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 ()

훈민정음언해
훈민정음언해
고려시대사
개념
전통적인 한국의 어문학, 역사학, 철학, 농학, 법학 및 한국학 전체를 뜻하는 학술용어.
정의
전통적인 한국의 어문학, 역사학, 철학, 농학, 법학 및 한국학 전체를 뜻하는 학술용어.
개설

현대의 한국에 관한 학문을 포괄할 경우 한국학이라 할 수 있으나 이를 국학이라고 칭할 수 없다는 점은 국학과 한국학의 차이를 보여준다.

국학이란 용어는 19세기 후반에 밀어닥친 외세의 충격적인 자극에 대응하여, 중국문화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강력해지면서 일어난 중국 국학과 18세기 후반 고대 일본의 순수한 이상을 추구하고자 노력한 국수적 시야의 일본 국학이 등장하며, 1930년대부터 조선학 또는 국학이란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국학은 한국학과 다르다고 할 수 없으므로 한국학으로 칭해져야 할 것이다. 한국학을 국학이라 칭할 때에는 19세기 이후 서양의 외래 문화 수용에 대한 이전의 전통적인 문물제도와 학술을 칭했다.

즉, 국학은 우리의 전통적인 정치·사회·경제·철학·역사·어문·과학·지리·풍속 등 모든 분야의 학문을 지칭한다. 그러나 국학이 폐쇄적인 학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을 국한시키는 개념은 타당하지 않다.

국학은 우리의 말·글·역사·문화가 중심이 되어 형성되는 한국적인 모든 학문을 의미하며, 한국의 전통적인 문화양상과 이 문화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일체의 사상체계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국학의 개념형성과 그 정신

한국에서 국학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그 개념이 정립된 것은 1930년대의 일이다. 일제의 침략과 통치기를 지나면서 한국적인 것이 말살되어갈 위기에 처하자, 일부 학자들이 한국적인 것을 되찾아 이를 살려나가고자 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당시는 국권을 상실한 때였으므로, 한국의 칭호로서 ‘조선’이란 용어가 사용되었고, 국학은 ‘조선학’이라고 칭하였다.

국학은 한말부터 광복 무렵까지 한국 사람들에 의하여 애국적인 목적을 가지고 연구되었다. 그 연구자들은 현실비판에서 민족사의 바른 이해를 꾀하였고, 민족 역사 속에서 한국의 빛을 다시 발견하고자 노력하였는가 하면, 말과 글을 선양, 발전시켜서 한국의 얼을 고취시키려고 하였다.

이러한 학자로 박은식(朴殷植)·장지연(張志淵)·신채호(申采浩)·정인보(鄭寅普) 등이 있었다. 특히, 정인보는 국학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던 사람이었다.

정인보의 국학관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중국적인 국학과 일본적인 국학의 요소가 다분히 복합되면서도, 일제강점기의 한국적인 정신적 지주로서의 강한 사상체계로 굳어진 것이다.

광복 후 국학대학을 창설한 것도 이러한 정신에서 나왔다. 따라서 해방 전후의 국학의 정신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띄었다.

첫째, 국학은 한국인의 자주적인 정신을 강조하였다. 즉, 국학의 정신은 이전의 중국문화를 숭상하여 자기문화를 비하하던 태도에서 벗어나고,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생긴 문화적 자기상실감에서 벗어난 강한 민족적인 자기인식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동아시아문화권에서 차지하는 한국 문화의 위치와 성격을 정당하게 정립하려 하였다.

둘째, 국학은 한국인의 새로운 가치관을 모색하고 설정하여 하였다. 이는 한국적인 고전이나 중국과 일본의 관계 문헌을 통해서 한국적인 것을 새롭게 이해하려 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의 문화가치를 새롭게 정립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한국의 특징적인 문화상을 부각시켰고, 한국의 문화적 전통은 계승할 가치가 있으며 또한 이를 계승하여야 한다는 가치관을 정립하였다.

셋째, 현실의 비판과 저항정신이었다. 오랫동안 지속된 사대적이고 특권 신분층을 위한 체제와 이를 긍정적으로 옹호해온 의식은 민족사의 바른 전진을 저해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여기서 민족사의 발전에 저해 요소가 되어온 것을 비판함과 동시에,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해서도 저항하여야 한다는 의식을 강조하였다.

