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령군 ()

관북지도 / 부령, 회령
관북지도 / 부령, 회령
인문지리
지명
함경북도 북부에 있는 군.
정의
함경북도 북부에 있는 군.
개관

동쪽은 종성군, 서쪽은 무산군, 남쪽은 부령군, 북쪽은 중국 만주 지방의 길림성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9°29′∼130°05′, 북위 42°10′∼42°35′에 위치하며, 면적 1,255.80㎢, 인구 7만6155명(1944년 현재)이다. 1개 읍 6개 면 43개 동으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회령읍 일동이다.

자연환경

함경산맥의 여맥이 뻗어 내려 대부분의 지역은 산지를 이루는데, 지형적으로 남쪽은 높고, 북쪽으로 분지를 형성하면서 점차 완경사를 이룬다.

동쪽은 백사봉(白沙峰, 1,139m)·산성산(山城山, 680m), 서쪽은 민사봉(民事峰, 1,429m)·차유령(車踰嶺, 1,569m), 남쪽은 슬봉(瑟峰, 1,048m)·무산령(茂山嶺, 606m), 북쪽은 세계봉(世界峰, 746m), 중앙에는 오봉산(五峰山, 1,330m) 등의 험한 산지가 솟아 있다.

하천은 이들 산지를 분수령으로 하여 보을천(甫乙川)·회령천(會寧川)·팔을천(八乙川) 등이 북류하면서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이 군의 북부를 흐르는 두만강으로 유입되며, 신흥천(新興川)이 종성군을 지나 오룡천(五龍川)과 합류한다. 하천 유역에는 비옥한 회령평야·벽성평야 등이 발달되어 주요 생산 지대를 이룬다.

지질은 고결도(固結度)가 낮아 풍화 침식에 약한 침식 지대로서 퇴적암 지대에 속하며, 제3기 말에 퇴적된 함탄층(含炭層)이 분포되어 있다.

기후는 내륙 고원 지대에 속하여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나타내며, 겨울에는 특히 삼한사온 현상이 뚜렷하다. 연평균 기온 6.6℃, 1월 평균 기온 -12.3℃, 8월 평균 기온 22.8℃, 연 강수량 519㎜이다. 대개 첫서리는 10월 초순경에 내리며, 마지막 서리는 4월 하순경까지 온다.

역사

[고 대]

보을·벽성·화풍면 등 여러 곳에서 신석기 시대의 석부·석창·석기·토기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고, 인접한 종성군 동관진(潼關鎭)에서는 구석기 시대의 유적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선사 시대에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부족국가 시대에는 숙신(肅愼)·읍루(挹婁)·예맥(濊貊)·옥저(沃沮)·말갈(靺鞨)·부여(夫餘) 등의 흥망성쇠가 있었고, 삼국 시대에는 고구려의 영토에 속하였다.

668년(보장왕 27) 고구려가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한 뒤에는 한동안 당(唐)나라의 군정하에 있었으며, 699년 고구려 유민들이 발해를 세우자 그에 편입되어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에 속해 있었다.

[고 려]

918년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초기의 영역은 통일신라 시대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북쪽은 발해와 경계를 이루었다. 926년(태조 9) 발해가 거란에 의하여 멸망하자 이 지역은 우리 영토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한반도 북변은 이후 1115년(예종 10)에는 금(金)나라에, 1234년(고종 21)에는 원(元)나라에, 1368년(공민왕 17)에는 명(明)나라에 속하여 수세기 동안 그 영역이 변천되어 왔다.

한편, 지난날 발해가 멸망할 때 벗어난 일부 말갈족 집단인 여진(女眞)은 한때 금(金)제국으로 국운을 유지하다가 원나라에 의하여 멸망한 뒤로는 백두산 동북 방면에 할거하였으나, 그 일부 종족은 차차 남하하여 함흥 지방에까지 세력을 뻗쳐 고려와 자주 충돌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도 여진족의 거주지가 되었으며, 와무허[斡木河] 또는 오음회(吾音會)라 불렸다.

그러다가 원나라의 국운이 기울어지고 명나라가 새로 일어설 무렵인 공민왕 말엽에야 비로소 갑산에서 함경산맥 이동의 해안을 따라 두만강 최하류 지방까지 고려의 영토로 수복되었다.

