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연노씨 3현인 노변소(盧抃素), 노침(盧沈), 노홍언(盧弘彦)을 제향하기 위해 건립된 사우이다. ‘소곡사(蘇谷祠)’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는데, 연대는 분명하지 않다. 이후 1857년(철종 8)에 소곡서원으로 승격한 뒤, 1864년(고종 1)에 훼철되었으며 이후 소곡서당(蘇谷書堂)으로 개칭하여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조병덕(趙秉悳)이 지은 「창녕소곡사기(昌寧蘇谷祠記)」에 따르면, 창녕의 화왕산(火旺山) 북쪽 5리에 있는 ‘소토(蘇吐)’라는 골짜기 위에 노변소의 묘가 있고, 그 아래 노변소를 모시는 사우를 지어 소곡사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후일 노변소의 현손 노침과 노침의 손자 노홍언을 종향하였다. 1857년에 조병덕은 ‘향사(鄕社)’는 ‘서원’의 별명(別名)이며, 향선생이 머물다 돌아가신 곳에 그를 제사지내는 것은 절의(節義)와 도학(道學)을 계승하기 위한 것이니, 노변소의 후손들은 이 서원에서 실심으로 독서하여 후손으로써 부끄럽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하며, 소곡서원이라 이름한 뒤 기문을 작성하였다. 또한 소곡사를 소곡서원으로 승격하면서 노변소의 위패를 봉안할 때의 봉안문과 3현의 축문도 동시에 작성하였다.
노변소는 자가 회문(繪文)이며, 고려시대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가 되었다. 고려 말 정변을 당하자 정몽주와 뜻을 같이 하였다. 조선이 들어서자 태조가 그를 불렀으나 대궐에 나아갈 때도 소복(素服)을 바꿔 입지 않았으며, 경주판윤에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숨어 살다가 생을 마쳤다. 자헌대부 대호군에 증직되고 청민(淸敏)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노침은 명종 때 진사에 입격하였고 학행과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노홍언은 한강 정구의 문인으로 선조 때 진사에 입격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창의공(倡義公)이라 불렸다. 사후 조정에서 정려를 내리고 절효(節孝)라는 시호를 받았다.
소곡서당의 배치형태는 튼 ‘ㅁ’자 형으로, 남북축 선상에 대문채와 강당을 두고, 그 정면 좌우에 관리사와 영사정이 자리 잡고 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 건물이다. 좌측 협실에는 ‘청아헌(淸雅軒)’, 우측 협실에는 ‘양진당(養眞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소곡서당은 2005년 7월 21일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1857년 소곡사가 소곡서원으로 승격되면서 작성한 「창녕소곡사청민노공봉안문(昌寧蘇谷祠淸敏盧公奉安文)」과 제향인물 3인의 「춘추향축문(春秋享祝文)」이 『숙재집(肅齋集)』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1966년에 소곡서당에서 간행한 『장연노씨세보(長淵盧氏世譜)』가 영남대학교 도서관 및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 후기 서원 남설기에 문중사우에서 시작하여 후대에 서원으로 승격된 전형적인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