국학의 연원

오랜 전통문화를 지속적으로 누려온 중국에서는 경학·사학·제자학·문학을 포함하는 모든 중국적인 것을 그들 국학의 범주로 삼고, 그 상한도 선진시대(先秦時代)까지 소급시키고 있으며, 일본에서도 자기들 나름의 국가 형성 초기부터의 일본적인 요소를 정신으로 삼고, 이를 추구하는 것을 국학이라 규정하고 있다. 따라 우리 나라에서의 국학은 한자의 전래로 인하여 우리 나라의 역사와 신화를 기록한 삼국시대로 설정할 수 있다.

그러나 국학의 연구의 대상은 우리 민족이 한반도와 만주지역에 거주하면서 독자적인 생활권과 문화권을 이룩한 구석기 이래부터 현재까지라고 할 수 있다.

국학발전의 단계

국학의 제1단계 : 고대

우리 나라에 한자가 수용되어 문자생활이 시작된 것은 기원전 2세기경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국가에서 한문으로 역사를 기록하면서 국학은 태동하였다고 할 수 있다.

즉, 4세기경에 고구려에서 교육제도가 마련되고 역사가 편찬되어 우리 나라 문화와 국가에 대한 자긍의식을 보여준 최초의 역사기록인 고구려의 ≪유기 留記≫, 백제의 ≪서기 書記≫ 편찬, 6세기경 신라의 ≪국사 國史≫의 편찬이 국학의 태동기라고 할 수 있다.

신라에서 한자를 우리말과 음으로 표기하는 이두의 방식이 개발된 것은 국학의 형성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7세기 김대문의 여러 저술, 향가의 출현, 자장 원효의 불교사상 등은 한국적인 불교사상으로 정립되어 왕조국가의 유지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고대인의 삶의 모습과 문화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금석문이 제작되고, 각종 고분 등이 그 연구대상이 된다.

한국에 불교가 전래되어 건축과 조각, 회화, 음악, 무용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불경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서 목판의 인쇄문화가 발전하였고, 구법승 등의 잦은 교류는 선진문화의 수용에 기여하였다.

유교경전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오경박사제도가 백제에 두어졌다는 점을 통하여 삼국의 유교문화의 보급을 이해할 수 있다.

신라의 경덕왕 때에 전국의 군현제도를 한문식으로 교체함으로서 그때까지 불러오던 고유한 지명이 한자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설총이 한문을 음과 훈으로 읽는 방식을 마련한 것으로 보아 우리 방식의 독특한 한문해독방식에 구결(口訣:한문의 글 뜻을 정확히 하거나 읽기 쉽게 하기 위해 한문 중간 중간에 끼워 넣는 우리말 요소)을 사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중국 당나라 문화가 견당유학생, 상인의 왕래, 고승의 왕래를 통하여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우리의 음악을 향악이라 지칭하였다.

신라 말에는 불교계에서는 새로운 선종이 도입되어 새로운 종교운동이 일어났으며, 지방에 사찰이 건립되어 새로운 지방문화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국학의 제2단계 : 고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에 고려 국초에 새로이 편찬된 삼국사는 삼국의 역사를 우리 나라의 역사로 통합하여 인식함에 기여하였고, 사관(史館)이 설치되어 역대 각 왕의 실록을 편찬함으로써 민족문화의 기록을 상세히 남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12세기 중엽의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중세적인 유교문화의 역사관에서 고대사가 재해석되고 정리되었다.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받은 13세기 말 일연이 ≪삼국유사≫를 썼다. 이 책은 불교 신앙을 위해서 쓰여진 책이지만 ≪삼국사기≫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단군조선으로부터 신라 말까지의 역사와 신화, 민속, 불교신앙을 상세히 전해주고 있는 민족지이다.

이와 거의 같은 때에 편찬된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는 우리 나라가 영역적으로 중국과 구분되는 지역임과 동시에 독자적인 역사를 가져왔음을 강조하는 인식을 보여주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호국적인 목적으로 불교의 대장경이 판각되었다. 이는 불교문화의 총결집이라 할 수 있다. 대장경을 조판함으로서 목판인쇄문화가 발전하였고, 금속활자가 발명되어 인쇄술의 발전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원나라를 통하여 중국문화가 대량으로 수용됨으로써 문화적 발전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고, 송나라의 주자학이 수용되어 새로운 유교철학이 수용되었다.

