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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 곤룡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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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정복(正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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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정복(正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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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복의 종류가 뚜렷이 나타나는 조선시대의 것을 보면, 조근·봉사지복(朝覲奉祀之服)이라 하여 종묘·사직 등에 참예(參詣), 제사하고 정조(正朝)·동지·조회(朝會)·수책(受冊)·납비(納妃) 등에 착용하던 면복(冕服)이 있다.

수배신조현지복(受陪臣朝見之服)이라 하여 삭망(朔望)·조강(朝降)·조강(詔降)·진표(進表)·조현(朝見) 등에 착용하던 원유관(遠遊冠)·강사포(絳紗袍), 그리고 상복(常服)이라 할 평상 시사시(視事時)에 착용하던 익선관(翼善冠)·곤룡포(袞龍袍)가 있었다. 또, 국난을 당하여서는 전립(戰笠)에 융복(戎服)을 착용하기도 하였다.

왕복은 군왕(君王)의 표신(標信)이기도 하였던 만큼 군신의 복과는 달랐다. 옛 고구려의 왕복을 보면, ≪당서 唐書≫ 동이전(東夷傳)에서는 “왕복은 오채복(五采服)이고, 그 관은 금테를 두른 백라관(白羅冠)이고, 여기에 금테로 장식한 혁대를 띠었다.”라고 하였다.

또 백제의 왕복은 ≪당서≫ 동이전에 “대수자포(大襃紫袍)에 청금고(靑錦袴)를 착용하고 소피대(素皮帶)를 띠었으며 오혁리(烏革履)를 신었고 금위(金蘤)를 장식한 오라관(烏羅冠)을 썼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제25대 무녕왕의 능에서는 금제관식(金製冠飾)·은제과대(銀製銙帶) 및 패식(佩飾)·청동식리(靑銅飾履) 등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금위를 장식한 오라관은 금관으로 발전하였고, 금관과의 장식 균형을 이루기 위하여 오혁리는 청동리로 바뀌었다. 또한 소피대 대신 패식이 있는 은제과대를 띠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라의 왕복은 문헌에 기록된 바가 없으나 금관총·서봉총·천마총 등에서 발굴된 금관·요패·과대·금동리 등으로 미루어 백제 왕복 이상으로 호화찬란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당시의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복식은 우리 민족 고유의 기본형 그대로였으므로 왕복이라 하여도 포(袍)·유(襦)·고(袴) 등에 있어서는 다를 것이 없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기 전 제28대 진덕여왕 3년(649) 정월부터 당나라의 장복(章服 : 그들의 公服)을 관복(官服)으로 착용하기 시작하였다.

≪삼국유사≫ 경문왕조에 나오는 복두(幞頭)에 관한 고사로 미루어 삼국통일 뒤로는 왕도 중국의 면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복두공복을 평상시 착용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제17대 인종 원년(1123)에 고려를 다녀간 송사(宋使) 일행의 한 사람이었던 서긍(徐兢)의 ≪고려도경 高麗圖經≫ 관복조(冠服條)에 보면 “상복(常服)에는 오사고모(烏紗高帽)에 착수상포(窄袖緗袍)를 입고 금벽(金碧)으로 간수(間繡)한 자라늑건(紫羅勒巾)을 띠었다.

나라의 관원(官員)과 사민(士民)이 모였을 때에는 복두를 쓰고 속대(束帶)를 띠었다. 제사지낼 때에는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규(圭)를 들었다. 중국사신이 오면 자라공복(紫羅公服)에 옥대(玉帶)를 띠고 상홀(象笏)을 들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의 제복(祭服)인 면복은 이미 제11대 문종 때에 거란주(契丹主)가 보내온 바 있으며, 그 뒤 요주(遼主)도 보내왔는데, 이는 구류면(九旒冕)·구장복(九章服)이었다. 제31대 공민왕이 명나라 태조에게서 1370년에 받은 면복도 구류면·구장복이었으며, 이 때 원유관·강사포도 받았다.

또한 자라공복은 통일신라 때부터 습용하여오던 당제(唐制) 공복과 대동소이한 것이었으며, 이것도 문종 32년(1078)에 송나라 신종으로부터 받은 것과 같은 것이었다고 하겠다.

조선시대의 왕복 중 면복은 제3대 태종 3년(1403)에 명나라 성조로부터 받은 것을 시작으로 명나라가 멸망하는 제16대 인조 때까지 왕이 바뀔 때마다 받았다.

이를 ≪국조오례의≫ 서례(序例) 제복도설(祭服圖說)에서 보면, 면류관은 앞뒤 각 9류가 있어 유마다에는 주(朱)·백(白)·창(蒼)·황(黃)·흑(黑)의 5채옥 9개를 꿰었다고 한다.

곤복(袞服)의 현의(玄衣)에는 용(龍)·산(山)·화(火)·화충(華蟲)·종이(宗彛)의 5장문(章文)을 수놓았다. 그리고 전3폭, 후4폭으로 된 훈상(纁裳)에는 조(藻)·분미(粉米)·보(黼)·불(黻)의 4장문을 수놓아 의·상 합하여 9장문이 있는 구장복이었다.

곤복에는 이 밖에 중단(中單)·폐슬(蔽膝)·대대(大帶)·패(佩)·수(綬)·말(襪)·석(舃)이 딸렸고, 방심곡령(方心曲領 : 親祭時 부착)이 있으며, 청옥규(靑玉圭)를 들었다. 또, 원유관·강사포도 제4대 세종 20년(1438)에 명나라에서 보내온 바가 있는데, ≪국조오례의≫ 서례 관복도설에서 이를 보면, 원유관은 9량(梁)으로 되어 있다.

강사포는 그 구성이 곤복과 같되 장문이 없으며, 방심곡령은 부착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면복이나 원유관·강사포는 명나라에서 보내온 것이었는데, 그 이전에도 이것을 착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어서 고려 때의 것을 본떠 착용하고 있었다. 익선관·곤룡포도 세종 26년(1444)에 명나라에서 보내오고 있다.

이를 ≪국조속오례의보 國朝續五禮儀補≫ 서례 시사복도설(視事服圖說)에서 보면, 양대각(兩大角) 뒤에 양소각을 향상시켜 첩부한 익선관과 앞뒤·좌우 어깨에 금색 오조원룡보(五爪圓龍補)를 가식한 대홍색 곤룡포에는 조옥대(雕玉帶)를 띠고 흑궤자피화(黑麂子皮靴 : 여름에는 黑漆皮靴)를 신었다.

그런데 제26대 고종이 대한제국 황제위에 오르면서 면복은 12류면·12장복으로, 원유관은 통천관(通天冠)으로, 익선관·곤룡포는 대홍색에서 황색으로 바뀌었고, 구미식 예복을 착용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사(高麗史)』
『고려도경(高麗圖經)』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대한예전(大韓禮典)』
『당서(唐書)』
『한국복식사연구』(류희경,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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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유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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