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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출토 금제 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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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대(布帶) 또는 혁대(革帶) 표면에 띠돈[銙板, 飾板]을 붙인 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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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포대(布帶) 또는 혁대(革帶) 표면에 띠돈[銙板, 飾板]을 붙인 띠.
내용

띠돈의 소재에 따라 옥대(玉帶)·서대(犀帶)·금대·은대·석대(石帶)·각대 등으로 불린다. 과대는 포대를 모체로 하여 계급분화과정에서 권력과 부의 상징으로 발생하였다.

즉, 옷을 여미고 몸을 보호하는 구실에서 지배계급의 권력과 부를 상징하는 장신구로 변천된 것이다. 초기의 과대는 금판을 오린 약한 것이었고, 그 양식이 매우 복잡하여 실용적이기보다는 의식용이거나 주술적 의미를 지닌 상징물로 쓰였던 것 같다.

삼국시대의 과대는 백제의 품관제(品官制)와 신라의 복식금제령(服飾禁制令)에서 보면 신분상의 등급에 따라 과(銙)의 재료·색·수를 달리하여 등급표시의 상징으로 쓰였으며, 남녀·고하(高下)가 모두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과대는 고분출토품으로 살펴볼 수 있는데, 그 형태가 신라·백제·가야의 것이 비슷하여 이들간에 문화적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출토품을 중심으로 그 형태와 제작방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심엽형과판간치형(心葉形銙板間置形) : 금속제 심엽형 외팽(外膨)이 있는 약 10여개의 과를 혁대 또는 포대 위에 간격을 두어 못으로 박은 것이다.

각 과에는 둥근 환(環)을 붙여 정첩장식으로 드리우고 한 끝에는 교구(鉸具)를 붙였다. 창녕·양산 부부총(夫婦塚), 경주 보문리금관총(金冠塚) 등에서 출토된 과대가 이에 해당한다.

② 타원형과판연치형(楕圓形銙板連置形) : 타원형 주과(主銙)를 보다 작은 타원형 과로 각각 연결한 것이다. 한 끝에는 환두형(鐶頭形) 교구가 달려 있고, 다른 끝에는 혁대에 붙였던 칠화형(七花形) 금구(金具)가 달려 있다.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이 있다.

③ 방형과판연치형(方形銙板連置形) : 방형 얇은 판에 좌우대칭으로 당초문을 투조한 과판 30∼45개를 혁대 또는 포대 위에 연결하여 못으로 박은 것이다.

각 과의 밑에는 심엽형 수하부(垂下部)가 달려 있으며, 그 밑으로는 각종 요패(腰佩)가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당시의 과대 중 가장 대표적인 형태로 금관총·양산부부총·서봉총(瑞鳳塚)·천마총(天馬塚)·경주황남동 제98호 북분 및 남분 등에서 출토된 것이 있다.

요패는 고대인들이 대에 물건을 달고 다니던 습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실용성은 없으며 그 수식은 매우 다양하다. 수식은 착용자에 따라 형태와 배치순서를 달리하였으며, 활동을 위하여 몸 뒤편에는 달지 않고 양옆에만 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요패는 일반적으로 방형판에 타원형판을 5, 6개 연결시킨 것을 근간으로 하여 그 밑에 수식을 달았다. 수식은 대형요패, 숫돌을 장식화한 것으로 보이는 장방형판과 지석형(砥石形)·곡옥·어형(魚形)·조형(鳥形)·족집게형·투조규형(透彫圭形)·가지형·연필형(鉛筆形) 등이 있다.

신라 흥덕왕 9년(834)에 내린 복식금제(服飾禁制)에 진골대등(眞骨大等)은 연문백옥(硏文白玉)을 금하였다. 육두품(六頭品)은 오서(烏犀)와 유(鍮)·철(鐵)·동(銅), 오두품은 철·은을, 사두품은 철·동을, 평인은 동·철을 하게 하였는데, 이는 과대였다고 생각된다.

고려시대 과대의 계급표시 구실이 이전보다 강화되었고 그 종류도 좀더 세분화되었다. 따라서, 각 계급에 따라 옥(玉)·서(犀)·금·은·동·철·각(角) 등 재료의 차이가 있었으며, 착용은 법으로 엄격히 정하여졌다.

옥대는 왕의 예복에 착용한 것으로, 중국황제의 진공품으로 쓰이거나 제사 지낼 때 진전(眞殿)에 바친 매우 귀한 것이었다. 이것은 중국의 황제가 왕에게 사여(賜與)하기도 하였으며, 왕이 국가공신에게 하사하기도 하였다.

서대는 물소뿔로 만든 대로서 중국에서 수입하였다. 주로 왕이 상복(常服)에 착용하였는데 서와 함께 사용하는 재료에 따라서도 차등이 있었으며, 착용계급도 수시로 변하였다.

금대도 역시 귀한 대로서 왕과 중국황제가 서로 주고받았으며, 왕이 정3품 이상으로 특진시킨 사람이나 국가공신·중국사신 등에게 하사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과대의 유물은 모두 파편뿐이나 안동 태사묘(太師廟)의 유물에서 그 완형을 엿볼 수 있다. 이는 포대 위에 혁대를 붙인 뒤 그 위에 다시 화문이 양각된 장방형의 과를 연결하여 붙인 것이다.

고려의 과대는 그 형태에 따라 야자대형(也字帶形)과 각대형(角帶形)으로 구분되는데, 길이는 착용자에 따라 다르다. 현존 유물로 볼 때 과의 폭은 4∼6㎝이고 두께는 1㎝ 내외이다.

과에는 양각·음각·타출(打出)·투조 등의 기법을 이용한 연화문·용문·점선운문·동자수금·당초문·노안문·쌍조문·국화문·뇌문·강대문·유운문·이화문·파장문·공작문·모란문·석류문·인물문 등의 문양을 나타내었다.

이상의 형태는 그대로 조선으로 이어져 조선시대의 야자대와 각대의 모체가 되었다.

조선시대의 과대 종류는 고려시대와 비슷하여 왕의 조복과 상복에 착용한 옥대·서대 및 서대의 일종으로 황색의 서각에 적색의 학정문이 있는 학정대(鶴頂帶)가 있었다.

또한 금대, 과에 여지를 조각한 여지금대(荔枝金帶), 은대가 있었고, 관복에 착용하는 한편 국휼복(國恤服)에 착용한 오서대·백포대·흑각대가 있었으며, 왕세손의 대로 쓰인 수정대 등이 있었다. 왕은 백관의 청정(靑鞓)과 구분하여 홍정을 사용하였다.

같은 종류의 대라도 문양의 유무에 따라 삽금대·소금대·삽은대·소은대로 구분하여 착용계급을 달리하였다. 특히, 각대형은 당시의 관복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것으로, 혁대 위의 앞에는 심엽형의 과를 떨어뜨려 붙이고 뒤에는 장방형의 과를 연결하여 붙였다.

교구는 과대의 한 끝에 달린 얇은 구리판을 두겹으로 접어 뾰족한 끝을 다른 쪽에 끼워 넣은 것이다. 이것은 고려 각대의 과가 다양한 형태인 데 반하여 일정한 심엽형의 과만을 나타낸 것으로, 고려의 각대가 조선에 이르러 일정한 형식으로 고착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한국복식사연구』(유희경,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80)
「한국과대의 역사적연구」(안명숙, 이화여자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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