국학의 제3단계 : 조선 전기

조선 초기 세종 때의 한글창제와 이후 15세기 들어 국학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한글 창제로 인하여 우리말을 정확히 기록할 수 있게 되었으며 세종은 새로이 만든 한글로 ≪용비어천가≫를 지어 경학과 역사학, 문학이 한데 어울려진 영웅서사시를 창작해냈다.

석가여래의 일대기인 ≪월인천강지곡≫을 지었고, 세조 때에는 ≪석보상절≫을 지어 출간하는 문화적 업적을 이루었다. 또한 ≪동국정운≫이 만들어져 한자를 우리 식으로 읽는 방법을 구축하였다.

우리 나름의 문자를 창제하였다고 하는 일은 민족의 자존과 자각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15세기에는 중국문화에 비견될 수 있는 우리 나라 문화를 체계적으로 편찬하였으니, ≪경국대전≫,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농사직설≫, ≪향약집성방≫, ≪동문선≫, ≪국조오례의≫ 편찬 등이 그것이다. 이는 당시 학문의 최고 수준의 방식으로 종래의 학문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문화적 업적이었다.

조선왕조는 건국하면서부터 주자학을 통치이념으로 정립하면서 불교문화가 쇠퇴하고 사상적으로 편협해지는 경향이 농후하였다. 그러나 지방에 근거를 둔 양반문화는 국학의 기반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조선 초기의 주자학은 통치제도 정립의 정신적 지주와 통치이념으로 작용하여 예제(禮制:상례에 관한 제도)의 성립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16세기에는 지방 학자들에 의하여 성리학의 본체론적 연구를 심화시켰다. 이들 학자들의 성리학 연구는 현실문제를 외면하였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으나 도덕적 지성인을 배출한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국학의 제4단계 : 조선 후기

16세기 말 임진왜란과 17세기 전반기의 청나라에 의한 중국왕조의 교체는 우리 나라에 대단히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 침입의 충격은 현실 정치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왜란이 경국대전이 제정된 이후 새로이 변화된 사회와 경제 문제를 크게 증폭시켜 전후의 복구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이 모색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전세제도의 개혁, 대동법의 실시, 모병제에 의한 5군영제로의 변화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실을 구제하기 위한 방책을 개인 학자들이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유형원의 ≪반계수록≫, 이익의 ≪성호사설≫, 정약용의 ≪경세유표≫ 등 소위 실학자들의 개혁안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들 실학자들의 개혁안에서는 ≪경국대전≫의 체제를 비판하고 현실에 실현되어야 할 대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서양학문이 ‘서학’이란 이름으로 중국의 번역서를 통하여 들어왔다.

조선 건국에 있어서 조선의 정치이념과 새로운 시대를 개진하는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왔던 주자학이 형이상학적인 편향성에 의해서 그 본래의 정치이념과 그 뜻을 달리하자, 주자학에 대한 발전적인 수정을 감행하는 기운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사상적인 기운의 일각에서 양명학의 수용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양명학의 지행합일(知行合一:왕양명의 지(知)와 행(行)을 함께 가야 한다는 설)은 주자학의 선지후행(先知後行:먼저 이(理)를 알고 난 뒤에 비로소 행(行)해야 한다는 주자의 학설)에 비해서 절실한 시대적 요청이기도 하였다.

서학의 전래로 인하여 중국중심적 세계관에서 탈피하여 자국중심적 새로운 세계관의 정립이 일어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 나라에서의 국학은 조선 후기, 이른바 실학파 학자들의 현실적·실용적·합리적·실증적·비판적인 성격을 띄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실학파 학자들에 의한 정신형성은 당시 선각적인 학자들의 새로운 학풍이었을 뿐만 아니라, 서민계층의 각성과 자각에도 나타나게 되었다.

이 시기 국학의 성격은 제3기의 국학이 관료중심에서 개인학자 중심으로 바뀐 점과 학문의 전문화가 이루어진 점, 국민의 현실문제를 해결하려 한 점등의 특색을 가진다.

