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합은 사신의 내왕에 사용되던 확인 표찰제도를 의미한다. 사행(使行)의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이루어지거나 사행을 빙자해 고의적으로 행해지는 무역을 감합무역이라 한다.
이는 14세기 말 이래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지역의 가장 보편적인 공무역의 한 형태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1404년부터 150여 년간 지속된 명나라와 일본 막부(幕府) 사이의 감합무역이다.
감합무역의 원리는 전통적인 중화 중심의 관념에 따라 중국의 주변국들이 중국의 황제에게 종속의 표시로 공물을 바치고 그 반대급부로 회사품(回賜品)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역 형태는 외교적 의례와 결합된 것으로 보통 조공무역이라 지칭된다.
조공무역은 주변국의 당사자들에게 많은 경제적 이익을 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본래의 종속적 의미에 상관없이 다투어 행해졌고, 직업 상인들과 해적들까지 조공을 위장하여 몰려들게 되었다.
이 때문에 중국 정부에서 통제책을 강구했는데, 그것이 곧 감합제도였다. 이는 조공을 원하는 주변국들의 통치자들에게 일정한 형태의 확인표, 즉 감합을 미리 발급하여 공식적인 사행에 지참시키고, 진위를 확인하여 상인이나 해적들의 조공 사칭을 방지할 수 있었다.
감합제도는 1383년 삼국에 대하여 처음 쓰기 시작한 이래, 동남아시아 50여 개국에 적용되었다. 감합은 본래 금속·상아·목제 등의 표찰에 글씨를 새긴 뒤 양분하여 한쪽은 보관하고 한쪽은 상대방에 발급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뒤에는 문서화하여 원장에 등록하고 계인과 일련 번호를 매겨 발급되었다.
명나라는 연호가 바뀔 때마다(보통은 황제의 교체시) 주변국들에게 새 감합과 저부(底簿)를 보내고 옛 감합과 저부는 회수하였다. 감합은 조공 횟수와 선박의 수 등을 고려하여 발부되었는데, 여기에는 선박·인원·화물의 수와 내왕기간·입항지·조공로 등이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명나라에 대한 사행이나 무역에는 감합의 확인 없이 일반 외교 문서만으로 대체되었다. 조선이 일본이나 여진족에 대해 허용한 무역도 감합무역의 일종으로서, 무역을 외교의 부수 행위로 간주하고 사무역을 엄격히 통제하였다. 조선의 교역 상대는 일본의 막부 뿐만 아니라 거추(巨酋)인 각 지방의 영주들과 대마도주 등 일본인들과 여진족의 여러 부족들이었다.
조선에서도 통신부(通信符)라는 이름의 감합이 일시적으로 발급되기는 했으나, 보통은 도서(圖書)·서계(書契)·문인(文引) 등의 문서가 공식 사신의 확인서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들도 발급·확인 절차 및 효용면에서 감합과 같은 기능을 가졌기 때문에 이들을 사용하는 무역을 감합무역이라 할 수 있겠다.
중국이나 조선에서 주변국들과 행한 감합무역은 무역 그 자체에서 이익을 추구하려는 것이라기보다 주변 민족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려는 외교적 목적에서 행해졌다.
그 가운데서 특히 왜구의 발호를 제도무역으로 수용하여 그들의 난동을 억제하려는 의도에서 행하여진 것이었다. 이러한 무역 체제는 1876년(고종 13) 개항으로 근대 무역이 시작될 때까지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