[조 선]

1398년(태조 7) 두만강 하구에 경원부를 설치하였으나 1409년(태종 9) 여진의 침입으로 경원부를 경성부로 후퇴시켰고, 무산령산맥 이북의 두만강변에는 우리의 힘이 미치지 못하였다.

1423년(세종 5)에는 여진의 알타리족(斡朶里族) 추장 퉁몽거티무르(童猛哥帖木兒)가 인족 523호를 거느리고 이곳에 입거하여 약 10년 동안 정착하였다가, 1433년 두만강 하류 대안의 우디카(兀狄哈)가 내습하자 추장 부자는 죽고 잔족은 두만강 북쪽으로 퇴거하였다.

이 기회를 타서 다음해부터 육진(六鎭) 개척의 대사업이 시작되었는바, 당초에는 영북진(寧北鎭)을 석막(石幕)에서 백안수소(伯顔愁所)로 옮기고, 이곳에는 성보(城堡)를 설치하여 영북진절제사(寧北鎭節制使)가 겸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나 영북진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같은 해 5월와무허에 따로 진을 설치하고 처음으로 회령이라 이름을 지었으며, 그해 가을에는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1443년 이 군의 독산연대를 기점으로 두만강을 끼고 춘융에 이르는 행성 중 군내 1만1720척의 공사를 끝냈다. 임진왜란 때에는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 두 왕자가 이곳에 피난하였다가 역도 국경인(鞠景仁)에게 초박되어 왜군에 넘겨진 일도 있었다.

[근 대]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편에 따라 회령군으로 되었고, 그 뒤 여러 번 행정구역의 변천이 있다가 1914년 관해면이 부령군으로 이관되어 8개 면이 되었다. 1931년 회령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그 뒤 운두·봉의 두 면이 합하여 보을면이 됨으로써 1945년 현재 1개 읍 6개 면, 호수 1만4641호, 인구 7만6151명이었다. 국경무역의 중심지이며 전국적으로 유명한 탄광 지대로서 크게 발전하였다.

근대 인물로는 1920년 회령조선은행에서 용정 지점으로 수송하는 현금을 탈취하여 노령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군에게 제공할 무기를 구입하다가 일본 특무 기관에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된 간도15만원사건의 주인공 윤준희(尹俊熙), 일찍이 간도로 망명하여 학교 동창인 서일(徐一)·현천묵(玄天默) 등과 더불어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여 그 간부로 항일 무력 투쟁에 일생을 바친 김성(金星) 등 독립 운동가가 있다.

유물ㆍ유적

벽성면 영수동과 보을면 남산동 등지에 선사 시대의 석기가 산포되어 있으며, 화풍면 궁심동, 벽성면 영수동·오봉동, 보을면 성북동·남산동·성남동·운기동, 창두면 풍산동 등지에 고분들이 산재한다.

관방(關防)으로는 회령읍성을 비롯하여 고령진(高嶺鎭)·보을하진(甫乙下鎭)·풍산보·고풍산보·오국산성(五國山城, 일명 운두산성)·원산보(圓山堡)·영북보(寧北堡)·행성(行城)·파진(巴鎭)·한성현(漢城峴) 등이 있다.

이 중 회령읍성은 둘레 1,912m, 높이 1.8m의 규모이던 것을 1507년(중종 2)에 확장하여 둘레가 3,265m로 되었다. 그 뒤 1605년(선조 38)에 부사 유형(柳珩)이 토성을 쌓았다고 전하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보을면 운두산에 있는 오국산성은 북방 진압의 요충지로서 둘레 5,163m, 높이 3∼4m이다.

사찰로는 보을천 상류의 감로사(甘露寺)와 고령진 부근의 오대암사(五臺巖寺)가 있다. 회령읍내의 현충사(顯忠祠)에 있는 현충사비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신세준(申世俊)·정여경(鄭餘慶)·허관(許灌) 등 8명의 공적을 기념하여 1703년(숙종 29)에 세운 것으로 높이 182㎝, 너비 60㎝ 크기의 현무암 석비이다.