18세기를 정점으로 발달한 조선 후기의 국학은 경세치용(經世致用:학문은 실사회에 이바지되어야 한다는 유교상의 주장)·이용후생(利用厚生:국민이 사용하는 기구 등을 편리하게 하고, 의식을 풍부하게 하며, 생계에 부족함이 없도록 함)·실사구시(實事求是: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하는 일)를 기치로 해서 전개되었다.

이익을 종주로 하는 경세치용은 근기지방의 농촌 환경에서 학문의 목적을 토지제도 및 제도사 등의 현실문제에 관심을 두면서 발달하였고, 박지원 계통의 이용후생은 서울의 도시적 분위기 속에서 상업과 수공업의 유통 및 기술면의 혁신을 강조하면서 전개되었으며, 김정희를 시작으로 하는 실사구시는 현실개혁과 비판정신이 곁들인 것으로 고증적 학문방법을 취했다.

이러한 각 유파는 정약용에 이르러 일단 집대성되지만, 이에 해당되는 학자와 사상가들은 남인계열의 학자들과 소수의 소론·노론계의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당시의 우리 현실을 역사적으로 파악하여 조선 후기의 모순과 부조리를 직시하고 아울러 국사의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아서 보다 실증적 사실의 규명을 꾀함과 동시에 국사의 체계화·계통화를 시도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역사연구가 복고적으로 추진되고 객관적인 고증사학이 발달하였다. 한편으로 당시의 지배사상이었던 성리학의 역사인식이 정통론을 강조하는 경향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발해에 대한 관심, 나아가서 만주에 대한 향수 어린 관심이 고조되기도 하였다.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 海東繹史≫와 같은 역사서가 나오게 되었고 역사뿐만 아니라 말과 글에 대해서도 비상한 관심이 경주되었다. 최석정(崔錫鼎)의 ≪경세훈민정음도설 經世訓民正音圖說≫, 신경준(申景濬)의 ≪훈민정음운해 訓民正音韻解≫, 유희(柳僖)의 ≪언문지 諺文志≫ 등은 이른바 한글 연구의 이정표적 저술들이었다.

이 밖에도 국학은 여러 방면으로 분화되어 발달하였다. 학문이 될 수 있는 것은 분과별로 개발되었다. 경학에서는 윤휴(尹鑴)가 ≪중용설 中庸說≫에서, 박세당(朴世堂)은 ≪사변록 思辨錄≫에서 신성불가침의 주자의 경서 해석에 이설을 제기하였고, 정제두(鄭齊斗)로 대표되는 양명학의 사상체계가 형성되었다.

시문에서도 박지원으로 대표되는 기발한 문인들에 의해서 종래의 도문일체(道文一體)의 전통을 벗어나는 순수한 문예적인 문체가 시도되었는가 하면, 시의 세계에서는 사회시가 주목을 끌었다.

그리고 미술에서의 진경산수화라는 우리 나라의 산수를 사실대로 그리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신윤복과 김홍도의 풍속도가 새롭게 등장하였으며, 음악에서는 양반사회를 풍자하는 판소리가 서민문화로 새롭게 발전하였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지도를 정확하게 그리는 정상기의 ≪8도지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청구도≫가 그려졌으며 우리 나라의 농법을 연구한 홍만선의 ≪산림경제≫, 서유구의 ≪임원16지≫ 등이 정리되어 농법의 발전을 가져왔다.

그리고 역산·기술학·금석·전기에서도 종래의 학문의 수준과 관심에 비해서 장족의 발전을 보였다. 이와 같은 수준과 범위는 여러 전문학자의 저술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당시 국가적 사업으로 이룩된 ≪동국문헌비고≫에 수렴되었다.

당시 국학의 공통적인 경향은 첫째, 현실의 역사적인 인식이었다. 조선 후기 현실의 재편성을 위한 구조적인 수정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현실을 역사 속에 투영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모든 학문의 입각점과 연구의 안목을 우리 나라 중심으로 삼는 것이었다.

