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 태조 건원릉 신도비 ( )

구리 태조 건원릉 신도비
구리 태조 건원릉 신도비
서예
유적
문화재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조선전기 제1대 태조의 능인 건원릉에 세워진 신도비. 보물.
이칭
이칭
건원릉비(健元陵碑), 건원릉비석(健元陵碑石)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보물(2013년 07월 16일 지정)
소재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인창동)
내용 요약

구리 태조 건원릉 신도비는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조선 제1대 태조의 능인 건원릉에 세워진 신도비이다. 1409년에 조선 시대 왕릉에 최초로 건립된 것으로, 2013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비석 앞면에는 태조의 탁월한 무공과 정치력에 대해 서술한 권근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변계량이 지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 신도비는 화려하고 장엄한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과 용의 형상을 새긴 비석 머릿돌 양식을 갖추고 있다. 현존 왕릉 신도비 중 유일하게 건립 당시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어 조선 초기의 귀중한 유물로 평가된다.

정의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조선전기 제1대 태조의 능인 건원릉에 세워진 신도비. 보물.
개설

201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東九陵) 내에 위치한 건원릉 신도비는 1409년(태종 9) 4월에 건립되었다. 태종의 명을 받아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이 비문을 짓고 좌정승(左政丞) 성석린(成石璘)이 글씨를 썼으며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정구(鄭矩)가 전액(篆額)을 담당하였다. 비의 음기(陰記)는 예조좌참의(禮曹左參議) 변계량(卞季良)이 글을 지었고 역시 성석린이 글씨를 썼다. 총 높이 448㎝의 규모에 귀부이수(龜趺螭首) 양식을 갖추었다. 1691년(숙종 17)에 건립한 비각에 안치되어 있다.

역사적 변천

1408년 9월 건원릉을 조성하고 다음 해인 1409년 4월 능상(陵上) 아래 동남쪽 방향에 신도비를 세웠다. 1452년(문종 2) 풍수학자 문맹검(文孟儉)이 비각 층계의 섬돌인 계체(階砌)와 주변 배수로의 정비를 주청하였다. 비각이 훼손되자 숙종이 1690년 10월 비각의 건립을 지시하였고 1691년 헌릉신도비의 비각을 참고하여 완성하였다. 1764년(영조 40)과 1879년(고종 16) 정자각을 고치면서 비각도 함께 개수(改修)하였다. 그리고 1900년(광무 4) 신도비 옆에 능표석이 추가로 세워지면서 비각의 규모를 정면 4칸, 측면 3칸의 익공식 팔작지붕 건물로 확장하여 지금에 이른다.

내용

비신(碑身)의 앞면에는 권근이 지은 비문이 성석린의 단정한 해서체(楷書體)로 쓰여 있다. 비문에는 태조가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아 탁월한 무공(武功)과 정치력으로 백성들의 신망을 얻고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거쳐 조선을 개국한 후 왕위에 올라 선정을 펼친 전 과정이 개괄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비문의 첫 머리에 “유명(有明) 시강헌(諡康獻) 조선국태조(朝鮮國太祖)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 건원릉신도비명병서(健元陵神道碑銘幷序)”라 표기되어 있고 비신의 상단 중앙에 새긴 전액이 “태조건원릉비(太祖健元陵碑)”라 되어 있어 건원릉 신도비임을 알 수 있다. 비문 말미에 새겨진 “영락(永樂) 칠년(七年) 사월(四月) 일(日) 입석(立石)”이라는 연대를 통해 1409년(태종 9) 4월에 건립하였음을 파악할 수 있다.

신도비 비신의 뒷면에는 변계량이 짓고 성석린이 쓴 비음기가 새겨져 있다. 비음기에는 태종의 특명으로 51명의 개국공신을 비롯하여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태종을 도와 공을 세운 22명의 정사공신(定社功臣)과 1400년(태종 원년) 태종의 즉위에 공을 세운 43명의 좌명공신(佐命功臣) 등 총 116명의 공신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태조의 건원릉 신도비에 태종을 도와 공신이 된 인물들의 명단을 새긴 것은 태종의 왕위계승 정통성을 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비음기 말미에 성석린이 글씨를 썼을 때의 나이가 72세였다는 특이한 기록이 남아 있다. 태종은 글씨를 쓴 공로를 표창하고자 성석린에게 안마(鞍馬)를 하사하면서 칠십이 넘었음에도 필력이 매우 뛰어나니 후세 사람이 보면 크게 탄복할 것이라며 칭찬하였다고 한다.

특징

건원릉 신도비는 비석 양식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장엄한 귀부이수 양식을 갖추고 있다. 당대 최고의 공장(工匠)들이 참여하여 조각 수준도 매우 높고 사실적이다. 귀부이수 양식은 통일신라 때 중국 당나라를 통해 유입되어 우리나라에서 크게 유행한 양식이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된 경주 태종무열왕릉비가 대표적이다.

건원릉 신도비 이수는 태종무열왕릉비 이수 구도와 거의 동일하다. 용이 비신 상단을 입에 꽉 물고 승천하는 형상을 표현하였다. 태종무열왕릉비 이수가 좌우 각각 3마리씩 모두 6마리인 반면, 건원릉 신도비 이수는 좌우 각각 2마리씩 총 4마리인 점이 다를 뿐이다. 이수 가운데에 공간을 마련하여 비의 명칭을 전서(篆書)로 쓴 점 또한 두 비가 동일하다. 건원릉 신도비의 이수와 비신은 한 덩어리의 대리석을 다듬어 만들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귀부는 수많은 연잎이 거북이를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거북이 얼굴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어 친근감을 준다. 몸체를 두른 귀갑(龜甲) 밖에는 꼬리와 네 발이 나와 있고 귀갑 위에 마련된 비좌(碑座) 위로 비신이 세워져 있다. 귀부 아래에는 직사각형의 복련(覆蓮) 대좌(臺座)가 설치되어 더욱 위엄있게 보인다.

의의와 평가

건원릉 신도비는 조선시대 왕릉에 건립된 최초의 신도비다. 양식과 장식이 화려하고 장엄하여 이후 건립되는 왕릉 신도비와 사대부 신도비의 귀감이 되었다. 현존하는 왕릉 신도비 중에서 유일하게 건립 당시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어 조선 초기 왕릉제도와 석조 미술 연구의 귀중한 유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건원릉지(健元陵誌)』(1910)
『건원릉중수도감의궤(健元陵重修都監儀軌)』(1764)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Ⅰ』(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조선시대 능비의 건립과 어필비의 등장」(황정연, 『문화재』42-4, 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조선시대 능묘비에 관한 연구」(이민식, 한성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6)
집필자
이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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