또한, 회령읍내에 있는 회령향교(會寧鄕校)는 1551년(명종 6)에 세워졌으며, 대성전을 비롯하여 명륜당·동무(東廡)·서무(西廡)·동재(東齋)·서재(西齋)·삼문을 갖추고 있는 익공합각식건물(翼工合閣式建物)이다.

교육ㆍ문화

조선 시대 교육기관으로는 회령향교가 설립되어 많은 유생들의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각 촌락에는 서당이 설치되어 한문 교육이 이루어졌다. 1702년(숙종 28) 임진왜란 때의 8의사를 배향한 현충사가 설립되었고 서원이 병설되어 유생들의 교육에 공헌을 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사라지게 되었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08년 회흥학교(會興學校)가 최초로 개교되었으며, 뒤에 회령공립보통학교로 개편되었다. 1911년 회령간이농업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18년 경성공립농업학교의 창설로 폐교되었다.

1914년 캐나다 장로계의 신흥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16년 여자부가 보흥여학교로 분리되었고, 1918년 고등과를 증설하였다. 1919년 회령공립상업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40년에 이르러 1929년 회령공립보통학교에 병설된 공립공업보습학교를 흡수하여, 공업고등학교로 개편되었다. 194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3개소, 국민학교 18개교, 중학교 2개교, 고등학교 1개교가 있다.

종교 상황은 개신교는 1912년 캐나다 장로계의 선교사를 중심으로 포교 활동을 하였으며,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에 힘썼다. 장로교의 뒤를 이어 독일계 천주교가 전파되어 학교 및 기타 복지 사업을 펴서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1945년 현재 불교 사찰 2개, 개신교 교회 3개, 천주교 성당 1개가 있다.

이 고장의 설화로는 청나라 발상에 얽힌 〈천자검전설〉이 있다. 회령읍에서 서쪽으로 두만강을 거슬러 10㎞ 정도 올라가면 파진(破鎭)이라 부르는 옛날 볼하진(乶下鎭)터가 있는데, 여기에 정충신(鄭忠信)이 첨사로 부임하였다.

하루는 마을에 여러 사람이 모여 우물에 큰 구렁이가 있다고 소란을 피우기에 첨사가 명하여 건지고 보니 장검이었는데, 검신은 유광이 찬란하고 손잡이에 ‘천자검’이라 새겨져 있었다.

정 첨사가 곰곰이 생각한 끝에 이는 하늘이 나에게 천하를 도모하라고 내린 보검(寶劍)이니 우선 대안의 한성현(汗城峴)에 웅거하는 한의 일족을 멸함이 급선무임을 깨달았다. 이에 정 첨사는 장검을 몸에 지니고 한성현으로 건너가 한의 동정을 살피니 한은 마침 여름 더위를 피하여 방문을 열고 낮잠을 자는 것 같았다.

정 첨사가 칼을 빼서 곧 목을 치려 하는데 그 순간 벽에 걸린 거울에 검광이 비쳤기 때문에 이에 놀란 한이 벌떡 일어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정 첨사는 당황한 나머지 한에게 무릎을 꿇고 보검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이 보검을 우연히 얻었으나 범인이 가질 바 못 되어 장군에게 드리려고 왔노라.” 하였더니 한은 높이 치하하고, 돌아갈 때 첨사에게 답례로 하인을 시켜 살찐 말에 금안장을 쳐서 주라고 하였는데, 하인은 여윈 말에 은안장을 쳐서 주었다.

사실 살찐 말은 둔마이고, 여윈 말이 용마인 것을 하인이 어리석어 그렇게 한 것으로서, 정 첨사는 용마를 타고 그길로 단숨에 길주까지 탈출하였다.

한은 그때야 비로소 이 사실을 알고 크게 놀라, 내가 그 말을 타고 천하를 달리려 하였는데 나의 대계를 정 첨사가 미리 알았으니 파계되기 전에 명나라를 정벌해야 한다고 곧 출병하였다.

당초 계획이 3년이던 것이 8년 만에 명나라를 치고 청나라를 세워 태조가 되었으며, 한편 정 첨사는 그 뒤 서울에 와서 현관을 지냈다고 전한다.

