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고분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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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서악동 고분군 북서쪽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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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유적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신라와 통일신라의 무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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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신라와 통일신라의 무덤군.
개설

경주에 소재한 고분들은 적게는 수 기(基)에서 많게는 수 십기 혹은 수 백기씩 무리를 형성하여 존재하는데, 이것을 통칭하여 경주고분군(慶州古墳群)이라고 한다. 고분군은 피장자들의 혈연관계로 형성되었으며, 묘지의 선택은 혈연집단(血緣集團)의 거주구역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고분군은 가족·씨족·종족 등 혈연집단의 공동묘지로 형성되었고, 묘지는 경주분지의 평야지대·산록지대 또는 하천의 근거리지대에 위치한다. 이러한 현상은 시대의 추이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경주고분군의 분포상은 내부 매장시설의 형식과도 관계가 있는데, 움무덤군[土壙墓群]·움널무덤군[木棺土壙墓群]·움덧널무덤군[土壙木槨墓群]·돌무지덧널무덤군[積石木槨墓群]·돌방무덤군[石室墳群]으로 구분된다.

내용

경주고분군의 의미는 신라의 건국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①『삼국사기(三國史記)』시조혁거세거서간조(始祖赫居世居西干條)에 “조선유민(朝鮮遺民)이 산골 사이에 나누어 살아 여섯 촌락(村落)을 이루었다”라는 기사와 ②『삼국사기』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14년조에 “고구려왕 무휼(無恤)이 낙랑(樂浪)을 습격하여 멸하니 그 나라 사람 오천(五千)이 투항해 와서 육부(六部)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즉 이 두 기사의 의미는 고조선의 유민과 낙랑(崔理의 樂浪國)의 내투인(來投人)들이 육촌(六村)과 육부의 촌락을 이루었고, 이들이 서나벌(斯盧國)의 기반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육촌과 육부에 살던 사람들이 자기들의 고향인 고조선과 낙랑의 묘제인 움무덤[土壙墓]·움널무덤[木棺土壙墓]·움덧널무덤[土壙木槨墓] 등을 경주에 전한 것으로 볼 수 있고, 그들의 근거로 남아 있는 것이 바로 경주시내에 남아 있는 고분군들의 전통이라고 보여진다.

신라고분의 매장시설은 움무덤→덧널무덤[(土壙)木槨墓]→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墓]→돌방무덤[石室墳] 등의 형식으로 변천되어 왔는데, 형식에 따라서 묘지를 달리 하기도 하고, 무리가 큰 고분군은 여러 형식의 고분이 혼재하기도 한다.

경주에 소재한 고분군으로는 움무덤을 주로 한 고분군에는 조양동(朝陽洞)고분군황성동(隍城洞)고분군사라리(舍羅里)고분군 등이 유명하다. 이들 움무덤군[土壙墓群]은 세형동검(細形銅劍)을 출토한 구정동·입실리·죽동리 등지의 움무덤들이 신라 움무덤의 조형(祖型)이 된다. 움무덤고분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조양동고분군에는 움널무덤와 움덧널무덤의 2종류가 있다. 움널무덤에는 I형묘: 토광(土壙)의 길이 2m, 너비 75cm, 깊이 2m이며 묘구(墓口) 평면은 장타원형을 하고 광벽에 1단을 만들고 좁혀 내려갔다. 후기무문토기(後期無文土器)가 출토되었다. Ⅱ형묘: 토광의 길이 2.5m∼3m, 너비 1∼1.5m, 깊이 1∼1.5m로 좁은 장방형이며, 후기무문토기 와질토기(瓦質土器), 약간의 청동기, 한경(漢鏡), 철기, 유리제장식옥 등이 출토되었다.I형묘는 후기무문토기의 연대인 B.C. 1세기 후반으로, Ⅱ형묘는 서한경(西漢鏡)과 종말기무문토기 등으로 A.D. 1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움덧널무덤인 Ⅲ형묘는 길이 4m, 너비 1.2m, 깊이 60cm 규모의 토광 안에 목곽(木槨)을 설치하였으며, 토광벽에 단이 있고, 다량의 철기와 와질토기가 출토되었다. 철촉(鐵鏃)의 형식으로 A.D. 3세기대로 추정되고 있다.

