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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스크바삼상회의(─三相會議)

    외교사건

     1945년 12월 16일부터 25일까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미국·영국·소련의 3개국 외상(外相)이 한반도의 신탁통치 문제를 포함한 7개 분야의 의제를 다룬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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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1945년 12월 16일부터 25일까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미국·영국·소련의 3개국 외상(外相)이 한반도의 신탁통치 문제를 포함한 7개 분야의 의제를 다룬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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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1945년 12월 16일부터 25일 사이에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미국대표 번스(James F. Byrnes) 국무장관, 소련대표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 외무장관, 영국대표 베빈(Ernest Bevin) 외무장관이 모여 모두 7개 의제에 대해 토의하였다. 이때 한국에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일정기간의 신탁통치에 관하여 협의한다는 사안이 결정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경과
    흔히 모스크바의정서 한국조항은 임시정부 수립과 신탁통치 실시에 관한 결정으로 간주되며, 이 의정서대로 따랐으면 통일민족국가가 건설되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조항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어느 것 하나 결정되지 않은 휴지조각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게 한다.
    모스크바의정서의 한국관계 조항은 4개의 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첫째 항부터 인용하여 분석해 보고자 한다.
    “첫째, 코리아를 독립국가로 재건하고 또한 민주적 원칙에 바탕을 둔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여건을 창출하기 위하여, 그리고 장기간의 일본지배로 인한 참담한 결과를 가능한 속히 제거하기 위하여, 코리아의 산업과 운수 및 농업 그리고 코리아인의 민족문화 발전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코리아 민주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위의 첫 번째 항은 미국안에는 없던 다소 선언적인 내용으로서 신탁통치가 실시된다는 언급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독립을 위하여 임시정부가 수립될 것”이라는 조선민족에 호의적인 내용이다. 따라서 첫 번째 항을 과대평가한다면 모스크바결정은 신탁통치에 관한 의정서가 아니라 독립의 실현방법을 규정한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결정된 것은 탁치가 아니라 독립을 위한 임시정부 구성이라는 주장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위 조항은 하나의 선언적 수사(rhetoric)에 불과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아래와 같이 탁치안도 확정된 것이 아니었으므로 모스크바의정서의 3대 축인 신탁통치와 독립, 임시정부 구성 등에 관해서 아무 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둘째, 코리아임시정부의 구성을 돕기 위하여, 그리고 적절한 방책을 미리 만들기 위하여, 남부코리아의 미군사령부와 북부코리아의 소련군사령부의 대표로 구성되는 공동위원회를 설립할 것이다.”
    두 번째 항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첫 번째 항에서 규정된 임시정부의 구성이 즉각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미·소공동위원회(이하 공위)라는 기관이 설립된 후 공위의 도움으로 구성된다는 수순이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공위의 임무에 대해서는 세 번째 항에서 설명하고 있다.
    “셋째, 코리아 민주임시정부와 민주단체들의 참여 아래, 코리아인의 정치·경제·사회적 진보와 민주적인 자치정부의 발전 및 코리아의 민족적 독립의 달성을 위하여 협력·원조(신탁통치)할 수 있는 방책을 작성하는 것이 공동위원회의 임무이다.”
    신탁통치에 대한 언급이 최초로 나오는 세 번째 항에서 탁치는 ‘독립달성의 수단’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공위의 주된 임무는 ‘신탁통치방책의 작성’이며, 두 번째 항 서두에 나와 있는 ‘임시정부 구성을 돕는 것’도 부차적 임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탁통치 실행안의 작성 과정에 대한 기술이 이 의정서의 중요한 줄기를 이루고 있다. 그 첫 번째 과정은 결정의 주체인 공위가 코리아 임시정부와 정당·사회단체와 협의하여 신탁통치 방안을 작성한다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두 번째 항 둘째 문장과 세 번째 항의 첫째 문장 서두, 둘째 문장 서두에 나온다. 이는 코리아인을 단지 행정관(administrator)이나 고문(consultant)으로 임용할 수 있다는 미국안의 규정보다 코리아인 대중의 참여가 보장된 것으로써 소련 측에 유리한 규정이다.
