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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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물
일제강점기 「춘향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장화홍련전」 등의 작품에 관여한 영화인. 촬영기사, 영화감독.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1년(고종 38)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서울
목차
정의
일제강점기 「춘향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장화홍련전」 등의 작품에 관여한 영화인. 촬영기사, 영화감독.
내용

서울 출신. 형은 우리나라 최초의 촬영기사이며 녹음기사인 필우(弼雨)이다. 계성학교(桂成學校)를 졸업하고 형의 뒤를 이어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아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 촬영술을 배웠다.

1927년에 김해운(金海運) 감독의 「운명」을 촬영함으로써 영화계에 데뷔하였고, 이어서 「월남 이상재선생 장례식 실황」(1927)의 감독·촬영·현상·편집까지 하였다. 1928년에는 김영환(金永煥) 감독의 「삼걸인(三乞人)」의 촬영·현상·편집을 맡았고, 1930년에는 이구영(李龜永) 감독의 「아리랑, 그뒤의 이야기」의 촬영과 편집을 담당함으로써 형 필우의 기술을 완전히 습득하였다.

이어 무성영화시대의 작품으로서 김상진(金尙鎭) 감독의 「방아타령」(1931), 이규환(李圭煥) 감독의 「임자없는 나룻배」(1932)·「바다여 말하라」 등을 촬영하였다.

1935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발성영화(發聲映畫)인 「춘향전」(경성촬영소 제작)의 감독··촬영·편집을 맡았고, 이때 필우는 녹음·현상·조명을 맡았다. 그 밖의 감독 작품으로는 「홍길동전 후편」(1936)·「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1939) 등이 있다.

발성영화시대에 들어서의 촬영활동으로서는 고려영화사(高麗映畫社)가 제작한 최인규(崔寅圭) 감독의 「수업료(授業料)」(1940), 전창근(全昌根) 감독의 「복지만리(福地萬里)」(1941) 등의 뛰어난 작품이 많다. 1937년에 우리나라를 방문하였던 세계적인 영화감독 스탠버그 (Stanburg,J.V.)는 이명우가 촬영한 영화 「장화홍련전」(1936)을 보고 촬영안목과 기법이 매우 높다고 칭찬한 바 있다.

광복 후 영화계 재건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6·25전쟁 때 최인규 감독 등과 함께 납북되었다. 이명우는 감독·촬영·현상·녹음·편집·영사 기사까지 겸하였던 한국영화 초창기의 특출한 인물이며, 무성과 발성의 한국영화 발전에 영상과 녹음의 측면에서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참고문헌

『한국영화전사』(이영일, 삼애사, 1969)
집필자
이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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