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우회 ()

근대사
단체
1920년대 관서 · 관북지방에 조직되었던 무정부주의 운동단체.
목차
정의
1920년대 관서 · 관북지방에 조직되었던 무정부주의 운동단체.
개설

평안남도 평양·안주, 평안북도 철산, 함경남도 단천 등 각 지방에 조직된 단체이다.

연원 및 변천

1926년 이래 관서·관북지방에는 원산청년회·원산본능아연맹(元山本能兒聯盟)·원산일반노조와 평양·안주·단천·철산 등 각 지방에 흑우회 등 무정부주의 단체가 조직되고 있었다.

1927년에 평양에서 관서흑우회(關西黑友會)가 조직되었다. 주요 회원은 이홍근(李弘根)·최갑룡(崔甲龍)·이주성(李周聖)·승도경(承道京)·최복선(崔福善)·한명호(韓明鎬)·이효묵(李孝默)·김주붕(金周鵬)·채은국(蔡殷國)·이시헌(李時憲)·곽정모(郭正模)·송선택(宋善澤)·오치섭(吳致燮)·황지엽(黃智燁)·전창섭(全昌燮)·이중화(李重華)·김찬혁(金贊爀)·김병순(金炳淳)·양제로(楊濟櫓)·이성근(李成根) 등이다.

또한 같은 해 단천흑우회(端川黑友會)가 조직되었다. 회원은 조중복(趙重福)·임중학(林仲鶴)·김낙구(金洛九)·강창기(姜昌磯) 등이다. 1929년에는 안주흑우회(安州黑友會)가 조직되었다. 회원은 안봉연(安鳳淵)·김한수(金翰洙)·이순창(李順昌)·박동위(朴東葳)·김노태(金魯泰)·한명룡(韓明龍)·김용호(金龍浩) 등이다.

이 밖에도 1930년철산흑우회(鐵山黑友會)가 조직되어 정철(鄭哲)·홍형의(洪亨義)·김이원(金利元) 등이 활동하였다. 1929년 8월 8일 관서흑우회는 임시총회를 개최해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대회(全朝鮮黑色社會運動者大會)를 11월 10·11일 양일간 평양에서 개최할 것을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그 준비위원으로 이홍근·최갑룡·채은국·조중복 등을 선임하였다.

이때는 조선공산당의 조직이 제1차에서 4차에 걸친 거듭되는 대검거로 거의 괴멸상태에 빠졌다. 또 무정부주의 운동진영에서도 각 지방의 산발적인 조직이 거의 완전히 적발되는 등 일제의 극심한 탄압을 받고 있었다.

대회일자가 가까워져 각지에서 대표자들이 계속 평양으로 모이자 평양경찰서는 집회금지조처를 취하였다. 그러나 함경남도의 조중복과 임중락은 대회날짜에 맞추어 천리길을 걸어왔다.

충청남도의 장재욱(張在旭)·신현상(申鉉商), 함경남도 정평의 차고동(車鼓東), 홍원의 홍성환(洪性煥), 강원도 양양의 김한(金翰), 원산의 김경진(金京鎭) 등은 평양역에 도착하자 곧 일본경찰에 잡히거나 숙소에서 붙들려 강제 추방되었다.

농군으로 변장해 봉천에서 압록강을 건너 잠입한 유화영(柳華永 : 柳林)은 평양 시내에 은신했으나 결국 같은 해 11월 11일 붙들려 봉천으로 호송되었다. 동경(東京)동흥노동조합(東興勞動組合) 대표 유현태(柳玄台)는 평양역에서 붙잡혀 동경으로 호송되었다.

이와 같은 추방·구금·도피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회는 좌절되었다. 관서흑우회의 이주성·승도경·김찬혁 등은 경찰처벌령 위반을 구실로 구류처분을 받았다. 양화직공조합(洋靴職工組合)의 이효묵은 노조원으로서 흑색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붙잡혔다. 최갑룡은 무직부랑자라는 죄명으로 구류처분되어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대회는 무산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같은 해 11월 11일 무정부주의자들은 전열을 정비해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朝鮮共産無政府主義者聯盟)을 비밀리에 결성하였다.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

참고문헌

『한국(韓國)아나키즘운동사(運動史)』 전편(前篇)-민족해방투쟁(民族解放鬪爭)-(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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