    이상과 같이 신탁통치 실행안의 작성 과정에 대한 기술이 이 의정서의 중요한 줄기를 이루는데, 이를 크게 도식화하면, ① 공위가 임시정부와 정당·사회단체와 협의하여 탁치방안 작성, ② ‘최고 5개년에 걸친 4개국 탁치 협정’안을 4개국 정부가 심의, ③ 신탁통치협정안을 미·소 정부가 최종 결정한다는 것이 그 수순이다.
    의정서의 마지막 항인 네 번째 항은 미·소 사령부간의 긴급회담이 2주일 내로 개최된다는 것으로, 어떻게 보면 이것 외에는 무엇이 모스크바의정서의 확실한 결정인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의정서 자체는 비구체적이며 모호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모스크바회담에서는 ‘최고 5개년에 걸친 4개국 신탁통치’가 실시될 것이라고 막연히 결정되었을 뿐인데, 이의 구체적 실행방법은 미·소가 주체가 되어 조선인과 영·중과는 단지 협의만 하여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모스크바회담의 한국문제 해결 방식의 요점이다. 즉 미·소가 결정당사자라는 점을 명확히 하였던 것이다.
    이 의정서를 신탁통치에 관한 의정서라고 하지만 신탁통치 실시의 구체적 실행 방법을 결정했다기 보다는 ‘신탁통치 실시방안의 결정 수순’을 대략적으로 규정한 문서에 불과하다. 원래 신탁통치를 실시하려 했다면 그 구체적인 실행안이 분할점령 전에 나왔어야 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지침이 없어 곧바로 실행하지도 못하고 미·소는 분할점령을 단행하였다. 그렇다면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당장 실행에 옮길 수 있을 정도의 구체적 안을 결정해야 했다. 그러나 단지 ‘5개년 이내 4개국 신탁통치안’을 미·소가 조선인·영·중과 협의하여 결정한다는 것 외에는 결정된 것이 없었다. 물론 이것이 제일 중요한 결정이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 구체적 지침 없이 실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공위가 열렸으나 국내의 반탁·모스크바결정 노선 대립과 미·소대립에 직면해 앞의 3단계 수순 중 1단계에서 전혀 나아가지 않았다는 것이 이 문서의 구속력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근거이다.
    가장 중요한 문제로서 미국과 소련은 신탁통치를 다르게 규정하고 있었다. 한 번도 실행된 적이 없었던 신탁통치를 미국은 불평등한 ‘지배’의 의미가 부각된 ‘정치훈련’의 의미로 받아들인 반면 소련은 평등한 ‘도와줌’의 의미가 부각된 ‘협력·원조’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기본적인 명칭 면에서도 탁치와 후견으로 다르게 표기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개념규정마저 일치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모든 번거로운 결정을 이후 개최될 공위에 떠넘겨버렸으니, 한국문제에 관한 한 아무것도 결정이 되지 않은 회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미·소협력이 공고하다면 결정이 유보된 문제의 해결을 기한다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간신히 합의된 결정이 미·소간의 불화에 의하여 실행되지도 못한 채 파기되고 마는 형세가 조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세계적 냉전 출현의 국지화에 또 한 가지 기여한 것이 반탁·모스크바결정 지지라는 국내 세력의 대립이었다.
    그렇다면 미·소가 왜 이렇게 명확한 것 하나 없이 비정상적인 합의에 도달하였는가에 대하여 거기에는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을 것이며 그에 의거하여 합리적인 판단을 하였을 것이다. 여기에서 그들의 숨겨진 의도를 규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두 가지 흥미 있는 추론을 하고자 한다.
