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천(南大川) 남쪽의 나지막한 산기슭에 위치하며, 1963년 관동대학에 와있던 한 서양인 리빙스톤(Living Stone)에 의해 그의 집 마당에서 확인되었다. 집터의 규모는 남북 5m, 동서 7.3m의 크기로 깊이는 현재의 지표에서 40㎝ 정도이다.
바닥 가운데에는 두 곳에 둥근 손바닥 크기의 돌을 둥글게 돌려놓은 직경 1m 가량의 화덕자리가 있다. 동북쪽 벽 아래로는 깊이 7∼5㎝의 홈이 있고 벽쪽과 바닥 한가운데에 탄화(炭化)된 기둥구멍이 있다. 다른 선사시대 집터에 비해 큰 편이며, 더욱이 출토된 유물이 풍부하고 다양하여 주목할 만하다.
유물은 주로 중심에서 동쪽과 서쪽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종류는 갈판 · 반달돌칼 · 돌도끼 · 돌칼 · 갈돌 · 돌낫 등의 농경구와 가락바퀴 · 돌살촉 · 간돌칼 · 청동살촉 · 철편 · 숫돌 · 토기파편 등의 생활용구가 있다.
이 중에서 특기할 것은 이미 흔적은 없어졌으나 활모양의 목탄편(木炭片)이 돌살촉과 함께 섞여 나온 점과, 청동살촉이 교란(攪亂)된 상태에서 나온 점이다. 간돌검은 무통이단병식(無樋二段柄式)으로 비교적 작고 짧은데 부장품이 아닌 집터에서 출토되었으며 실제로 사용하다가 날을 갈아서 쓴 흔적이 있다.
갈판과 갈돌은 완전하게 제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이 한 벌, 그리고 교란된 층에서 갈판이 3개 출토되었다. 대체로 갈판은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예가 적어 크게 성행하지 못하고 목재의 절구가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논의되어 왔으나, 이 포남동주거지에서의 갈판 출토로 보아 널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농경에 관계되는 반달돌칼도 차곡차곡 포개진 상태로 출토되고 있어 많은 양의 도구를 보관하고 사용한 사실을 짐작케 한다. 돌칼은 길이가 26㎝ 가량으로 현재 앞쪽의 날은 둔하나 다른 면은 날이 잘 남아 있다.
전체 길이의 3분의 1 가량은 너비가 좁아지고 검게 탄 흔적이 있어 나무나 뼈로 만든 자루를 끼워 쓰다가 불에 탄 것으로 보인다. 곡식을 자르거나 벗기는 도구로 썼을 것 같다. 그리고 낫모양의 석제칼은 경주 부근과 평양 부근에서 출토된 일이 있으며 일본의 북구주지방(北九州地方)에서도 보이고 있다.
이 포남동 것은 날이 ㄱ자형으로 외곡(外曲)한 쪽이 예리하게 남아 있어 바깥쪽으로 밀어나가면서 가죽같은 것을 벗기거나 털을 깎는데 쓰였을 것 같다. 석제원판(石製圓板)도 몇 개가 포개져 나왔고 그 위에는 가락바퀴가 얹혀져 있었다. 이 석판은 직경 22㎝ 크기의 점판암제(粘板巖製)로 가운데에 구멍이 있다.
북한지역에서도 알려진 예가 있는데 석화(石貨)가 아니면 석기재료〔石材〕일 것이라는 해석이다. 청동살촉은 단면이 능형(菱形)의 양익식(兩翼式)이고 둥근 자루〔柄部〕가 달려 있다.
이런 예는 경상남도 김해시 장유면 무계리 고인돌의 일괄유물에 보이고 있으며, 강원특별자치도 간성에서는 거푸집〔鎔範〕이 알려져 있어 시베리아 청동기문화의 전파 · 유입을 짐작케 한다.
대체로 이 유적의 청동촉은 동질(銅質)이 매우 무르고 조잡하나 외래의 것이라기보다는 그 지방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인정된다. 이것은 강원도에서 거푸집이 출토된 예로써 더욱 강하게 뒷받침되고 있다.
포남동 유적은 학술적으로 조사된 것이 아니고, 발굴자가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이 아닌 토지 사용자에 의해 발굴 · 채집된 것이다. 따라서 고고학 자료로서의 신빙성이나 가치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유물들의 원 위치가 확인되어 그 나름대로의 원상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