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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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양주별산대놀이 신할아비와 신할미
양주별산대놀이 신할아비와 신할미
연극
개념
연기자가 등장 인물이나 동물 또는 신을 형상화한 가면을 쓰고 등장하여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연극. 가면극 · 탈춤.
이칭
이칭
가면극, 탈춤
목차
정의
연기자가 등장 인물이나 동물 또는 신을 형상화한 가면을 쓰고 등장하여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연극. 가면극 · 탈춤.
내용

한국 탈놀이(가면극)의 기원에 대해서는 농경의례설(農耕儀禮說)·기악설(伎樂說)·산대희설(山臺戱說)의 세 가지가 논의되어 왔다. 고구려의 무악(舞樂), 백제의 기악(伎樂), 신라의 처용무(處容舞)와 오기(五伎)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륙에서 전래된 산악백희(散樂百戱)가 향악화(鄕樂化)되고, 고려의 산대잡극으로 이어지며, 조선 전기에는 사찰기악의 민속극화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조선 전기까지의 각종 가면희가 선행예능(先行藝能)으로 참여하면서 조선 후기, 대체로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현전하는 것과 같은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의 드라마가 정립되었다.

마을 굿으로 행해진 서낭제탈놀이의 대표적인 것으로 하회별신굿탈놀이와 강릉단오굿의 관노탈놀이가 있다. 이 놀이들은 농경의례설과 관련되는 것이지만 마을 굿의 일부로 연희(演戱)되며, 세시의례연극(歲時儀禮演劇)의 성격을 지닌 향촌형(鄕村型)의 탈놀이라고 분류할 수 있다. 반면에 굿과는 독립으로 공연된 산대도감 계통극은 보다 발전된 도시형의 탈놀이라고 할 수 있다.

산대도감극이라는 명칭은 조선 전기 궁중의 나례(儺禮:잡귀를 쫓기 위해 베풀던 의식)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나례도감(儺禮都監)이나 산대도감의 관장 아래 있으면서 산대라고 불린 무대에서 상연되던 때의 호칭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런데 1634년(인조 12)에 산대극이 공적인 의식으로 상연되는 일이 폐지되자, 산대도감에서 녹을 받던 연희자들은 해산하여 주로 민간의 도움으로 생계를 유지하게 되니 산대극이 점차 민중오락을 위한 민속극으로 정착하게 된 것 같다.

산대도감 계통의 탈놀이로서 현전하는 것은 중부지방의 양주별산대놀이·송파산대놀이, 서북지방의 봉산탈춤·강령탈춤·은율탈춤, 영남지방의 통영오광대·고성오광대·가산오광대·수영야류·동래야류가 있다. 이 밖에 계통을 달리하는 놀이로는 하회별신굿탈놀이와 북청사자놀음이 있는데, 이들 12종의 탈놀이는 현재 모두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1) 상연 시기와 시간

현전하는 이들 탈놀이의 상연 시기는 각 지방에 따라 다르나, 주로 음력 대보름과 사월 초파일, 오월 단오, 팔월 추석 등의 명절놀이로 놀았고, 그 밖에 나라의 경사 때나 기우제 행사로도 동원되어 놀았다.

상연 시간은 민속예능의 일반적 특성으로 제한이 없어 보통 저녁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시작하면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되었으며,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 서너 시간으로 줄이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탈놀이의 대사가 구전(口傳)되어 오는 것으로 일정하지 않아 전체적인 틀이나 짜임새는 있으나 세부에 들어서는 신축이 자유로운 점과, 또 춤 역시 신축이 가능한 데서 오는 것이다. 현대로 내려오면서 줄이는 경향이 많다.

(2) 탈 판

탈놀이는 고려나 조선시대에는 산대라고 불리던 가설무대에서 놀았으나, 민속극으로서는 평지나 산기슭의 비탈진 곳에서 놀았다. 왼편에 탈막〔改服廳〕, 오른편에 삼현청(三絃廳) 악사석이 있고, 가운데에 탈판, 탈판보다 얕은 곳이나 산비탈에 관객들이 삼면에 둘러앉아 구경하게 된다.