민요로는 지리적 또는 역사적 환경 때문에 함경도 전역에서 불리는 근대요인 〈애원성〉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산아 산아 에루아 동대산아/부모님 형제엔 이별산이로구나/(후렴)에헤 에헤야 얼사마 좋구 좋다 어널럴 거리고 상사디야/해상위 항구가 그 얼마나 좋길래/신개척이 찾아서 빈 보따리 쌌네/마우재 양지전에 정들변 하다가/왜놈의 권연지에 몽땅 속았구나/부령 청진간 낭군 돈벌이 가더니/북망산천 갔는지 종무소식이로구나/…….”

이 밖에도 창두면에서 전래되는 〈권리타령〉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궐리로세 궐리로세 대궐리를 드디여라/소궐리를 드디여다 에헤얼사 소궐리라/숯은 녹아 재가 된다 쇠는 녹아 냉수 된다/오늘 저녁 성역쥔은 헌입성을 벗겨 주고/금의화복 입혀 주소 저녁 먹고 냇다서니/월편에서 손을 친다 먼데님은 손을 치고/…….”

민속놀이로는 마을 청년들의 횃불놀이와 매사냥, 노년층의 수천놀이 등이 있었으나 근래에는 보기 드물고, 세시 풍속으로는 다른 고장과 같이 음력 정월을 전후하여 윷놀이가 성하다. 윷가락은 나무윷이 아니고 강낭콩에 금을 새긴 콩윷을 쓰며, 기후 관계로 실내에서만 행하였다.

그리고 추석보다는 단오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단오에는 씨름·그네뛰기 대회가 있고, 널뛰기는 정월과 단오에 성행되며, 그 밖에도 팽이치기·연날리기 등을 하며 즐긴다.

동제는 3월 중에 길일을 택하여 행해지며, 마을에 맹수나 괴질의 피해가 없도록 산천신에 기원한다. 제의 준비는 미리 선정된 제가에서 소임 여러 명이 이를 맡아 큰 돼지를 잡아 삶아서 그 머리와 시루떡·제주·쌀 등을 제물로 한다.

제단은 마을 안의 큰 나무나 바위가 있는 정결한 곳을 택하여, ‘산천지신위(山川之神位)’라고 쓴 신주를 모신다. 제물 진설이 끝나면 그 앞에는 각 집집마다 메 한 그릇씩을 지어다 놓으며, 의식은 고령자 중에서 선정한 제관 3명이 차례로 분향, 헌작, 배례한 다음 고축하고 재배하며 소지하는 것으로 끝난다.

제가 끝나면 그 자리에서 음복하고 돼지고기는 집집마다 골고루 분배한다. 한편, 군내의 산간 오지에는 옛날 여진족의 귀화민들이 살고 있는 이른바 재가승(在家僧)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에서는 정월 초에 산치성(山致誠)이라 하여 불식(佛式)에 준하는 동제를 지내는 풍습이 있다.

산업ㆍ교통

대부분의 지역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농경지는 두만강·회령천·팔을천 등의 하천 유역에 형성된 회령평야·벽성평야와 산간분지 등에 국부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경지면적은 총면적의 9.3%에 불과하며, 그 가운데 밭이 8.7%, 논이 0.6%로 밭농사 위주의 농업이 이루어진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조·감자·옥수수·귀리 등이며, 특산물로는 대마·왕골 등이 있다. 농가의 부업으로는 축산업이 활발하여 소·양·돼지 등의 사육을 비롯한 양잠·양봉 등이 이루어진다. 임업으로는 각종 침엽수와 활엽수 등의 임산자원이 풍부하며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예로부터 두만강재의 집산지로서 신의주와 더불어 우리 나라 제재 공업지대의 쌍벽을 이루었다. 두만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뗏목으로 운반되며, 대부분 제재되거나 탄광용 갱목 및 펄프 원료로 공급되고, 철도를 이용하여 주요 지역으로 반출된다.

광업으로는 두만강 연안의 갈탄과 팔을면굴륵산광산(掘勒山鑛山)에서 코발트가 생산된다. 이 가운데 회령탄전은 두만강 연안 제3기 층에 부존하는 갈탄층으로 국내 굴지의 탄전이다.