황성동고분군은 움덧널무덤이며 와질토기가 주로 출토되었다. 사라리고분군의 움덧널무덤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130호는 토광 길이 3.25m, 너비 2.25m, 깊이 90cm로 바닥 허리부분에 70cm 내외의 요갱(腰坑)이 파져 있고, 토광 안에 길이 2m, 너비 80cm의 목관을 안치하고, 목관 아래에 판상철부(板狀鐵斧) 61개를 깔았다. 다른 유물로는 세형동검, 청동파부철도(靑銅把部鐵刀), 청동팔찌, 청동가락지, 호형대구(虎形帶鉤), 방제경(倣製鏡), 유리구슬, 철검(鐵劍), 철부(鐵斧), 철겸(鐵鎌), 와질토기호(瓦質土器壺) 등 청동기·철기·와질토기류가 다수 출토되었다. 방제경·호형대구·와질토기 등의 연대는 A.D. 1세기 후반∼2세기 초로 추정되고 있다.

움덧널무덤을 주 형식으로 한 고분군에는 월성로고분군이 있다. 경주∼불국사 도로의 측구(側溝)에서 공사 중에 발견되었다. 가-29호분은 토광의 길이 38cm, 너비80cm로 많이 파괴 되었으나 꺽쇠가 발견되어 덧널무덤임을 알 수 있고, 화로형토기(火爐形土器), 돌팔찌(石釧), 곡옥(曲玉), 철정(鐵鋌), 대도(大刀), 찰갑(札甲), 단갑(短甲) 등이 출토되었다. 무덤의 연대는 A.D. 4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는데, 돌팔찌를 왜(倭)계 유물이라 하여 왜와의 교류를 상정하고 있다.

움덧널무덤의 형식만을 주류로 한 고분군은 드물고, 조양동고분군처럼 움널무덤과 혼재되어 있거나, 월성로고분군처럼 돌무지덧널무덤과 혼재되어 있다.

돌무지덧널무덤 형식을 주류로 한 고분군은 황오동고분군·황남동고분군·노서동고분군·노동동고분군 등 경주시내 분지 중심지에 크게 밀집되어 있다. 사실상 신라 전기(前期) 고분군을 대표하는 고분군이라고 할 수 있다. 돌무지덧널무덤은 1분1곽식(一墳一槨式)과 1분다곽식(一墳多槨式)의 두 종류가 있다. 대형에 속하는 분구(墳丘)는 내부구조가 묘단(墓壇) 위에 덧널을 설치하고 그 위에 냇돌(川原石)로 적석부(積石部)를 쌓고, 다시 그 위에 봉토를 올리기 때문에, 지하에 광(壙)을 파고 매장시설을 축조하는 무덤보다 자연히 분구가 커지는 것이다. 또 2기의 분구가 연결된 쌍분(雙墳) 또는 표형분(瓢形墳)이 있는데, 이런 쌍분은 1분구1곽(一墳丘一槨)의 원칙에 대한 예외로 별개의 분구를 연결하여 가족 합장(合葬)의 목적을 이루기도 한다. 중형에 속하는 돌무지덧널무덤은 지하에 토광을 파고, 그 안에 덧널를 설치하고 관에 시체를 넣어 매장한다. 중형에 속하는 돌무지덧널무덤에는 다곽식(多槨式)이라 하여 한 분구 안에 여러 기의 곽(槨)을 축조하여, 그 수효대로 시체를 매장하는 다장(多葬)도 있다. 다곽식의 경우는 곽 1기를 추가할 때마다 분구를 열고 추가장(追加葬)한 후 봉토를 더해 최종적으로 큰 분구를 형성한다.

모든 분구에는 분구자락에 돌담식의 호석(護石)이 돌려져 있다. 호석의 재료는 견치돌을 주로 사용하는데, 호석의 높이는 대형분의 경우 1∼2m, 소형분구의 경우는 1단으로 된 1m 미만도 있다.