모닥불이나 기름불로 조명하였으며, 탈막은 탈이나 옷을 갈아입는 곳으로 전체를 백포(白布)로 둘러싸고 탈판으로 두 개의 출입문이 있어 연기자들이 입퇴장하는 데 사용하였다. 봉산탈춤의 탈판은 탈판 둘레에 다락을 만들어 특별관람석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3) 대사·노래

탈놀이의 연희형태는 음악 반주에 의한 춤이 주가 되며, 거기에 노래가 따르는 가무적 부분과, 몸짓과 덕담·재담이라고 하는 사설, 즉 대사가 따르는 연극적 부분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양주별산대놀이의 예를 들어 보면, 상좌·눈끔적이·왜장녀·애사당·소무·노장·원숭이·해산모·포도부장·미얄할미역은 대사가 없고, 그 밖의 배역들은 대사와 함께 춤과 몸짓으로 연기한다. 과거의 탈춤은 남자들만이 탈을 쓰고 놀았으므로 대체로 여자 탈은 대사가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대사의 특징을 보면 봉산탈춤의 경우 비교적 운문(韻文)의 억양을 고집하고 있는 데 비하여, 양주별산대놀이는 평명(平明:알기 쉽고 분명함)한 일상 회화조의 대사를 주로 하고 있다. 그 중 옴중과 취발이의 대사는 이 놀이의 백미로 관중의 흥미를 끌었고, 영남의 탈춤에서는 취발이가 없는 대신 말뚝이의 재담이 주가 되어 있다.

말없는 탈의 연기에서는 노장의 몸짓춤이 가장 우수한 것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대사 한마디 없이 춤과 몸짓만으로 소무와의 파계과정과 농희(弄戱:희롱하는 장면)를 훌륭하게 보여준다.

노래는 장단을 청하는 짤막한 불림과 <매화타령>·<백구타령>·<천자풀이> 및 무가 등으로 가짓수가 많지 못하며, 그것도 덕담 외에는 첫 허두만 조금 부르다가 곧 춤으로 바꾸어 버리는 춤의 시작 신호 같은 구실을 한다.

양주별산대놀이에서 예를 들어 보면,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노던 달아 태백이 비상천후에 나와 사굇더니……’, ‘녹수청산 깊은 골에 청룡 황룡이 굼틀어졌다……’, ‘금강산은 좋단 말을 풍편에 넌짓 듣고서 장안사 썩 들어가니 난데없는 검은 중이……’ 등인데, 보통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노던 달아’, ‘녹수청산 깊은 골에’, ‘금강산은 좋단 말을 풍편에 넌짓 듣고서’ 등 허두만 부르면 타령장단 반주가 연주된다. 또한, 염불장단 불림으로는 ‘얼-수 절-수 지-화 허-자 저르르르’가 있고, 굿거리장단 불림으로는 ‘얼-수 절-수’ 등이 있다.

(4) 반주 악기

탈놀이의 반주 악기로는 이른바 삼현육각, 즉 피리 두 개, 대금 하나, 해금 하나, 장구 하나, 북 하나로 구성되지만, 이 밖에 꽹과리를 추가하는 경우도 있다.

중부지방의 산대춤과 황해도지방의 탈춤에서는 타악기와 함께 관현악기도 포함한 이른바 삼현육각이 기본적으로 쓰이나, 영남지방의 오광대와 야류(野遊)에서는 타악기가 주가 된 농악이 반주로 쓰인다. 반주악은 완중(緩重)한 염불, 리듬이 명확한 타령, 유장한 굿거리 등이 기본으로 사용된다.

(5) 과 장

탈놀이의 과장별은 연희자들에 의하면 그다지 엄격하지 않고, 또 현대 연극처럼 첫 막에서 끝 막까지 연속체로 된 드라마가 아니다.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처럼 주제별로 된 몇 개의 이야기(episode)가 옴니버스형식으로 한 테두리 속에 들어 있다. 다만 채록자들에 의하여 과장별은 각자의 관점에서 정리하였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양주별산대놀이에서 구술자들은 신장수과장과 취발이과장을 따로 독립시켰으나, 이 두 과장은 그 성격상 노장과장에 포함시키는 것이 옳다. 흔히 산대놀이나 봉산탈춤은 더 세분하여 열두마당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무당굿 열두거리’, ‘판소리 열두마당’과 마찬가지로 열두마당으로 맞추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세분화인 것 같다.