    첫째 미·소 양국은 탁치의 실시가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 수립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속단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신탁통치는 우호적인 정부수립이라는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비구체적인 신탁통치안은 미국의 이익에 합치되는 동시에 소련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속셈을 충족하는 것이었다. 어느 한 쪽의 배타적 이익보장이 규정되지 않은 모호한 안이 신탁통치안이었다. 또한 그것이 위임통치처럼 식민지의 변형이 될지 아니면 소련의 주장처럼 독립의 지름길이 될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신탁통치안은 식민지의 혁명적 민주주의에 정면적으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온건하게 발산시키면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제국적·반식민주의적 정책이었다. 어떻게 보면 제1차 세계대전 후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의 패전국 식민지에 적용되었던 식민지 재분할을 위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안’을 미국의 이익에 맞게 변형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위임통치나 탁치는 모두 세력확보를 위한 제국주의 정책이라는 면에서는 다를 바 없지만 다음과 같은 점에서는 차별성이 있다. 문호개방적 탁치안은 식민지의 혁명적 기운을 의식하여 위임통치의 구식민주의적 특성을 신식민주의적으로 변화시켜 식민지 민중의 요구에도 타협하면서, 동시에 구식민세력(영국·프랑스·독일)을 견제, 구식민지적 방식을 통하지 않으므로, 따라서 구식민지가 무장력이 필요한 반면, 신탁통치는 별다른 무장력의 지출 없이 보다 넓은 지역을 확보하려는 방안이다.
    미국은 자본주의 국가의 상대적 우세를 보장하여 우호적 정부수립을 기도한 반면, 소련은 국내 정치세력을 끌어들여 우호적 정부수립을 기도하였다. 신탁통치는 형식적으로는 독립의 수단으로 소련에 의하여 규정되었으나, 이는 자신들의 숨은 의도를 은폐하기 위한 위장일 뿐이며, 실질적으로는 우호적 정부수립을 위한 수단 외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미·소 모두 독립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탁치는 형식 논리에서나 가능했으며, 실제로는 우호적인 정부 수립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탁치를 채택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미·소 모두 탁치를 통해 우호적 정부수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언제라도 가차 없이 파기시켜 다른 수단을 택할 가능성이 애초부터 있었다. 미·소가 서로 양보하여 타협하지 않는 한 ‘조선을 위한 통한안(統韓案)’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는데, 이후의 역사(1947년)에서 미국의 일방적 파기에 의하여 현실화되었다.
    둘째는 어느 한쪽도 그 실현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았으나, 지엽적(枝葉的)인 한국문제를 합의해주고 보다 중요한 중국·일본문제에서 많은 것을 얻거나 미·소 화해분위기를 먼저 해쳤다는 비난을 듣기 싫어 큰 고려 없이 합의했다는 설명이다. 만약 그렇다면 미·소는 각각 실현가능성 있는 대안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인데, 이것은 미·소 합의가 전제되지 않은 단독행동으로서의 ‘단정수립’(미국)과 ‘양군철퇴·즉시독립’(소련)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 역시 이후의 역사에서 그대로 실현되었다. 또한 미국의 경우 신탁통치안을 주도했던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가 1945년 4월 12일 미·소간의 공식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세상을 뜨고 이 문제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던 트루먼(Harry S. Truman)이 승계한 상태에서 정책결정을 주도하였던 국무부는 루스벨트의 신탁통치안을 무시하면서 신탁통치안과 모순되는 분할점령을 결정하였다.
    국무장관 번스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소협력을 위하여 탁치안을 받아들였지만 트루먼과 같이 자신의 아이디어도 아니었으므로 실현가능성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후부터 논의를 주도하게 된 국무부는 탁치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는 일관적인 행태를 보였다.
    첫째와 둘째 가설을 종합하면, 미·소 양국은 그 실현가능성을 높게 보지는 않았으나 신탁통치안이 실현된다면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수립을 가능케 할 것이라고 속단하여 별 다른 고려 없이 합의하였다는 설명이다. 다소 수사적으로 규정한다면 신탁통치안은 ‘동상이몽의 세력확보책’이었다. 신탁통치안의 결정과정부터 미·소는 그 실현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았지만 실현을 가로막고 미·소대립을 조장시킨 한 요인은 신탁통치안의 규정이 각자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을 정도로 애매모호하여 구속력을 갖지 못했던 점이다. 즉 동상이몽의 불확실성이 국내 정치세력의 좌우대립과 어우러져 신탁통치안의 폐기를 가중시킨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결과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의 한국문제에 관한 결정은 미·소간 타협의 산물이며, 어느 누구의 독단에 의하여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1945년 12월 16일 미국은 유엔 주도하의 4개국(미·영·중·소) 5년 내(5년 연장 가능) 신탁통치를 규정한 안을 제출하였지만 소련은 별다른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고, 대신 일본문제에 주의를 돌렸다. 18일과 19일 회합에서 소련은 미국의 양보를 얻어 일본점령에 참여할 수 있는 보장을 받았다. 이에 소련은 보다 타협적인 자세를 견지하여 중국문제에서 미국의 주장을 인정하였다. 이로써 전후 미·소의 협조는 최고조에 달한 것처럼 보였으며 냉전은 결코 시작되지 않을 것 같았다.