보을면 유선동의 유선(遊仙), 성동동의 봉의(鳳儀), 성북동의 계림(鷄林), 팔을면 김생동의 회령, 화풍면 궁심동의 화풍(花豊)·죽포(竹浦) 등 6개의 탄광이 있으며, 이곳에서 생산되는 갈탄은 회령 탄광선을 부설하여 운반하고 있다. 이 밖에 금·은 등도 생산된다. 공업은 제재업·도기업을 비롯하여 양조·정미·주물 등이 이루어진다.

한편, 이 군은 대륙의 관문으로서 1638년(인조 16) 청시(淸市)가 개설되어 중국과의 국제무역이 이루어진 상업 중심지이다.

1645년 경원개시(慶源開市)가 격년제로 바뀐 뒤부터 회령에서만 열리던 청시는 단개시, 두 곳에서 열리는 것은 쌍개시라 하였으며, 이들을 북관개시(北關開市)라 일컬었다. 개시는 두 나라 관헌의 감시 아래 이루어진 공무역이며, 부수적으로 개인 거래도 행하여졌다.

개시 시기는 봄(4·5월)·가을(9·10월)·겨울(12월)에 열렸으나, 효종 때부터 겨울에만 열렸다. 이에 청나라에서는 관헌과 상인 및 가축까지도 따라와 체류 기간도 길어지고 민폐가 커지게 되었다.

따라서, 정부에서 외교 교섭을 통하여 인원·접대·품공(稟供)을 정례(定例)로 정하고, 점차 개선하기까지 진통을 겪으면서도 청나라의 요구에 따라 오랫동안 변방 물물교환의 거점으로 중요시되어왔다.

근대에 와서는 함경선·북선선(北鮮線)이 만주철도와 연결됨에 따라 청진·나진 등 개항지의 통과 역에 불과하여 시장의 기능도 국내 지방 시장으로 쇠퇴하였다. 회령시장은 매일 개장하며, 장시의 주요 거래 품목으로는 신탄·가축·농산물 등이 있다. 이 밖에 2개의 축산물 시장이 있다.

교통은 함경선이 군의 중앙을 남북으로 통과하며, 고풍산·대덕·창두·회령 등의 역이 설치되어 있고, 회령∼계림 간의 회령 탄광선이 통과한다. 도로는 무산-온성-웅기 간, 회령∼행영 간, 청진∼회령 간의 국도가 회령을 중심으로 뻗어 있어 편리한 편이다. 또한, 중국 길림성의 용정과 연결되는 국도가 통과한다.

읍ㆍ면

[회령읍會寧邑]

군의 중북부에 있는 읍. 면적 12.42㎢, 인구 2만7480명(1945년 현재). 읍 소재지는 일동이다. 본래 부남사(府南社)와 공북사(拱北社) 지역으로서, 1913년 회령면으로 병합되었으며, 1931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북부에는 오산(鰲山)이 솟아 있으며, 동남쪽으로 그 여맥이 뻗어 내려 대부분 낮은 구릉 지대이며, 회령분지를 이룬다. 두만강이 읍의 북부를 흐르며, 회령천이 읍계를 따라서 북류하다가 두만강으로 유입된다. 하천 유역에는 비옥한 회령평야가 발달되어 있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콩·조·옥수수 등이 있으며, 특산물은 회령도기가 유명하다. 임업은 임산자원이 풍부하며, 두만강재의 집산지로서 넓은 저목장(貯木場)과 제재소 등이 설치되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광업은 배후 지역의 회령탄전의 개발로 갈탄이 생산된다. 교통은 함경선이 읍의 중서부를 통과하며, 회령역이 설치되어 있고, 이곳에서 회령 탄광선이 분기한다.

특히 철도는 이 지역의 각종 자원의 수송에 큰 구실을 한다. 도로는 무산-온성-웅기 간, 회령∼행영 간, 청진∼회령 간의 국도가 통과하며, 벽성·팔을·화풍면 등과 연결되어 있어 편리한 편이다.

유적으로는 오동에 선사유적지가 있고, 회령향교·회령성지(會寧城址)·현충사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 중학교 2개교, 고등학교 1개교가 있다. 일(一)·이(二)·삼(三)·사(四)·오(五)·요(料)·〉오산(鰲山) 등 7개 동이 있다.