양주별산대놀이를 다음과 같이 8과장 8경으로 나누기도 한다. 길놀이, 서막고사, 제1과장 상좌춤, 제2과장 옴과 상좌놀이, 제3과장 옴과 목중놀이, 제4과장 연닢과 눈끔적이춤, 제5과장 팔목중놀이, 제1경 염불놀이, 제2경 침놀이, 제3경 애사당북놀이, 제6과장 노장놀이, 제1경 목중놀이, 제2경 신장수놀이, 제3경 취발이놀이, 제7과장 샌님놀이, 제1경 의막사령놀이, 제2경 포도부장놀이, 제8과장 신할아비와 미얄할미, (종장) 지노귀굿 순으로 나눈다.

현전하는 탈놀이의 내용은 산대도감 계통극의 공통된 내용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시대 서민문학의 특성과 마찬가지로 파계승, 몰락한 양반, 무당, 사당과 거사, 하인과 기타의 남녀노소, 서민들의 등장을 통하여 현실 폭로와 풍자, 호색, 웃음과 탄식 등을 나타내며, 그 주제는 크게 나누어 파계승놀이와 양반놀이, 서민생활을 보여주는 놀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세분하여 ① 벽사(辟邪:귀신을 물리치는 것)의 의식무와 굿, ② 파계승에 대한 풍자, ③ 양반에 대한 모욕, ④ 남녀의 대립과 갈등, ⑤ 서민생활의 실상과 애환 등을 보여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은 당시의 특권계급과 형식적인 윤리에 대한 일종의 비판정신을 구체적으로 연출하는 민중극이며, 세계 어느 나라의 민속극에서도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인간의 약점이나 시류의 악폐, 당시에 호사를 부리던 계층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패러디(parody)인바, 이러한 서민문학성은 임진·병자 양난 이후 새로 일어난 서민문화의 주류를 이룬 사조로서 서민예술의 하나인 탈놀이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러나 각 놀이마다 주체성에 약간의 차이가 있어, 예컨대 남녀관계 설정에서 봉산탈춤·오광대·꼭두각시놀음 등은 남녀의 갈등을 강조하여 영감과 미얄과 그 첩과의 삼각관계를 다룬 데 비하여, 양주별산대놀이에서는 신할아비과장에서 부부관계에 첩을 등장시키지 않는 대신 샌님과장에서 샌님〔生員〕·포도부장(상민)·샌님의 소첩과의 삼각관계로 이를 설정하여 남녀의 갈등보다 양반과 상민의 대립관계에 역점을 두어 양반에 대한 모욕을 더욱 날카롭게 하고 있다.

이것은 지방에 따른 계급 차별에 대한 자각과 남녀 차별에 대한 자각과의 차이로 보인다. 또 중부와 서북지방의 탈놀이에서 파계승에 대한 풍자과장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데 비하여, 영남지방에서는 파계승에 대한 풍자가 약한 대신 양반에 대한 모욕이 심하여 취발이 대신 말뚝이 재담이 중심이 된 느낌이다.

탈놀이의 연희자는 조선시대 말기까지도 직업적인 연희자들이 서울 남대문 밖의 큰고개·애오개〔阿峴〕, 서대문 밖의 녹번리 등지에 살면서 각 지방을 돌며 흥행하였고, 일례로 사직골 딱딱이패가 노는 본산대를 본떠서 오늘의 양주별산대놀이가 생겼다고 한다. 또 낙동강변의 밤마리 장터에서 놀던 대광대패의 탈놀이가 그 일대에 퍼져 오늘의 오광대와 야류로 남았다고 한다.

그러나 현전하는 가면극은 비직업적인 반농반예(半農半藝)의 연희자들에 의하여 연희되어 왔다. 이속(吏屬)이나 무부(巫夫)가 주도하던 고장이 많았고, 농민뿐만 아니라 황해도탈춤에서는 상인들도 많이 참가하였다.