둘째, 국학에 관심을 가진 것은 대부분 불우한 환경에 있던 학자들이었다. 정계에서 소외되었거나 중인·서얼·출신 같은 사람도 있었다. 셋째, 국학의 업적이 당시만 해도 이론적인 면, 또는 이상적인 면에만 머물렀다. 넷째, 국학자의 대부분이 서울을 중심으로 한 근기지방의 학자들이었다는 것이다.

끝으로, 국학의 관심이 전통적인 주자학의 묵수(墨守)를 고집하는 입장보다는 이에 회의를 품고 사상적인 전환을 꾀했던 일부의 진보적인 학자와 양명학자들에 의해서 강하게 의식되었다는 일이다.

이렇게 보면 조선 후기의 국학은 우리 나라의 학술사 내지 문화사에서 일종의 문예부흥과도 같은 시기였고, 우리 나라의 정신사적 입장에서 보면 전통적인 유교사상의 최후를 장식하는 사상체계이기도 하였다.

어쨌든 조선 후기의 국학의 정신은 한말의 사상계에도 그대로 직결되었다. 이른바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사상체계에도 직접 간접으로 계승되었다. 박규수(朴珪壽)와 개화파에 해당하는 김옥균(金玉均) 등의 계열이 박지원·박제가 계통의 사상체계와 연결되고, 위정척사의 허전(許傳)이 이익 계열의 인물임은 대표적인 예이다.

국학의 제5단계 :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의 국학은 일본의 침략성에 의해서 말살되어가던 한국의 얼을 지키고, 그 정신적 소산인 말·글·역사, 그리고 한국적인 문화요소를 새삼 찾아내어 이를 드러내려 하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국학이라는 용어와 개념이 형성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또한 우리 역사상 민족, 동포라는 용어가 최초로 표명된 시기이고 종래의 유학자들이 서양학문의 수용을 하여야 한다고 인식한 1890년대 말 애국계몽운동으로 교육열이 고조되고 민족국가의 실현을 위한 문화, 정치의식이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이 때의 국학운동은 나라 안과 나라 밖에서 전개되었다. 나라 안에서는 주시경이 우리의 말과 글을 비로소 근대적인 어학으로 정립하기 시작했고, 장지연이 ≪조선유교연원 朝鮮儒敎淵源≫과 ≪일사유사 逸士遺事≫ 등 새로운 시각에서 저술을 냈다.

또한 신채호에 의해서 ≪조선사연구초≫·≪조선상고사≫와 같은 민족주의사학이 개척되었고 최남선이 주재하는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서 국고운동(國故運動)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신문과 학회지를 통한 활발한 민중계몽운동이 일어났다.

이 무렵은 전통적인 학문연구방법이 근대적인 학문연구방법으로 바뀌고 있던 상황에서, 국학에 일본의 어용학자들도 비상한 관심을 보이던 시기였다. 일본 학자들에 의한 관심은 한국의 침략을 위한 기초적인 조사와 연구뿐만 아니라 침략정책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근대적인 학문연구방법을 가진 일본인 학자들이 한국의 역사·고고학·어학·역사지리·민속 등에 이르는 광범위한 조사·연구가 진척되고, 한국연구의 편익을 위하여 조선고서간행회를 조직하여 많은 희귀서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과정에서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문화와 역사가 많이 왜곡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무렵의 국학은 일본의 이러한 문화적인 침략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주시경·장지연·신채호의 학문이 더욱 그러하였다.

그 뒤, 이런 국학의 정신은 발전되어 황의돈(黃義敦)·권덕규(權悳奎)·최남선 등에 의하여 한민족의 주체적인 역사가 저술되고, 오세창(吳世昌)·이능화(李能和)·안확(安廓) 등에 의해서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각 분야의 연구저술이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 국학의 개념이 형성될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정인보의 ≪오천년간 조선의 얼≫(뒤의 朝鮮史硏究), 안재홍(安在鴻)의 ≪조선상고사감 朝鮮上古史鑑≫, 문일평(文一平)의 ≪호암전집 湖巖全集≫ 등의 성과가 있었다. 백남운(白南雲)의 ≪조선사회경제사≫와 ≪조선봉건사회경제사≫, 이청원(李淸源)의 ≪조선사회사독본≫(뒤의 朝鮮歷史讀本) 등과 같은 유물사관에 의한 저술도 당시 민족운동의 일환으로서의 국학의 한 분야였다.