돌무지덧널무덤의 장식(葬式)은 시체를 바로뉘워묻기[앙와신전직지장(仰臥身展直肢葬)]를 원칙으로 하고, 왕릉(王陵) 등 대형의 고분에서는 덧널의 천정에 출입구를 만들고 곽 안에 목관과 껴묻거리를 수하식(垂下式)으로 격납한다. 또 중형·소형의 분구를 가진 무덤은 지하에 토광을 파고 그 안에 덧널을 설치한다.

돌무지덧널무덤은 껴묻거리를 가장 많이 넣는 무덤 형식이다. 주곽(主槨)에는 시체와 함께 중요한 껴묻거리를 넣고, 다시 돌과 흙으로 만든 별도의 곽에 껴묻거리만을 넣는 곽이 있는데, 이것을 부곽(副槨)이라고 한다. 부곽의 양상에는 주곽의 머리맡이나 발치께(直列式) 또는 주곽의 옆(竝列式)에 배치하는 두 방식이 있다.

껴묻거리에는 금관(金冠)·은관(銀冠)·금동관(金銅冠) 같은 관모류(冠帽類)를 비롯하여 귀거리·목거리·팔찌·가락지, 금제·은제·금동제의 허리띠장식, 금동제 신발 등 장신구(裝身具)가 골고루 갖추어져 있고, 철제대도(鐵製大刀)·마구류(馬具類)·토기류 등과 솥·낫·금속기기 등 다양한 유물을 대량으로 부장한다.

돌무지덧널무덤은 6세기에 이르면 돌방무덤으로 대체되어 사라지는데, 이 형식의 무덤은 오직 신라의 전기에만 축조된 톡특한 무덤형식이다. 이 형식의 기원에 관하여는 ①신라금관과 함께 남부 시베리아의 목곽분에서 왔다는 설과 ②세형동검을 출토하는 움덧널무덤의 덧널 요소와 고구려의 돌무지(積石塚) 요소가 결합하여 형성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남부 시베리아의 목곽묘의 분구는 대부분 봉토로 이루어지고, 분구 지름 30m, 높이 1m 또는 분구 지름 80∼100m, 높이 1.5m 정도로 낮은 분구가 대분이다. 분구의 적석부라는 것도 봉토 표면에 얇은 두께로 올라가 적석이라기보다는 즙석(葺石) 정도의 돌 덮개층으로 볼 수 있다. 또 내부 매장시설은 토광을 6∼7m 정도 깊이 파고 시체 위에 두꺼운 원목층을 2∼3m 정도로 높게 쌓는 형식이기 때문에 목곽 위에 적석이 높게 올라가는 경주의 돌무지덧널무덤 형식과는 큰 차이가 있다. 축조 연대도 경주의 것이 남부 시베리아의 목곽묘보다 약 1,000년 이상 늦으므로 그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돌무지덧널무덤의 연대는 A.D. 3세기까지도 올려볼 수 있는데, 입실리에서 가까운 중산리에서 조사된 일이 있다.

돌무지덧널무덤의 후속으로 출현한 형식은 돌방무덤이다. 돌방무덤의 고분군은 경주분지의 변두리 낮은 산의 산록에 다수 분포되어 있다. 동천동고분군·서악동고분군·충효동고분군·방내리고분군과 남천변의 왕릉군(王陵群) 등 다수가 분포되어 있다.