앞서에도 언급했지만 연희자는 모두 남자였고, 봉산탈춤에서 상좌나 소무역을 여자가 맡아 하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오면서 기생들이 참가한 뒤부터였다. 또 양주에서는 일단 탈을 쓴 자는 제사에도 참여할 수 없어 이를 꺼리기도 했다는데, 이것은 탈이 잡귀뿐만 아니라 조상신까지도 쫓는다고 생각한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탈〕}} 연기자가 탈을 써서 등장인물을 나타내며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 탈놀이라면, 탈은 탈놀이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탈은 각 지방의 12가지 탈놀이에 따라 제각기 다른 표정의 탈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 수가 매우 많다.

탈 제작의 재료로는 나무와 종이, 그리고 바가지가 가장 많이 쓰인다. 중부지방의 산대탈은 주로 바가지이고, 황해도지방의 탈은 종이를, 영남지방의 오광대와 야류탈은 종이와 바가지를 주로 사용하고, 대바구니와 모피도 사용된다.

≪증보문헌비고≫ 권64 나조(儺條)에 보면, 1623년(인조 1)에 궁중에서 나례에 종이가면을 쓰면 비용이 많이 드니 나무가면으로 바꾸어 매년 개장(改粧)만 해서 쓰기로 논의된 사실이 보이는데, 민간에서는 봉산탈춤 등 황해도탈은 종이가면이나 산대탈은 오래 전부터 바가지탈이었던 것 같다.

하회별신굿탈놀이를 제외한 모든 탈놀이는 공연 뒤에 부정을 꺼려서 탈과 소도구 등을 태우거나 부숴 버리고 행사 때마다 새로 만들었으나, 금세기에 들면서 양주별산대놀이의 경우만 하더라도 탈을 사직골 신을 모셔 놓은 당집에 보관하고 해마다 개장하여 써왔다고 한다.

탈의 색은 붉은색·검은색·푸른색·노란색 또는 갈색·흰색 등의 오방색이 주로 쓰이는데, 그 색이 갖는 의미도 민간신앙적인 면에서 설명되기도 한다.

봉산탈춤의 목중탈 같은 것에 비하여 양주나 송파의 산대탈은 보다 사실적인 탈들이며, 탈 뒤에는 탈보가 붙어 있어서 이것으로 머리에 동여매고 후두부까지 가리며 얼굴 전면을 덮게 되어 있다.

사용되는 탈의 수는, 양주별산대놀이를 예를 들면 상좌 2개(첫 상좌는 도련님역을 겸용), 옴중 1개, 목중(또는 먹중) 4개, 연닢·눈끔적이·완보(또는 관을 쓴 중)·신주부·왜장녀(해산어멈과 도끼누이를 겸용)·노장 각 1개, 소무(애사당을 겸용) 2개, 말뚝이(신장수와 도끼를 겸용)·원숭이·취발이(쇠뚝이 겸용)·샌님·포도부장·신할아비·미얄할미 각 1개로 모두 22개 내외가 된다.

각 탈은 제각기 일정한 도형을 가지고 있어 그 기본 바탕에 의해서 제작되나, 재료가 주로 종이거나 바가지이므로 그 모양은 제작자에 따라 약간 차이가 나지만 보다 편법화된 수법은 조선시대적인 민예의 매력과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

양주별산대놀이와 송파산대놀이 등 중부지방 탈놀이의 의상은 대체로 양반이나 중, 서민 남녀 등 등장인물들의 의상과 소도구는 조선 후기의 그것과 같으나 배역에 따라 특수한 상징적인 특징을 보인다.

예컨대, 천신을 나타낸다는 연닢은 등에 학(鶴)을 그린 청창의(靑氅衣)에 붉은 띠를 매고, 푸른 행전(行纏:바지를 입을 때 정강이를 감아 무릎 아래에 매는 물건)을 치고 화선(畫扇:색칠을 한 부채)을 든다.

지신을 나타낸다는 눈끔적이는 등에 호랑이를 그린 장삼을 입고 붉은 띠에 회색 행전을 친다. 관을 쓴 중인 완보는 등에 용을 그린 장삼을 입고 붉은 띠에 회색 관을 쓰고 꽹과리를 갖는다.

