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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교육
개념
사춘기 또는 청년기에 들어가기 전인 6세에서 12세경까지의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실시하는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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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사춘기 또는 청년기에 들어가기 전인 6세에서 12세경까지의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실시하는 교육.
내용

단계별로 보면 초등교육에 해당한다. 아동기의 생활형태는 유아기와는 뚜렷하게 구분되며 커다란 전환을 이루는 시기이다. 유아기의 유희생활에서 학습생활로, 자유가 허용되던 생활에서 의무와 규율이 요구되는 생활로 전환되며, 사고에서도 주관적 사고에서 개관적 사고로, 개인 중심에서 집단 중심의 사고로 옮아가게 된다. 또한 이 시기는 의무교육 기간에 해당하므로 학동기(學童期)라 불리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행해지는 기초교육에 따라서 후속 교육의 결과가 좌우될 뿐만 아니라 인격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므로, 예로부터 아동기교육은 특히 중요하게 다루어져 왔다.

삼국시대 이전 고대사회에서의 아동교육은 가족의 생존과 아울러 단체성을 강조하고 종족의 관습을 몸에 익히게 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았다. 특히 소년에서 성년으로 곧바로 옮아갔던 사회에서, 성년식(成年式)을 통과하기 위해 요청되었던 여러 가지 지식이나 기능에 대한 교수훈련은 최초의 소박한 의도적 아동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성년식 이전의 아동은 성인을 모방하고 그들의 행동을 몸에 익히면서 점차 사회생활에 참여하게 되었다. ≪후한서 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는 성년식을 준비하는 과정이 단편적이나마 실려 있어, 고대사회에서도 그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규범적인 아동교육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 와서 비로소 제도적인 학교가 설립되어, 일부 아동에 한정되기는 했지만 최초로 학교교육이 시작되었다.

먼저 고구려에서는 경당(扃堂)이라는 민간 교육기관이 널리 보급되어 상당수의 아동들이 그곳에서 여러 가지 교육을 받았다. ≪구당서 舊唐書≫에 의하면 “풍속이 서적을 사랑하여 호화로운 집에서 구차한 집에 이르기까지 거리에 큰 집을 지어 이를 경당이라 부르고, 미혼 자제들이 밤낮으로 독서하고 활쏘기도 하였으며, …….” 라고 하였고, ≪신당서 新唐書≫에서도 이 사실을 전하고 있다.

경당은 생활의 필요에 따라 가정을 중심으로 행해졌던 아동교육이 차츰 그 내용이나 절차에서 체계적·형식적인 형태로 바뀌어 갔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신라나 백제에서도 문헌상의 기록은 없지만 어떤 형태로든 학교교육이 실시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특히 신라는 14세에서 17세 전후에 화랑(花郎)으로 추대될 수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전 단계의 아동기 소년들에게도 적합한 교육을 실시하는 사회적 풍토가 조성되었을 것으로 상상된다.

고려시대의 아동교육은 송나라의 사신으로 왔던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 高麗圖經≫에, “마을 거리에는 경관(經館)과 서사(書社) 두세 개가 서로 바라보고 있으며, 민간의 미혼 자제들이 무리를 지어 선생에게 경서(經書)를 배우고 좀 성장하게 되면 저희들끼리 벗을 택하여 절간으로 가서 공부하며, 아래로 어린아이들까지도 역시 향선생(鄕先生)에게 나아가 배운다. 아아 성하도다.”라고 적었다.

이로 보아 당시 아동을 위한 교육기관이 널리 보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삼국시대부터 우리 나라의 사상계를 지배하게 된 불교는 아동교육에도 큰 영향을 미쳐, ≪육방예경 六方禮經≫에서 석가모니가 가르친 ‘부모의 자식에 대한 도리’를 통하여 아동은 자유방임되거나 방치되어야 할 존재가 아니며, 그 아동에 대한 보호와 교도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부모에게 있고, 아동은 부모의 보호와 교도를 받을 권리와 의무를 가진 존재라고 하였다.

대승불교에 이르면, 아동은 성(性)의 구별 없이 보살로 상징되면서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이상을 향하여 전진해 가는 존재로 파악되고 있다. 심지어 보살들이 아동으로 화현(化現)하여 성인들에게 깨우침과 구원을 주는 설화와 전설이 유포되기도 하였다. 더욱이, 다생(多生)에 걸쳐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등의 관계가 서로 바뀔 수 있다고 하는 삼세인과신앙(三世因果信仰)은 아동을 더욱 성인과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보게 하였다.

이와 같은 사상이나 관념은 불교를 숭상하던 당시 우리 민족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융화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아동이 가족의 일원으로서 기대되는 역할을 익히고 수행할 수 있는 공동체적인 존재로 인식되어, 유교가 설정한 덕목 기준에 맞추어서 아동교육의 내용이나 방법이 조정되었다.

당시 아동교육의 기본 지침서였던 ≪소학 小學≫에는, “일곱 살이 되면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를 같이 앉게 하지 않으며 같이 음식을 먹지 않게 한다. 여덟 살이 되면 집안의 문을 드나들거나 자리에 나아가 식사를 할 때에는 반드시 어른이 먼저 드신 뒤에 하게 하여 사양(辭讓)의 미덕을 가르치게 한다.