그리고 정인보에 의해서 주관된 신조선사에서 ≪성호사설≫·≪여유당전서 與猶堂全書≫·≪담헌서 湛軒書≫·≪여암집 旅庵集≫ 등을 간행하여, 국학의 연원인 실학의 세계를 새삼 선양하였다.

이어서 국제관계사에 이선근(李宣根), 경제사에 이훈구(李勳求)·인정식(印貞植)·유자후(柳子厚), 문학에 양주동(梁柱東)·김태준(金台俊)·조윤제(趙潤濟)·이병기(李秉岐), 어학에 최현배(崔鉉培)·김윤경(金允經)·장지영(張志暎)·이윤재(李允宰)·이극로(李克魯)·정인섭(鄭寅燮)·이희승(李熙昇), 미술사에 고유섭(高裕燮), 민속학에 손진태·송석하(宋錫夏), 연극사에 김재철(金在喆)·정노식(鄭魯湜), 종교사에 권상로(權相老)·김영수(金映遂)·오재영(吳在泳), 일반사에 이병도(李丙燾)·김상기(金庠基)·이인영(李仁榮), 사회사에 이상백(李相백)·김두헌(金斗憲) 등이 국학연구에 직접 간접으로 공헌하였다.

이 중에서도, 특히 국학의 연구성과로서 이정표적 업적은 최현배의 ≪한글갈≫과 양주동의 ≪고가연구≫ 등이었다. 이렇게 국학의 내연적 내지 외연적 연구가 진행되면서 국학연구단체도 조직되었다.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우리의 말과 글이 조직적·통일적으로 연구·개발·선양되고, 진단학회를 통하여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적으로 연구되었다.

그러나 1940년대에 들어와 일본의 탄압이 가중되면서 이와 같은 조직이 해산당하면서는 경제사에 최호진(崔虎鎭), 과학사에 홍이섭(洪以燮), 역사에 최남선의 저술이 나오는 정도에 머물고 말았다.

한편 나라 밖에서는 나라를 잃고 망명한 인사들에 의해서 먼저 기도되었다. 중국에서는 박은식이 ≪한국통사 韓國痛史≫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 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저술하여 일본의 한국침략상을 세계에 고발하였고, 김택영(金澤榮)의 한국 고전의 간행과 선양이 중국에서 있었으며, 신채호의 일련의 저술도 중국망명생활중의 연구결과였다. 백낙준의 ≪한국신교사 韓國新敎史≫도 미국에서의 이루어진 성과였다.

이 밖에도 외국인에 의한 한국학 관계의 분야별 연구물들이 있으나, 국학연구의 주류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보면 이 시기의 국학연구는 먼저 민족주의운동의 일환으로서의 국학의 연구·개발·선양임과 동시에 일제의 한국침략과 한국적인 문화요소의 말살정책에 저항 또는 대응하기 위한 의도적인 연구도 많았다.

따라서 어떤 경우는 근대학문의 입장에서 볼 때 여전히 구학(舊學), 전통적인 학문방법을 그대로 계속한 듯한 인상을 주는 연구성과가 있기도 했지만, 당시의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국학의 제6단계 : 해방 이후

광복 후의 국학은 해방을 맞이하여 희망에 찬 계기가 되는 듯 하였으나 곧이어 나타나는 좌우익 분열로 인하여 심각한 사상적 분열을 가져왔고 급기야는 1950년 6·25전쟁으로 인하여 인적 분열·국토의 분단이 장기화되었다. 6·25전쟁은 민족적 비극일뿐만 아니라 이후 남북한에서는 사상적 통제로 인하여 국학이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였다.

남한에서는 미국문화가 홍수처럼 밀려들어오고 있어 국학의 전통은 이제 전 국민의 관심사에서 멀어지기 시작하였고, 인문학의 중심적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전통문화는 두절되는 위기에 직면하였다.

해방직후에는 36년 동안 겪어왔던 일제식민통치에 의해서 소외당하고 말살의 위기에 있었던 우리의 문화를 되살리고, 정신적인 재 각성을 환기시켜 민족의 활로를 개척하자는 데 목적이 두어졌다.