노장은 등에 호랑이를 그린 회색장삼을 입고 붉은 띠에 회색 행전, 송낙(볏짚으로 우산처럼 만든 모자)을 쓰고, 목에는 긴 염주, 손목에는 작은 염주를 걸고 한 손에 화선을 들고 다른 손에 지팡이를 짚고, 투전도 가지고 나온다.

황해도탈춤의 의상은, 봉산탈춤의 경우 기본 의상은 오방색의 원동에 삼색 소매를 단 화려한 더거리(더그레)를 입고, 옷깃색의 띠를 띠며 소매에는 흰 한삼(汗衫)을 다는 데 비하여, 강령탈춤의 의상은 주로 회색 칡베장삼을 공통으로 입고 그 홍태기(큰 소매)는 길어서 팔을 내리면 땅에 닿을 정도이다.

영남의 오광대·야류의 의상과 소도구도 대체로 조선 후기 이래의 그것과 같으나 통영오광대의 홍백양반은 가면 왼쪽 반은 희고, 오른쪽 반은 붉은데 도포도 가면에 상응하는 홍백 두 색으로 되어 있고, 곰보양반(손님탈)은 ‘강남서신사명(江南西神司命)’이라고 쓴 기를 드는 것 등이 특색 있는 의상과 소도구이다.

(1) 춤사위}} 탈춤의 춤사위는 이른바 ‘사위춤’이라 하여 기본 동작이 있는 경우와 즉흥적으로 ‘허튼춤’을 추는 경우로 나누어지는데, 대체적으로 해서지방과 경기지방의 탈춤인 경우 일정한 기본 동작이 있으나 여타 지방의 탈춤은 뚜렷한 기본 동작이 없으며, 영남지방의 탈춤인 경우 ‘배김새’라는 기본 동작이 하나 있을 뿐 모두가 ‘허튼춤’을 추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① 해서지방의 춤사위:㉠ 취발이춤(봉산탈춤)-트림사위·걷기·근경·돌림사위·허리재기·발뛰기·너울질. ㉡ 첫목중춤(봉산탈춤)-다리풀기·허리풀기·다리들기. ㉢ 팔목중춤(봉산탈춤)-불림·고개잡이·다리들기·제자리걸음·외사위·겹(곱)사위·양사위·앉아뛰기·외사위·앉아뛰기 겹사위·연풍대·까치걸음. ㉣ 말뚝이춤(강령탈춤)-우방진(右方進)·좌방진(左方進)·회우방진(回右方進)·회좌방진(回左方進)·곱사위·끈장차기·와병뛰기·어르기·코차기·고개잡이·세워뛰기·싸움사위·채찍놀림·이마치기·앉아뛰기·외돌사위.

② 경기지방의 춤사위:㉠ 팔목중춤(송파산대놀이)-건드렁·화장무·반화장무·여다지·긴여다지·곱사위·멍석말이·배치기·팔뚝잽이·수장잽이·깨끼리(1)·깨끼리(2)·깨끼리(3)·용트림. ㉡ 첫상좌춤(송파산대놀이)-합장재배·사방재배·팔뚝잽이·몰아치기·덜이잽이·거울보기. ㉢ 옴중춤(양주별산대놀이)-팔뚝잡이·사방치기·용트림·꺼뜩이·활개펴기·장단갈이(멍석말이)·짐거리·너울질·빗사위·고개잡이·깨끼·멍석말이·곱사위.

③ 영남지방의 춤사위:㉠ 원양반(元兩班)배김새(동래야류), ㉡ 말뚝이배김새(동래야류), ㉢ 말뚝이배김새(고성오광대), ㉣ 양반배김새(통영오광대).

(2) 춤의 특징}} 탈춤은 극의 내용과 탈의 표정을 살리는 동시에 극의 한 단원(과장)을 마무리짓는 구실과, 대사와는 관계없이 예술적이고 흥겨운 춤을 추기도 한다. 예를 들면, 해서지방의 탈춤 ‘팔목중춤’과 ‘취발이춤’, 그리고 ‘미얄할미춤’, 또 경기지방의 ‘팔목중춤’과 ‘목중춤’, 영남지방의 ‘문둥이북춤’에서 보여준 ‘배김새춤’이 그것이다.

