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공국사탑의 원래 위치는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에 있는 거돈사지 사역의 북쪽 경계 부근이다. 일제 강점기에 경성으로 반출되어 일본인이 소유하고 있었는데, 해방 후인 1948년 경복궁으로 옮겨졌고 현재는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다.
원공국사(圓空國師) 지종(智宗)은 930년(태조 13)에 출생하여 1018년(현종 9)에 88세로 입적한 고려 전기의 고승이다. 그는 17세 때 영통사에서 수계를 받았다. 30세가 되는 해인 859년(광종 10)에 고달원의 증진대사 찬유가 꿈에 나타나 중국 유학을 권하여 오월국(吳越國)에 유학을 갔다. 41세가 되는 해에 다시 찬유가 꿈에 나타나 귀국을 종용하자 고려로 돌아왔다. 이후 광종의 환대를 받고 대사(大師)가 되어 금광선원에 거주하였다. 지종은 광종·경종·성종·목종·현종대까지 왕의 보살핌을 받았으며 84세인 1013년(현종 4)에는 왕사(王師)에 제수되었다. 87세인 1016년(현종 7)에는 질병으로 하산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하기도 하였다. 2년 후 1018년(현종 9) 4월에 왕에게 하직하고 거돈사로 하산하여 4월 17일 입적하고 4월 22일 장례를 치렀다. 입적 후에 원공국사로 추증되었다.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은 평면 팔각으로 팔각원당형의 신라 승탑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단정하고 균형잡한 형태에 장식은 격조가 있다. 중대석 문양과 세부적인 치석수법의 차이를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흥법사지 진공대사탑을 모방하고 있다. 이 승탑은 지종이 입적한 직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탑비는 1025년(현종 16)에 건립되었다. 원공국사탑이 거돈사 밖으로 반출되었을 때 지대석은 함께 이동하지 않았는데, 지대석 2매는 원래의 자리에 남아있다. 하대석은 팔각이며 하대 하석에는 면마다 안상이 조식되어 있다. 안상 하단 중앙에는 화문이 솟아오르게 조각되어 있고 하대 상석에는 복련이 표현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흥법사지 진공대사탑에 비하여 평면적이다. 중대석 면석에는 안상이 새겨져 있으며 8기의 안상 내부에는 발목을 겹치고 있는 팔부중상이 조각되어 있다. 상대석은 세 겹으로 연판이 겹친 앙련이며 연판 내부에는 화려한 화문이 조식되어 있다. 상대석 상면에는 2단의 탑신괴임이 조출되었으며 팔각의 탑신석이 그 위에 있다.
탑신석은 정면과 후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비(門扉)를 조각하였다. 그리고 정문의 문비 위에는 탑호명인 ‘원공국사승묘지탑(圓空國師勝妙之塔)’을 양각해 놓았다. 문비의 양 측면에는 사천왕상을 배치하였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살창을 조각하였다. 고려 중기에 판각된 초조대장경의 「어제비장전변상도」에는 석가여래를 호위하는 사천왕상들이 조각되어 있다. 이 사천왕상과 원공국사탑을 비교해 보면, 여래를 중심으로 칼을 든 서방 광목천, 창을 든 북방 다문천의 순서가 그대로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사천왕상의 신체는 양감이 배제되어 있지만, 얼굴에는 양감이 집중되는 특징이 나타난다. 이처럼 상호 표현에 양감이 강하게 표현되는 양식은 11세기 초반경 정착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원공국사탑의 옥개석은 전각형이다. 옥개석 하부에는 4단의 받침이 조출되어 있으며 서까래를 사실적으로 조성하였다. 옥개석 상면에는 기와의 지붕골이 선명하게 표현되어 있고 지붕마루 끝자락에는 망새가 조각되어 있다. 옥개석 위에는 흥법사 진공대사탑과 유사한 형태의 보개가 있으며 보개 상면에는 보주가 있다.
고려시대에는 광종 사후 경종·성종·목종대까지는 승탑이 조성되지 않았다. 원공국사탑은 고려 초 석조미술의 전통이 잠시의 휴지기(休止期)를 거친 후 조성된 승탑이다. 이 승탑은 인근 사찰에 있었던 흥법사지 진공대사탑,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과 더불어 고려 전기 석조미술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