[벽성면 碧城面]

군의 중서부에 있는 면. 면적 148.53㎢, 인구 1만2036명(194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대덕동이다. 본래 대덕사(大德社)와 영수사(永綏社) 지역으로서, 1913년 이를 병합하여 벽성면이 되었다.

남서부에는 오봉산이 솟아 있으며, 동부는 낮은 구릉 지대이고, 그 밖에 대부분의 지역은 회령평야의 중심부를 이룬다. 두만강이 면의 북부를 흐르며, 회령천이 면의 중앙을 북류하다가 회령읍계를 거쳐 두만강으로 유입된다. 하천 유역에는 비옥한 회령평야가 발달되어 곡창 지대를 이루며, 쌀의 생산량이 많다.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기후 조건이 농업에 적당하고 근농 정신이 강하여 독농가(篤農家)가 많아 다수확과 유축농업의 모범 마을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조·보리·수수·옥수수·기장·원두·채두 등이다. 특히, 콩류는 특수 품종으로서 수출용 농산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대소비지인 회령과 인접하여 배추·무·당근·우엉·감자·참외·수박 등의 원예작물이 재배된다. 농가의 부업으로는 소·면양·돼지·닭 등의 유축농업이 이루어지며, 특히 면양은 오스트레일리아산 코리데일 종과 메리노 종으로서 방모와 홈스펀 직조까지 하는 농가도 적지 않다.

교통은 함경선이 면의 중앙을 통과하며, 대덕역이 설치되어 있고, 회령탄광선이 면의 북부를 통과한다. 도로는 무산-온성-웅기 간의 국도가 면의 북부를, 청진∼회령 간의 국도가 면의 중앙을 통과하며, 회령읍·보을·팔을·창두면 등과 연결되어 있어 편리한 편이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교가 있다. 대덕(大德)·영수(永綏)·서촌(西村)·벽성(碧城)·오봉(五鳳)·중도((中島) 등 6개 동이 있다.

[보을면 甫乙面]

군의 서부에 있는 면. 면적 302.92㎢, 인구 1만8006명(194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유선동이다. 본래 봉의사(鳳儀社)와 운두사(雲頭社) 지역으로서, 각각 독립된 면으로 유지해 오다가 1943년 이를 병합하여 보을면이 되었다.

동부에는 오봉산, 서부에는 차유령·노전항령(蘆田項嶺)·구절령(九折嶺, 538m) 등의 산지가 솟아 있다. 보을천이 면의 중앙을 북류하다가 성동동에서 두만강으로 유입된다. 하천 유역은 벽성평야와 연결되어 주요 생산 지대를 이룬다.

주요농산물은 쌀·보리·콩·조·기장·수수·옥수수·원두·채두 등이다. 농가의 부업으로는 소·돼지·닭·면양 등의 유축농업이 행하여진다. 광업은 북부 두만강변 부근 회령탄전 지대로의 유선·봉의·계림 등 3대 탄광을 중심으로 갈탄이 생산되며, 회령 탄광선을 이용하여 주요 지역으로 반출된다.

교통은 회령 탄광선이 면의 북부를 통과하며, 봉의역이 설치되어 있다. 도로는 무산-온성-웅기 간의 국도가 면의 북부를 통과하며, 벽성면·무산군 등과 연결되어 있으나 불편한 편이다.

유적으로는 남산동에 신석기 시대의 유물, 성북동·성남동·남산동에 고분, 운두산(雲頭山)에 오국산성·송제릉(宋帝陵)·여진총(女眞塚) 등이 있다. 산성에는 12세기 초 정강란(靖康亂)으로 금나라에 의하여 멸망한 북송의 흠종(欽宗)과 휘종(徽宗)을 유폐하였다고 전하여진다.

그밖에 겨울의 스키장과 매 사냥터로도 유명하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4개교가 있다. 유선(遊仙)·운연(雲淵)·성동(城東)·성남(城南)·성북(城北)·남산(南南山)·홍산(鴻山)·오류(五柳)·운기(雲基) 등 9개 동이 있다.