먼저 일제강점기 말에 해산하였던 조선어학회(뒤에 한글학회로 개칭)와 진단학회가 부활되어 우리의 말·글·역사를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며 교재도 편찬하여 간행하였다.

그리고 많은 출판사가 설립되어 자체의 기획사업을 추진함과 동시에, 광복 전에 이룩된 많은 국학관계 저술들을 간행하였다. 정음사와 을유문화사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국가에서는 국사편찬위원회를 만들어 한국사의 편찬, 자료 수집과 보급 등을 하고 있다.

한편, 각 대학에서도 국어국문학과·사학과·철학과가 설치되어서 국학관계의 강좌를 개설하는가 하면, 교명을 국학대학이라 지은 대학까지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국학관계의 여러 학회가 창립되었는데, 역사·국어국문학·민속관계의 여러 학회들은 6·25전쟁으로 심각해진 위기 속에서도, 학문의 지속적인 유지·발전과 국학의 계승·선양이라는 목적과 사명 아래 동지적인 결속으로 이루어졌다.

역사학회·국어국문학회 등이 대표적이었다. 아울러 뜻 있는 대학에서도 국학연구를 서두르기 위한 연구소가 계획, 추진되었다. 연희대학교에서 동방학연구소가 설립되었고, 고려대학교의 민족문화연구소가 그 뒤를 이었다.

그 뒤에도 국학관계의 여러 학회가 계속해서 결성되고, 대학의 부설 연구소도 잇따라 설치되었다. 물론 이들의 학회와 연구기관은 모두가 국학관계만의 기관은 아니었다.

광복과 6·25전쟁을 전후하여 격변기를 극복하면서 각성된 학문적 열의를 보여주는 예증이기도 하였지만, 국학의 새삼스러운 발전을 다짐하는 계기가 되어준 것도 적지 않았다. 진단학회의 ≪한국사≫ 7권,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의 ≪한국문화사대계≫ 7책은 1950년대의 연구성과를 반영하여 주는 것이다.

한편 일제시기에 ≪조선왕조실록≫이 30부가 영인되었으나 한국학자들은 거의 이용할 수 없었으므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1955∼58년에 ≪조선왕조실록≫ 48책을 영인 보급함으로써 조선시대 연구가 증보문헌비고에 의거하던 데에서 실록을 중심으로 연구함으로써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 시기에 한글학회에서는 ≪큰사전≫ 6책(을유문화사간)을 펴내 국어사의 큰 업적이 되었다.

1960년 자유당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이후 우리의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이 이루어지면서 광복 후에 밀어닥친 외국문물과 사상·학문의 무절제한 수용과 모방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국학의식도 높아지게 되었다.

1960년대 국사학계의 최대의 관심은 일제식민사학의 극복이란 문제를 들고 나왔다. 조선의 실학연구, 조선 후기 사회의 발전, 고대사에서 구석기의 설정과 청동기시대의 설정, 나말여초의 호족의 시대설정은 바로 이런 결과의 대표적인 결과라 할 수 있다. 이기백의 ≪국사신론≫, ≪한국사신론≫은 이런 국사학의 대표적 업적이었다.

국가에서 한글전용정책이 실시되면서 한문은 중세문자로 전락되었고 국가 경제력의 비약적 발전과 유신체제라는 독재정권은 한국적인 정신과 문화의 특성의 발견에 열중하였다. 이러한 국학의식은 국민들로부터 반발을 가져오기도 하였지만 1970년대부터 국학연구운동은 현저해졌다.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고전을 국역하여 이를 보급시키는 민족문화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관계인사들의 정열적인 참여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고, 각 대학에 국사학과가 독립되기도 하였으며 1970년대의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한국사≫ 25책이 발간되고 북한에서는 ≪조선전사≫ 33책이 간행되었다.

1970년대에는 낙후한 한국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기관으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발족되어 한국학을 연구하기도 하였고, 이어서 1991년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7책을 편찬하여 과거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한국문화를 전체적으로 집대성하였다. 이는 현대의 한국학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다.