돌방무덤은 출입구가 한 쪽 벽에 설치되어 개폐할 수 있고, 내부 매장시설의 방이 넓어서 2인 이상을 합장할 수 있는 무덤형식이다. 이 형식에는 앞트기식(橫口式)과 굴식(橫穴式)의 두 종류가 있는데, 출현 순서는 전자(앞트기식)가 먼저 출현하였다. 전자는 한 쪽벽에 출입할 수 있는 구멍을 마련하고 출입 후 최종으로 퇴실하고 벽과 똑같이 돌을 쌓아서 막는다. 후자(굴식)는 한 쪽벽에 출입할 수 있는 구멍을 내고 거기에 굴식으로 통로[선도(羨道)]를 만들어 붙이고 그 굴을 통하여 내부로 출입하게 되어 있다. 돌방의 평면은 장방형과 방형의 두 종류가 있는데, 장방형이 먼저이고 방형이 뒤에 출현하였다. 장방형의 경우는 천정을 양쪽 긴 벽 위에서 안으로 좁혀 곡면을 만들고 짧은 벽의 위는 수직으로 올리거나 경사면을 약간 두고, 천정은 수개의 판상석[蓋石]을 5∼7개를 덮어 마무리 하였다. 방형의 경우는 천정을 4면벽에서 같은 경사로 좁혀서 둥근 곡면을 만들고 최종적으로 2∼3개의 판상석을 덮어서 마무리 하였다. 바닥은 돌과 흙을 혼합하여 약간 높게 하여 관대(棺臺) 또는 시상대(屍床臺)를 마련하였다. 돌방의 바닥은 지하로 약간 내려 간 것(半地下式)과 완전히 지면 위로 올라 온 것(地上式)으로 구분된다.

서악동고분군은 경주분지의 돌무지덧널무덤을 벗어나 최초로 정착한 고분군으로 추측된다. 내부 매장주체 시설의 형식은 초기의 돌방무덤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발굴조사된 적이 없어서 확언할 수는 없다.

충효동돌방무덤군은 분구가 작아지고, 내부 돌방도 면적이 좁고 방형이며, 천정은 돔식[穹窿狀]으로 되고, 굴식 통로가 좀 더 길어진 형식인데, 대개 굴은 남쪽벽의 중간(中央式)이나 한쪽으로 치우쳐서(偏在式) 부설되었고, 당(唐)나라 돌방무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남천의 북쪽 낮은 언덕 위에는 배반동부터 입실리까지 수기의 전왕릉(傳王陵)이 분포되어 있다. 시대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내부구조 형식은 충효동식의 돌방형식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왕릉의 특징은 분구가 작아지고 분구자락에 병풍석(屛風石)이 돌려져 있고, 그 곳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양각(陽刻)하고, 릉 앞에 상석(床石)·석인상(石人像)·석수상(石獸像) 등과 비석이 설치되어 있다. 석물제도(石物制度)를 제일 먼저 갖춘 릉은 전김유신묘(傳金庾信墓)이며, 다음이 전성덕왕릉(傳聖德王陵)·괘릉(掛陵)·전경덕왕릉(傳景德王陵) 등의 순서이다. 왕릉은 비록 규모는 작으나 십이지신상을 조각한 병풍석을 돌린 형식은 당과의 국제관계 제약으로 팽창한 국력을 압축한 현상이라고 이해하는데, 동양에서 신라에만 있는 특징적 형식이다. 그리고 불교의 보급으로 화장(火葬)이 유행하고, 왕릉 중에도 화장돌방무덤(火葬石室墳)이 상당수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방내리고분군은 언덕의 사면과 대지성 평지에 소재하는데, 규모가 작은 돌무지덧널무덤과 돌방무덤이 혼재하는 고분군으로 수 백기에 이른다.

냉수리고분에는 전실(前室)·측실(側室)·후실(後室) 등이 갖추어진 거대한 돌방무덤도 발견되었는데, 고구려의 돌방무덤의 특징을 갖고 있다.

신라의 돌방무덤은 동한(東漢)시대의 돌방무덤이 고구려의 압록강 유역과 대동강 유역지방 및 한강 유역을 거쳐서 남하해서 경주에 정착하여 퍼진 것이고, 통일신라기에는 당과 교섭이 활발해 지면서 당식(唐式)의 돌방무덤형식이 경주로 직접 들어와 정착되었다. 통일신라의 돌방무덤형식은 이후 고려로 전해져서 성행하였다.

참고문헌

『경주조양동유적(慶州朝陽洞遺蹟)』I·Ⅱ·Ⅲ, (국립경주박물관, 2000)
『한반도(韓半島)의 고분(古墳)』(강인구, 아르케, 2000)
『한국고고학개설(韓國考古學槪說)』 제3판(第三版)(김원룡, 일지사, 1986)
『朝鮮古代の墓制』(梅原末治, 國書刊行會,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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