[용흥면龍興面]

군의 동부에 있는 면. 면적 189.52㎢, 인구 2,230명(194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세곡동이다. 본래 용성사(龍成社)와 신흥사(新興社) 지역으로서, 신흥면이 되었다가 1913년 이를 병합하여 팔을면이 되었다.

동부에는 무산령산맥의 슬봉에서 동북으로 여맥이 뻗어 내려 교동령(交東嶺)과 신흥령(新興嶺)이 솟아 있으며, 그 밖에 대부분의 지역은 낮은 구릉 지대를 이룬다. 신흥천이 면의 북부를 동류하다가 종성군으로 흘러 들어가 오룡천과 합류한다. 산간지대를 중심으로 화전 경작 형태의 밭농사 중심의 농업이 이루어진다.

주요 농산물은 콩·보리·조·팥·귀리·메밀·수수·옥수수 등이다. 특히, 콩류는 특수 품종으로서 수출용 농산물로 수요가 많다. 농가의 부업으로는 소가 사육되며, 북선우(北鮮牛)라 하여 체격이 크고 강건하며 번식력이 강한 우량종을 많이 사육하고 있다.

임업은 침엽수와 활엽수 등의 임산자원이 풍부하여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원목은 주로 탄광용 갱목으로 군내 각 탄광에 공급되며, 일부 잡목은 현지에서 목탄으로 제조되어 주요 지역으로 반출된다. 또한, 재가승이라 불리는 옛 여진족의 귀화민이 집단 거주하는 마을이 산재하고 있다.

교통은 회령읍과 부령군 부령읍에서 각각 경원군 남부의 두만강 하류 방면을 연결하는 도로가 면의 북부와 남부를 통과하며, 팔을면·창두면·종성군 등과 연결되어 있으나 불편한 편이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세곡(細谷)·신흥(新興)·어운(魚雲)·용성(龍城) 등 4개 동이 있다.

[창두면昌斗面]

군의 남부에 있는 면. 면적 314.30㎢, 인구 4,552명(194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풍산동이다. 본래 풍산사(豊山社)·영산사(靈山社) 지역으로서, 1913년 이를 병합하여 창두면이 되었다.

남부에는 무산령·슬봉, 북부에는 오봉산 등이 솟아 있으며, 대부분의 지역은 산간지대를 이룬다. 회령천이 서부를 북류하다가 벽성면을 거쳐 두만강으로 유입된다. 산간지대를 중심으로 밭농사 중심의 농업이 이루어진다.

주요 농산물은 콩·조·보리·귀리·기장·수수·옥수수·채두·감자 등이다. 농가의 부업으로 소·돼지 등의 유축농업이 행하여진다. 임업은 침엽수와 활엽수 등의 임산자원이 풍부하여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원목은 주로 회령읍으로 반출되어 용재(用材)나 탄광용 갱목으로 공급되며, 잡목은 현지에서 목탄으로 제조되어 주요 지역으로 반출된다. 임산 부산물로는 수피(樹皮)·수지(樹脂)·송이버섯·봉밀 등이 생산된다. 또한, 재가승이 집단 거주하는 마을이 산재한다.

교통은 함경선이 면의 서부를 통과하며, 고풍산·창두 등의 역이 설치되어 있다. 이와 거의 병행하여 청진∼회령 간의 국도가 통과하고, 부령읍에서 용흥면 방면으로의 도로가 면의 동부를 통과하고, 벽성면·용흥면·보을면·부령군 등과 연결되어 있어 편리한 편이다.

유적으로는 여진족이 집단 거주하는 마을에 동족 간의 분쟁으로 숨진 여진족 추장 퉁몽거티무르의 무덤이라 전하여지는 고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풍산(豊山)·무산(茂山)·창두(昌斗)·영산(靈山)·창태(蒼苔)·종암(鍾鍾巖) 등 6개 동이 있다.

[팔을면八乙面]

군의 중동부에 있는 면. 면적 148.95㎢, 인구 6,043명(194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원산동이다. 본래 창효사(彰孝社)와 원산사(元山社) 지역으로서, 1913년 이를 병합하여 팔을면이 되었다.