1980년대에 국내의 민주화 운동으로 유신체제가 붕괴되고 남북한의 교류가 시작되며 소련의 공산국가 해체는 국학의 새로운 발전을 가져왔다. 즉, 지금까지 소외되어온 민중에 대한 역사이해의 강조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역사가 제도사, 통치사 중심에서 인간의 생활사로 중시되었다. 이는 국학 인식의 이해가 바뀌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국학은 학문 연구가 세분화되는 경향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연간 600여 책의 단행본의 연구 업적이 나왔으나 거시적이고 종합적인 연구도 나왔다. 그 중요 업적으로는 조동일의 ≪한국문학통사≫ 5권, ≪한국사강좌≫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등을 들 수 있다.

1990년대에는 고전 국역본의 씨디롬화가 진행되어 한국학 자료의 디지털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한국학이 국가중심, 체제중심, 제도사 중심의 연구에서 생활사중심의 역사학으로 진행된 것도 새로운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국학연구의 과제는 인문학의 중심과목으로 위치를 확보하는 길이다. 국학이 현재의 인문학의 중심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지 못하는 이유에는 근대화 과정에서 전통문화를 근대화시킴에 실패하였기 때문이고 이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기인한다.

우리 나라의 근대화 과정은 비정상적인 과정을 밟아 근대정신을 전통문화와 접목시키는 것을 등한시하고, 일제의 식민지하에서 민족의 광복을 위한 대외투쟁적, 배타적인 정신에 몰두할 수 밖에 없었던 데서 기인한다.

그 결과 서양인문학이 한국의 인문학의 중심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광복 후 국학계에서는 이 점을 소홀히 여겨 이제 국학은 일반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우리 말과 문학, 역사가 교육의 기초과목이 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서양에서 발달한 자연과학과 기술존중의 문화 속에서 국학의 기능은 제 자리를 상실하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역사학과 국어국문학 등의 국학이 과거의 전통문화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현대문화에 이르는 근대, 현대의 문제를 비중있게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더구나 세계화, 인터넷의 정보화 시대에 직면하여 한국학은 우리 것, 전통적인 것 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안목에서 열린 자세로 전통문화를 현대문화와 접목시킴에 엄청난 노력이 경주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들의 생활과 의식 속에는 전통문화의 정신이 계승되고 있으면서도 현실적인 각종 제도 속에는 전통문화의 맥이 두절된 문화적 병리현상을 앓고 있다.

이를 현실에 맞도록 한국학의 폭을 현대적으로 폭넓게 확대시켜야 할 것이다. 이런 의식이 왕성하게 발전하지 못한다면 21세기의 소리 없는 문화전쟁 속에서 한국문화는 소멸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의 한국학은 종래의 국학이란 좁은 범위에서 과감한 탈피를 하여 새로운 인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중단된 전통문화를 현대사회에 접목시킴에 국가적인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 지금처럼 한국문화가 그 독자적 성격을 상실한 때도 유사 이래 처음 겪는다. 그리고 국학의 자료수집과 현대적 번역 등에도 국가적으로 힘써야 할 것이다.

국학이 한국 인문학의 중심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국민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 가를 국학 연구자, 정치가, 사회지도층은 심각하게 의식하고 국학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국학은 거의 100년 동안 근대적인 연구가 진행되어 왔는데 국수주의적 성향이 강하다. 이는 근대학문이 시작될 무렵에 함께 생긴 민족주의적 영향을 강하게 띠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민족주의 정신을 버려서는 안 되지만 우리 문화가 세계에서 최고라는 우물안 개구리식의 편협한 민족주의는 수정되어야 한다.

이제 보편적인 원리를 한국학에서 찾아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의 문화와 비교 연구하는 개방된 시각이 절실히 요구된다. 한국학이 보편성을 강하게 띠려면 사회과학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 한다. 사회과학도들이 한국학에 관심을 기울일 때에 한국학은 새로운 전기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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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재발견』(천관우, 일조각, 1974)
「18세기 서울의 도시적양상」(이우성, 『향토서울』 17, 1963)
「국학의 발달」(황원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14, 1975)
「국학연구가 뜻하는 것」(황원구, 『연세춘추』 785, 1977)
「한국 인문과학에 끼친 서양의 충격과 한국의 전통」(조동일, 『미래세계의 대학』 연세대학교 창립100주년기념학술회의논문집,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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