그런데 춤사위를 지방별로 비교해 보면, 해서지방의 탈춤은 대체적으로 팔목중들의 사위춤(한삼춤)이 주축이 되어 있고, 대부분이 타령장단에 맞추어 추기 때문에 춤도 북방계의 영향을 받아 한삼의 휘돌림과 힘찬 도무(跳舞)로 짜여 있으며, 어느 지방의 춤보다 무폭(舞幅)이 커서 마치 악귀를 쫓아내는 듯한 전투무용적 성격을 띠고 있다.

여기에 비하여 경기지방의 탈춤은 비교적 춤사위가 다양하고 잘 정리되어 있으며, 주된 춤사위는 마디마디에 신명을 집어넣는 ‘거드름춤’과 몸의 마디마디로부터 신(멋)을 풀어내는 ‘깨끼춤’으로 대별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춤은 손을 내놓고 추기 때문에 손짓동작으로 된 춤사위가 많으며, 매듭이 확실한 타령장단을 쓰고 있기 때문에 동작도 맺고 끊는 매듭춤으로 되어 있고, 섬세한 맛과 코믹한 맛이 풍긴다.

또한 영남지방의 야류나 오광대춤을 보면 ‘배김새사위’를 주동작으로 하고 있을 뿐 별다른 춤사위가 없고 즉흥적인 허튼춤을 추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예능인들의 춤보다 더 민중적인 춤이 성행한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영남지방의 탈춤은 사물(四物)을 중심으로 한 농악 연주로 춤을 추기 때문에, 한층 흥이 나고 구수한 멋이 있다.

이러한 춤사위 중에서 몸짓춤을 분석해 보면, 첫째 방어적인 동작과 악귀를 격퇴시키는 무술적이고 체조적인 동작, 둘째 풍년을 기원하는 축원무와 농경 행위의 모방동작, 셋째 성행위를 상징하거나 모방한 동작, 넷째 여러 가지 동물과 사람의 흉내를 통한 풍자적인 묘사, 다섯째 부락인들의 단합을 위한 대동춤이 있다.

탈춤의 춤사위는 대체적으로 그 동작의 생성원리가 정신을 한 곳으로 모아 맺고, 그것을 어르다가 푸는 순서의 형식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점이며, 춤에 따라 동작의 시작과 종지가 뚜렷하게 나타난 매듭춤과, 시작과 종지가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은 유동적인 움직임의 춤들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춤사위는 탈이 신앙적이고 자연 모방적인 가면에서 사회가면과 예술가면의 성격으로 변모되어 오듯이, 춤 자체도 처음에는 자연의 모방과 농경 행위, 성행위 또는 귀신을 격퇴시키는 무속신앙과 결부된 행위였다.

그러던 것이 점차 탈놀이의 성격 변화에 따라 풍자적인 춤 등 민중들의 의지가 담긴 상징동작과 민중적 미감(낙천적)에서 나온 예술적 표현운동으로까지 변모 발달하여, 무용은 생명이 없는 가면에 생기를 넣어 강렬한 슬픔과 억눌림을 요동시키고, 나아가서는 환희와 자유의 세계로 승화시키고 있다.

즉, 탈춤의 특징은 서민의 생활경험을 무극적으로 엮어 가면서 한바탕 흥과 난장판을 이루어 감정을 풀어서 삶에 활력을 찾는 것이다.

오늘날 가면극은 유럽보다는 아시아지역에 많은 종류가 남아 있으나 중국에서는 벽지에 가면극의 전통이 남아 있고, 한국과 일본에 주로 남아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고전가면극인 노가쿠(能樂)와 교겐(狂言)이 직업 배우에 의해 상연되어 온 무대극인 데 비하여 한국의 가면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당놀이로 일관하였고, 일반 서민들에 의한 민속극으로서의 성격을 유지해 온 데 그 특색이 있다. 한국 가면극의 현대적 계승과 재창조는 이러한 본질 인식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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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대도감극성립의 제문제」(최정여, 『한국학논집』 1, 계명대학교, 1973)
집필자
이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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