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후기에 일부 수요자를 위하여 특별히 만들어진 청자의 일종이다. 화금청자의 기법은 완성된 청자의 무늬 가장자리 선을 따라 예리한 도구로 몸을 파서 흠집을 내고, 여기에 금니(金泥)로 메워 화려하게 하는 것이다.
중국 조소(曺紹)의 ≪격고요론 格古要論≫에 따르면, “금화정요완(金花定窯碗)은 마늘즙을 내어 여기에다 금가루를 개어서 그림을 그린 뒤 가마에 넣어 번조한 것이며 다시는 영영 떨어지지 아니한다.”라는 기록이 있어, 고려의 화금청자도 중국의 금화정요완과 같은 수법이었거나 아니면 또 다른 강력접착제를 사용하여 금가루를 섞어 사용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화금청자는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전반에 걸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 열전 권18 조인규전(趙仁規傳)에는 조인규가 원나라의 사신으로 갔을 때 원나라 세조와 화금청자에 관하여 나눈 대화 내용이 있다.
즉 “인규가 일찍이 화금자기를 바쳤더니 원나라 세조가 ‘화금은 그릇을 견고하게 하기 위한 것이냐.’ 하고 물으니 인규가 대답하기를 ‘단지 설채할 뿐이다.’라 하였다.
세조가 다시 묻기를 ‘그 금은 다시 쓸 수 있으냐.’ 하니, 인규가 대답하기를 ‘자기는 깨지기 쉬운 것이며 자기가 깨지면 따라서 금도 떨어지고 마니 어찌 다시 쓸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세조가 그 대답을 ‘훌륭하다.’ 하고 이후로는 ‘자기에 화금하지 말고 진헌하지 말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볼 때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일 때 일부 수요자에게 공급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조인규가 1227년(고종 14)부터 1308년(충렬왕 34)까지 생존하고 원나라 세조는 1260년부터 1293년까지 재위한 것으로 보아, 화금청자의 제작은 13세기 말엽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고려사≫ 세가 권31 충렬왕 23년 정월 임오조에 “정월임오에 낭장 황서(黃瑞)를 원나라에 보내어 금화옹기를 바쳤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1297년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화금청자는 금니를 사용한 표면장식의 특수한 기법이었다는 점 외에도 13세기 말엽 도자공예의 변화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이를테면 주둥이가 넓은 편병의 등장, 두꺼운 기벽, 담청색의 유색, 잔 무늬로 가득 메워지는 초화무늬의 양상, 능화형(菱花形 : 마름꽃모양) 안에 무늬를 넣는 새로운 포치법 등 고려 도자공예의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원나라와의 관계에서 새로운 문화가 유입된 영향임에 틀림이 없다.
화금청자의 예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청자상감화금수하원무늬편병과 화금청자모란당초무늬대접, 그리고 일본 개인 소장의 화금청자매월쌍봉무늬대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