북부에는 산성산이 솟아 있으며, 그 밖에 대부분의 지역은 낮은 구릉 지대를 이룬다. 팔을천이 면의 중앙을 북류하다가 원산동에서 다시 서류하여 두만강으로 유입되며, 긴 협곡을 이룬다. 하천 유역에는 비옥한 회령평야가 발달되어 있으며, 관개시설이 잘 갖추어져 쌀의 생산량이 많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팥·조·보리·기장·수수·옥수수·원두·채두 등이다. 농가의 부업으로는 소·돼지·닭·면양 등의 유축농업이 행하여지며, 구릉 지대에 넓은 초원이 형성되어 면양 방목지로 적합하고 오스트레일리아산 종양장이 설치되어 도내 북부의 면양 중심 기지를 이룬다.

광업은 북부 두만강변 김생역 부근의 회령탄광전에서 양질의 갈탄이 생산되며, 굴륵산광산을 중심으로 코발트·니켈 등이 생산되는 국내 주요 광산 가운데 하나이다.

교통은 회령∼행영 간의 국도가 면의 북부를 통과하며, 회령읍·용흥면·벽성면·화풍면·종성군 등과 연결되어 있으나 불편한 편이다. 유적으로는 산성산에 보래산성이라 불리는 산성이 있다. 일설에 의하면 성내에 두 개의 연못이 있는데, 기우제를 지내면 효험이 있다 하여 용연이라 부른다고도 한다.

또한, 주위 일대는 진달래의 명승지로서 흑철쭉을 볼 수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원산(元山)·창효(彰孝)·장무(奬武)·금생(金生)·세(細)·영천(靈泉泉) 등 6개 동이 있다.

[화풍면花豊面]

군의 북단에 위치한 면. 면적 139.27㎢, 인구 5,808명(194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인계동이다. 본래 인계사(仁溪社)와 옹희사(雍熙社) 지역으로서, 1913년 이를 병합하여 화풍면이 되었다.

남부에는 산성산, 북부에는 세계봉 등이 솟아 있으며, 동남부 지역은 낮은 구릉 지대를 이룬다. 두만강이 면의 서부를 북류한다. 하천 유역에는 비옥한 충적평야가 발달되어 있으며, 화풍수리조합이 설치되어 쌀의 생산량이 많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보리·팥·조·기장·수수·옥수수·원두·채두·감자 등이다. 농가의 부업으로는 소·돼지·닭·면양 등의 유축농업이 행하여진다. 광업은 서부 두만강변 부근의 회령탄전 지대로서 화풍·죽포 등의 탄광을 중심으로 품질이 우수한 갈탄이 생산된다.

교통은 북선선이 면의 서부를 통과하며, 고령진역이 설치되어 있다. 이와 거의 병행하여 무산-온성-웅기 간의 국도가 통과하며, 회령∼행영 간의 국도가 면의 남부를 통과한다. 회령면·팔을면·종성군 등과 연결되어 있으나 불편한 편이다.

유적으로는 인계동의 고령진이 있으며, 봄철이 되면 주위 경관이 뛰어나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교가 있다. 인계(仁溪)·옹희(雍熙)·사을(沙乙)·궁심(弓心)·학포(鶴浦) 등 5개 동이 있다.

광복 후 변천

1952년 12월 회령읍·창두면·화풍면의 전체 이(里)와 팔을면의 5개 이, 벽성면의 4개 이, 부령군 서상면의 1개 이, 종성군 남산면의 2개 이로 개편되었으며, 1954년 10월 회령군 세천리가 세천노동자구로, 1961년 3월 궁심리가 궁심노동자구로 개칭되었다.

1974년 5월 유선군과 종성군이 폐지되면서 유선군의 전 지역과 종성군의 일부 지역인 방원리·낙생리·행영리·굴산리·중봉노동자구가 이 군에 편입되었다. 1991년 7월 시로 승격되었다.→회령시

참고문헌

「北韓文化財 實態와 現況」(文化財管理局, 1985)
「咸北大觀」(金盛德, 正文社, 1967)
「會寧郡邑誌」
「會寧郡誌」(會寧郡誌編纂委員會, 1975)
「咸鏡北道誌」(咸鏡北道誌編纂委員會, 1970)
「人物의 고향」-北韓篇(, 中央日報社, 1991)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집필자
조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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