    한국문제에 대해 별다른 반응이 없던 소련은 12월 20일 이후 4개항으로 된 안을 제출하면서 유화적이고 능동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소련안은 ‘선 임시정부 수립, 후 후견’을 골자로 한 것으로써 ‘선탁치 후정부수립’을 규정한 미국안과는 상당 부분 다른 것이었다. 소련은 미국의 ‘신탁통치’라는 용어를 러시아어 Опёка(영어의 tutelage에 해당)로 번역하여 “조선인의 자주적 정부수립을 미·영·중·소가 원조한다”는 후견 제안으로 수정하였던 것이다. 소련은 미국안에 나타난 미·영·중·소의 참여가 자본주의 국가의 상대적 우세(3대 1)로 소련에 불리했기 때문에 조선인의 참여를 보장하여 우호적 정부수립을 기도하는 실리를 챙기기도 하고 조선인의 자주적 욕구를 반영하는 명분을 살려 일거양득을 얻으려 하였다. 그런데 미국은 소련의 속셈을 파악하지 못하였던지, 아니면 타협의 분위기를 무산시키지 않으려고 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 실현가능성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던지 소련안을 그대로 수용하는 양보를 단행하였다. 합의된 의정서는 약간의 문구수정만 빼고는 소련안과 거의 같았다. 따라서 모스크바결정 중 한국문제 조항은 당시에 조성된 한시적인 미·소 협조의 상징이었으나, 당사자 간 협조가 불가능하다면 그 문구가 해석상의 논란 없이 치밀하게 구성되지 않은 한 실현 가능성이 떨어질 여지가 있었다. 이러한 예측이 이후 역사에서 여지없이 실현되었던 것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의의 및 평가
    모스크바삼상회의에 대해 한반도의 신탁통치가 결정된 역사적 회의라고 기억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크게 두 가지의 과소평가와 왜곡이 있다.
    첫째는 모스크바삼상회의가 한국문제를 논의하려고 만난 회의라는 평가이다. 이 회의의 결과로서 1945년 12월 28일 오전 6시(모스크바 시간)에 발표된 코뮤니케(의정서)를 보면 한국에 관한 결정이 주변적인 문제 중의 하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모두 7개 부분으로 이루어진 의정서의 세 번째 항목이 한국에 관한 조항이며, 또한 한국문제는 토의과정에서 토론된 여섯 가지 의제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문제 처리를 위해 소집된 외상회의에서 한국문제는 주변적인 의제로 처리되었지만, 당시 한국인들이 한국문제를 모스크바 결정의 핵심이자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인식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두 번째 왜곡은 모스크바삼상회의의 한국문제에 관한 결정은 곧 신탁통치이며, 이 회의에서 미·소가 신탁통치 실시에 합의했다는 주장이다. 의정서를 면밀하게 검토해 보면 신탁통치라는 중요한 문제에 대한 합의를 단지 연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국에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일정 기간의 신탁통치에 관하여 협의한다는 것 외에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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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신탁통치안(韓國信託統治案)과 미소협상(美蘇協商)의 결렬(決裂)」(이호재,『한국외교정책의 이상과 현실: 해방8년 민족갈등기의 반성』제5판,법문사,1986)

    • 「탁치안(託治案)의 제의(提議)와 찬반탁(贊反託) 논쟁(論爭)」(송건호,『분단시대와 한국사회』,까치,1985)

    • 「朝鮮の解放·分斷と國內勢力」(大沼久夫,『朝鮮史硏究會論文集』 第2輯,1984)

    •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Liberation and the Emergence of Separate Regimes,1945~1947,vol. 1(Bruce Cumings,Princeton,N. J.: Princeton University Press,1981)

    • The Korean Trusteeship,1941·47: The United States,Russia,and the Cold War(William George Morris,Ph. D. Dissertation,The University of Texas at Austin,1974)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2009년)
    이완범(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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