리의 용 조각이 있는 소위 ‘단룡(單龍) 환두대도’로서 신라고분에서는 잘 출토되지 않는 것이다. 그 외 나무널 안에서는 이례적으로 광개토대왕 관련 명문이 새겨진 청동 호우 1점이 출토되어, 이 호우가 피장자와 특별한 관계가 있었던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부장품은 주로 피장자 머리맡의 부장품 구역에서 나왔으며, 나무널 주위에도 약간의 유물이 놓여 있었다. 또, 덧널의 윗부분 돌무지 중에서도 마구류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덧널 천정 위에 놓여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중요 출토유물을 살펴보면 금동신발, 각종 철제 무기와 공구, 봉황문 투조(透彫)장식이 있는 안장과 각종 마구, 뚜껑에 연화문이 새겨지고 몸체가 옆으로 긴 특이한 모양의 청동용기, 그리고 각종 칠기와 토기 등이 있다. 피장자의 발치 쪽인 나무널의 서북 모서리 쪽에서는 나무에 흑칠을 하고 그 위에 도깨비 얼굴을 표현한 목심칠면(木心漆面)이 출토되었다. 발굴자는 이를 고대 샤머니즘에서 사용되던 방상씨(方相氏) 탈이라고 보았으나 최근의 복원연구 결과 도깨비얼굴 화살통으로 밝혀졌다.

고분의 규모는 비교적 작은 편이지만 출토유물로 보아 이 고분의 피장자는 금관과 금제과대(金製銙帶)를 출토하는 최고위급보다는 한 단계 낮은 신라 왕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를 나무널에서 출토된 청동 호우와 관련시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청동 호우의 밑바닥에는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이라는 명문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여기서 을묘년은 광개토대왕 사후인 서기 415년(장수왕 3년)에 해당한다. 이 호우는 광개토대왕을 기념하는 의례행위에 사용하기 위해 고구려에서 만든 것으로, 호우가 만들어질 때 마침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었던 신라나물왕의 왕자 복호(卜好)와 같은 인물이 가지고 들어 왔을 것으로 보고, 호우총의 피장자를 복호나 그 후손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호우총은 다른 유물, 특히 토기의 형식으로 보아 415년보다는 한참 뒤인 6세기 초에 축조된 고분이라는 것이 최근 학계의 공통된 견해이다.

의의와 평가

일제강점기에 한반도에서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조사는 일본인들에 의해 독점적으로 이루어졌다. 호우총의 발굴은 광복 직후인 1946년 최초로 한국인에 의해 주도된 유적 발굴조사로서 고고학 분야의 역사적 의의가 크다. 또한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 호우의 출토는 신라고분의 편년연구 및 신라와 고구려의 대외관계사 연구에 중요한 근거자료가 되고 있다.

참고문헌

「호우총(壺杅塚)과 은령총(銀鈴塚)」(김재원, 『국립박물관고적조사보고』 1, 을유문화사, 1948)
『신라고분연구』(최병현, 일지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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