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춘참변 ()

근대사
사건
일본군이 재만한인을 학살한 사건.
이칭
이칭
혼춘사건
정의
일본군이 재만한인을 학살한 사건.
역사적 배경

3·1운동 이후 점차 활발해지는 한국독립군의 활동을 근원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일본은 대규모의 정규군을 만주로 투입하여 한국독립군을 대대적으로 토벌할 이른바 ‘간도지방 불령선인 소토계획’을 수립하고, 준비를 진행시켜 나갔다.

그런데 중국영토인 만주지방에 일본 정규군을 출병시키기 위해서는 마땅한 구실이 필요하였다. 이에 일본은 중국 마적을 매수하여 혼춘의 일본총영사관을 습격하도록 흉계를 조작하였던 것이다.

경과와 결과

1920년 10월 2일 일본에 매수된 중국 마적 장하오(張江好)는 400여 명의 마적을 인솔하여, 같은 날 상오 5시 야포 3문을 앞세우고 혼춘을 공격하였다. 당시 혼춘에는 일본총영사관 경찰과 총독부 파견경찰대 및 함북경찰대 등에 소속된 50여 명의 병력이 있었다.

그러나 마적들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혼춘성문을 통과하여 상오 9시까지 4시간동안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였다. 이때 마적들에게 중국인 병사 70여 명과 한국인 7명이 살해당하였고 일본인 9명도 피살되었다. 뿐만 아니라, 미리 피신하여 빈집이 된 일본총영사관도 소각되었다.

이와 같은 혼춘사변을 야기한 일본은 재만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조선주둔군 제19·20사단, 시베리아 출병군인 제11·13·14사단, 만주파견군과 관동군 등에서 총 2만명의 병력을 만주로 투입하였다.

그리고 출병군은 기림지대(磯林支隊)·목림지대(木林支隊)·동지대(東支隊)의 3개 지대로 편성되어 독립군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당시 일본군의 작전은 2단계로 나뉘어 이뤄졌다.

1단계는 작전 개시일로부터 1개월 내에 독립군을 섬멸하고 근거지를 없애 것이며, 2단계는 1단계 작전 이후 1개월 내에 민간에 잠복한 독립군 잔당과 민간인 독립운동자를 철저히 색출함으로써 한국독립운동의 뿌리를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10월 16일 중국정부가 거세게 항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군에 대한 소탕작전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일본군의 독립군소탕작전은 실패가 예상된 것이었다.

이미 일본군의 출병 이전에 한국독립군은 안전지대로 피신하였고, 이를 추격하던 일본군이 청산리(靑山里)에서 한국독립군에게 완패하였으며, 그 뒤 독립군들은 소만국경을 넘어 연해주로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일본군은 한국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박멸한다는 미명 아래 무고한 재만한국인에 대하여 무차별학살을 단행하였다. 10월 5일부터 11월 23일까지 일본군에 의해 학살된 한국인은 혼춘현에서 242명, 연길현 1,124명, 화룡현 572명, 왕청현 347명, 영안현 17명, 서간도지방 804명에 달하였다.

참고문헌

『독립군사(獨立軍史)』(윤병석, 지식산업사, 1990)
『한민족독립운동사』 4(국사편찬위원회, 1988)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박은식, 서울신문사, 1946)
『독립신문』(1920.12.18·19)
집필자
신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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