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강씨(晉州姜氏)의 족보에 그 시조로 알려진 인물이지만 『삼국사기』와 『구당서(舊唐書)』등 국내외 정사(正史)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597년(영양왕 8) 수(隋)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고구려를 신속시키고자 무례한 국서(國書)를 보내오자 강이식은 “이러한 오만무례한 국서는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대답해야 한다”면서 주전론을 제창하였다. 이후 고구려 조정 여론이 주전론 쪽으로 가닥을 잡자 수 문제가 고구려를 본격적으로 침공함에 따라 여 · 수전쟁(麗隋戰爭)이 발발하였다. 이때 강이식은 고구려의 최고 사령관인 병마원수(兵馬元帥)를 맡아 정병 5만을 이끌고 이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듬해(598) 대병력을 이끌고 요서(遼西)로 나아가 요서총관(遼西總管) 위충(韋沖)과 접전하다가 임유관(臨硝關)으로 거짓 후퇴하였다. 이에 수나라의 문제(文帝)는 30만 대군을 들어 한왕(漢王) 양량(楊諒)을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으로 삼아 임유관으로 보내고, 주나후(周羅糉)를 수군총관(水軍總管)으로 삼아 바다로 출행시키면서 평양으로 출전한다고 성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략은 양선(糧船)을 이끌고 요해(遼海)로 들어와 양량의 수나라 대군에게 군량을 공급해주려는 속임수 전략이었다. 병마원수인 강이식은 이를 간파하고 수군으로 바다에 나아가 주나후의 군량선을 격파하였다. 이어 군중(軍中)에 벽루(壁壘)를 지키라고 명하여 출행하지 않으니 수나라 군사들은 양식이 점차 떨어지고, 그때가 마침 6월 장마철이라 기아 · 질병으로 인하여 수군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었다. 이 때를 기회로 강이식은 총공격을 가하여 수나라 군사들을 거의 섬멸하고, 군자(軍資) · 기기(器機) 등을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강이식이 진두지휘한 임유관전투의 대승리로 인하여 수나라 문제 정권은 몰락하였으며, 고구려가 요동 지방을 안전하게 확보한 채 대수전쟁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강이식의 묘는 과거 요녕성 무순시 장당현 고려영자촌 원수림역 뒤편에 있었는데, 중국의 문화대혁명 때 묘가 훼손되어 현존하지 않는다. 경상남도 진주시 상봉서동 봉산사(鳳山祠)에서는 해마다 음력 3월 10일에 그를 제향하고 있다. 신채호(申采浩)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 강이식 장군의 활동 모습이 실려 있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 『서곽잡록(西郭雜錄)』과 『대동운해(大東韻海)』에 실린 것을 인용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