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릿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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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릿그물을 당기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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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나 강에서 물고기를 잡는 데 쓰는 큰 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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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바다나 강에서 물고기를 잡는 데 쓰는 큰 그물.
내용

일찍부터 우리 나라에서 개발된 지인망(地引網)의 일종이다. 그 구조가 간단하고 사용법도 쉬우므로 원시시대부터 이미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문헌상으로 후릿그물이 휘리(揮罹)라는 명칭으로 자주 등장하게 된 시기는 조선 후기부터였다.

1752년(영조 28)에 제정된 ≪균역사목 均役事目≫ 해세조에는 경상도의 어업 중 어장(漁場)을 설명함에 있어서 강에는 강어휘리장(江魚揮罹場)이 있다는 것이 보인다.

이것은 강에서 후릿그물을 쳐서 담수어나 소하성(溯河性:바다에서 육지의 강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성질) 어류를 잡는 어장을 말한 것이다. 후릿그물은 과거 하천에서 많이 사용하였을 것이다.

≪경세유표≫에는 경상도의 해세를 논하는 가운데 강구(江口)에서 큰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것도 역시 어장이라고 부르는데 방언은 휘리라고 한 것이 보인다. 역시 하천에서 후릿그물을 치는 곳을 말하는 것이다. 후릿그물은 해안에서 각종 어류를 어획하는 데에도 많이 사용되었다.

≪균역사목≫의 함경도 해세에 관한 것을 보면 덕원청어휘리세(德原靑魚揮罹稅)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덕원지방에서 청어를 후릿그물로 잡고 있었음을 전하는 것이다.

≪만기요람≫ 해세조에는 강원도의 어업에 대하여 적으면서 휘리가 여러 곳에 있는데 그 세금은 많은 것은 10냥, 적은 것은 4∼5냥이라고 하고 있다. 강원도 연안을 중심으로 한 동해안은 자연적 조건이 후릿그물과 같은 지인망을 사용하기에 적합하므로 과거 지인망을 많이 사용하였던 것이다.

≪균역사목≫보다 수년 뒤에 만들어진 ≪균역청사목≫에는 전라도의 어구를 열거한 것 중에 면휘망(綿揮網)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면사(綿絲)로 만든 후릿그물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말기에는 대규모의 후릿그물이 사용되고 있었다. ≪임원경제지≫에서는 당망(搪網)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그 속명이 휘리망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해중(海中)의 대망으로서 칡덩굴을 벗겨 가는 새끼를 꼬아 만드는데 길이가 수 장(數丈), 너비는 누백파(累百把) 되는 것이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너비라고 말한 것은 띠처럼 기다랗게 생긴 후릿그물의 길이를 말한 것이다.

이를 강이나 해변에서도 사용하는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어류를 잡는다고 하였다. 특히, 부호는 명주실로 만든 대형 후릿그물을 만들기도 한다고 하였다. 이는 상당히 발달된 후릿그물이 19세기 전반기에 이미 사용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1908년에 발행된 ≪한국수산지 韓國水産誌≫ 제1집에는 각종 어구의 설명에서 지예망(地曳網:地引網)이라는 것을 들고 그 밑에 휘리망이라고 표시하고 있다. 전자는 일본식 명칭이다.

이 지예망에는 온지예망(鰮地曳網)과 대지예망의 두 종류가 있는데 어포부(魚捕部)에 낭망(囊網)이 달려 있지 않은 것이 보통이나 드물게 그것이 달려 있는 것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원래 후릿그물이라 하면 다른 지인망과 구별되는 것이 낭망이 없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에도 낭망이 없는 지인망을 후릿그물이라고 하였다.

온지예망은 우리말로 멸치휘리그물[滅魚揮罹網]이라고 기재하고 있다. 망지(網地)는 면사제인데 종전에는 자가제 면사를 사용하였으나 근래에는 일본산 망지를 구입하여 사용한다고 하였다. 어망의 형태는 대체로 장방형이다.

이는 그 이름이 표시하듯이 멸치를 잡는 데 사용되었다. 어법은 4, 5명의 어부가 어망을 어선에 싣고 나가 해변에 몰려든 멸치떼를 포위한 뒤 육지에서 어망을 끌어올려 멸치를 잡는 것인데 어부 총수는 14∼15명이었다.

한말에 이르러 멸치후릿그물 어업은 가장 중요한 어업의 하나로 성장하였다. 멸치의 대군을 포위하였을 때에는 서로 눌려 폐사하여 해저에 가라앉는데 심한 경우에는 그 두께가 수 촌에 달하고 해저가 온통 은백색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대지예망은 강원도 연안 특유의 어망으로서 방어·도미·삼치·청어 등 비교적 큰 어류를 어획하는 데 사용되었다. 망지는 삼 껍질로 만든 실과 마사(麻絲)와 칡덩굴섬유를 혼용하여 만든 것, 그리고 순전히 일본산 면사로 만든 것이 있었다. 이것은 어망의 규모가 멸치후릿그물보다 컸으므로 조업에 있어서는 25명 정도의 어부가 상시 종사하였다.

후릿그물은 일제강점기까지만 하더라도 수백 통이 사용되고 있었고, 주로 우리 나라 사람이 이를 사용하였으나, 능률적인 다른 어구가 발달함에 따라 그 상대적 중요성은 절감하였다.

오늘날에는 연안 가까이 내유(來游)하는 어류 자원이 격감하여 후릿그물어업은 산업으로 성립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다만 경상북도 일부 지방에서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참고문헌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한국수산지(韓國水産誌)』(농상공부, 1908)
『한국수산업사』(박구병, 태화출판사,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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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박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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