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강 지류인 가평천변 강반대지 일대 약 300∼400㎡에 펼쳐져 있는 대규모 취락지로서, 가평읍에서 약 8㎞ 떨어져 있다. 이 유적은 6·25 한국전쟁 때 미군 소령 매코드(MacCord, H.A.)가 참호를 파던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그가 움집터들 중에서 하나를 긴급 발굴 정리하여 그 결과를 발표하여 ‘아미(Army)’의 A자를 따서 ‘에이블 유적(Able遺蹟)’이라고 명명하였다. 여기에서 채집한 유물을 현재 미국 국립자연사박물관에 보내 보관 중이다(유물번호 404367∼404389). 그 뒤 1969년 10월에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에서 다시 탐색갱(探索坑)을 넣어 유적의 범위를 확인하였다.
집자리가 조사된 유적지는 현재 논으로 되어 있는데, 전쟁 중에는 이곳에 여러 개의 참호를 팠으며, 그 때 최소한 5개의 움집터가 드러났다고 한다. 지층은 약 53㎝의 흑갈색 표토층 아래 38㎝ 정도의 노란 모래층이 있고, 그 아래는 자갈층인데 당시 주민들은 지표로부터 약 90㎝ 지점의 자갈층 바로 위에 놓인 모래와 진흙(粘土)·숯 등이 섞인 5㎝ 두께의 지층이 형성되던 시기에 살았다. 당시의 지표면, 즉 생활면은 노란 모래층의 표면이 된다. 움집터의 평면은 5×6.4㎡의 모줄임 네모모양[抹角方形]이며, 깊이는 노란 모래층의 두께가 38㎝이다.
움집터 한쪽 구석에 지름 1.2m 정도의 화덕자리[爐址]가 있는데, 냇돌을 둥글게 돌려서 만들었다. 화덕자리 중심부에는 5∼6㎝ 두께로 흙이 불에 타서 붉은 색을 띠고 있었고, 주위의 돌들도 불에 달아 금이 가 있었다. 벽선의 형태나 기둥구멍[柱穴]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나, 같은 성격의 유적인 춘천 중도유적(中島遺蹟)의 예를 보면 곧바로 선 벽과 기둥구멍이 바닥에 있어, 이 움집도 바닥에 기둥을 꽂아 지붕을 받쳤던 것을 알 수 있다. 화덕자리 내부와 그 부근에서 토기조각들이 발견되었고, 그 위에 길이서 96㎝ 정도, 지름 20㎝ 정도의 숯기둥이 나와 상당히 큰 재목으로 벽이나 기둥을 세웠던 것을 알 수 있다. 바닥 움집터의 일부를 후기의 주거지가 파고 들어가 서로 겹쳐져 있었다.
집자리에서 출토된 유물은 아가리[口椽部]가 밖으로 휜 납작바닥민무늬토기[平底無文土器]3점, 회청색 납작바닥항아리[平底壺] 1점, 절구형 납작바닥민무늬토기 1점, 문살무늬[格子文]의 김해식 둥근바닥항아리[圓底壺]1점, 두귀[雙耳]가 달린 김해식 토기시루[甑] 1점, 토제 대롱옥[土製管玉]1점, 토제 송풍관(土製送風管) 조각 등이 있었다. 석기로는 간돌도끼[磨製石斧]1점, 점판암제 슴베 간돌살촉 2점, 응회암제 반달돌칼[半月形石刀]조각 1점, 석제 가락바퀴[紡錘車]1점, 숫돌[砥石]조각 2점, 점판암조각 1점이 있었다. 기타 쇠찌꺼기[鐵滓]와 쇠조각[鐵片]이 있다. 곡식으로는 절구형 민무늬토기 안에서 2.4홉 가량의 밭벼(Malus manshurica)가 출토되었다. 또, 나중에 파고 들어간 움집에서는 높이 49.5㎝의 대형 신라토기식 둥근바닥항아리 1점이 출토되었는데, 토기조각을 조사해 본 결과 김해식 토기가 민무늬토기보다 압도적으로 많아 시기적으로 아래의 움집보다 약간 늦은 듯하다.
철제나 토제 송풍관이 움집터에서 출토되는 것은 부근에서 제철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시기적으로는 말기 민무늬토기와 물레[紡車]를 사용해 만든 김해식 토기가 같이 사용되었던 시기, 즉 민무늬토기에서 김해식 토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해당된다.
석기도 간돌도끼·돌살촉 등 전통적인 석기가 계속 사용되고 있으나, 수량이 현저히 적어지고 간돌도끼 1점 외에는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된 폐품으로서 석기가 없어져가고 있다. 대신에 야철(冶鐵) 흔적으로 보아 철기는 출토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제철기술의 습득으로 인해 철기가 보급,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경제생활에 있어서도 본격적인 농경생활이 시작되었는데, 토제 시루와 밭벼는 그 좋은 증거이다. 밖으로 휜 아가리의 민무늬토기는 한반도의 동북지방과 춘천을 비롯한 한강유역에 조밀하게 분포되어 있다. 김해식 토기에 새끼무늬[繩文]·문살무늬가 두드려져 있는 토기는 서북지방 유적에서 자주 보인다. 결국 이 유적은 종래의 민무늬토기 문화의 바탕 위에 북에서 내려온 본격적인 농경, 물레를 사용해 제작한 김해식 토기, 제철기술 등을 동원하여 이루어진 새로운 문화 양상을 보이며 본격적인 철기시대로 돌입한 유적으로 여겨진다.
가평 마장리유적은 한반도 중서부지역에서 최초로 확인된 제철유적으로서 중요한 위상을 지닌다. 이 유적의 연대는 발견자인 매코드가 숯의 일부를 미국 미시간대학에 의뢰해 1700±250B.P.으로 측정되어 서기 200년 경이라는 절대연대를 얻게 되었다. 이는 한국에서는 방사성탄소연대라는 측정방법을 최초로 사용하여 얻어진 절대연대이다.
한반도 중서부 제철유적은 강원도 춘천시 호반동 중도, 춘천시 서면 신매리, 가평군 북면 이곡 2리를 비롯하여, 북한강 유역을 따라오면서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금남리·문호리 일대와 서울의 풍납동에 이르는 한강 하류의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가평 마장리유적을 포함한 이들 제철유적들은 한강군(漢江群)이라고 하는 커다란 문화영역을 형성하고 있으면서, 청동기시대에서 초기철기시대로의 사회·문화적 전환기의 실상을 보여주는 최소 단위유적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