아홉 살이 되면 날짜 계산하는 법을 가르치게 한다. 열 살이 되면 남자는 스승에게 나아가 사랑방에서 잠자며 글쓰기와 셈을 배우게 한다. 이때에 옷은 비단이 아닌 저고리와 바지를 입게 하고, 예절은 스승이 가르친 대로 실천하게 하며 아침저녁으로 어른 섬기는 법을 배우게 하되, 행하기 쉬운 것부터 청하여 익히게 한다. …….”라고 하였다.

당시의 아동교육은 한마디로 유교가 제시한 삼강오륜의 덕목에 맞추어 행동하도록 훈육하는 것이 그 목표였다. 이에 이이(李珥)는 ≪소아수지 小兒須知≫라는 17개 조목의 소학학규(小學學規)를 제정하였는데, 그 내용은 아동이 그의 생활에서 지켜야 할 행동규범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었다.

또한 이덕무(李德懋)는 그의 ≪사소절 士小節≫ 동규(童規)에서 남아의 행동규범을 보다 구체적으로 69개 항목으로 엮어 아동교육의 지침으로 삼을 것을 권장하였다. 당시 서당에 다니거나 독선생(獨先生)을 초빙하여 실시했던 아동의 초보 교과서는 ≪천자문≫·≪동몽선습 童蒙先習≫·≪명심보감 明心寶鑑≫·≪소학≫ 등이었다. 서당이 보편화되어 유교사상에 바탕을 둔 아동교육이 일상생활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되었다.

한편, 여아(女兒)의 교육목표는 효친(孝親)·부의(婦儀)·모의(母儀)·부덕(婦德) 등에 두고 일찍부터 방적·침선·요리·가사의 기능교육이 필수였다. 극히 한정된 숫자이기는 했으나 소혜왕후(昭惠王后)가 지은 ≪내훈 內訓≫, 국역한 ≪여사서 女四書≫ 등이 유교적 여성상을 구현하기 위한 교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조선시대는 아동을 인격체로 존중하기에는 미흡한 실정이었다. 이에 비하여 동학(東學)의 아동관은 아동을 인격적 존재로 한울님을 대하듯 소중하게 길러야 한다고 선언하여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인내천사상(人乃天思想)을 널리 전파하였다.

개화기를 맞아 문호가 개방되면서 근대적 교육제도가 도입되었다. 아동교육을 담당하는 초등학교로는 1895년에 <소학교령>이 공포되어 이전의 서당을 대신하는 소학교(小學校)가 설치됨으로써, 수신·독서·작문·습자·산술 및 체조를 가르치도록 하였다. 그러나 실제 이들 초기의 학교는 예전의 서당과 그 규모나 교육내용에서 크게 다를 바가 없었으며, 한동안은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 한문교육을 위주로 수업이 실시되었다.

1906년에는 소학교가 보통학교(普通學校)로 개편되어 수업연한을 4년으로 하였다. 교과목은 이전과 큰 차이가 없었으나 일제에 의해 일본어가 국어·산수와 함께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는 어린이에게 외국어를 지나치게 부과하는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1910년 국권 상실과 함께 더욱 심해져, 결국 일본어를 국어로 취급하여 가장 많은 시간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일제의 우민화정책으로 인하여 교육내용의 편중성은 물론, 초등학교 취학률이 일제 말기에도 70% 정도에 불과하여 많은 아동들이 제도적 교육의 혜택에서 제외되었음을 알 수 있다.

광복과 함께 아동교육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초등교육기관이었던 보통학교는 1938년에 다시 소학교로 개편되었다가 1941년부터 국민학교로 개편되었다. 또 광복 이후 새 교육제도에 따라 그 체제가 정비되었으며, 1996년 초등학교로 개칭되었다. 또한, 광복과 함께 아동교육의 의무교육화정책이 실시됨에 따라 취학률이 급증하여, 현재는 취학연령의 100%가 초등학교에 진학하고 있다.

이러한 초등교육 인구의 폭발적 증가로 인해 대형 학교와 과밀학급, 시설 빈곤 및 교육여건 부실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생하기도 했으나, 초등교육에 관한 사회적 관심의 증가와 인구정책에 따른 아동 감소현상 등으로 점차 해결방안이 모색되어 가고 있다.

어린이는 독립된 인격적 존재로서 그들이 간직한 지적(知的)·정의적(情意的)·신체적 등 모든 능력을 개발하고 올바로 이끌어 주는 데 그 교육목적이 있다. 따라서 학교교육을 비롯한 가정과 사회의 교육성을 최대한 신장시켜 가정교육·학교교육·사회교육의 협동적인 기능 강화가 더욱더 요청되고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소학(小學)』
『한국신교육사』(오천석, 현대교육총서출판사, 1964)
「한국유교의 아동교육론」(이문원, 『교육사교육철학』 3, 1979)
「불교의 아동교육관과 그 한국적 전개상」(박선영, 『교육사교육철학』 3, 1979)
「동학사상(東學思想)의 아동관」(손인수, 『교육사교육철학』 3, 1979)
집필자
이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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