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은 4인이다. 정규직이 아닌 잡직으로서, 5∼9품에 해당하는 서반 체아직을 받고 규장각에서 일하였다. 규장각이 설립된 지 3년 뒤인 1779년(정조 3) 규장각 외각인 교서관에 처음 설치되었다가 1781년 내각인 규장각으로 옮겨졌다.
이 관직은 특별히 서얼 출신들을 위해 마련되어, 명문가의 서얼 가운데서 학식과 재능이 탁월한 자들로서 임명하였다. 결원이 생기면 전임 검서관들이 2인씩 후보자를 추천, 제학(提學) 이하의 규장각의 관료들이 시험을 보여 선발했는데 문장력과 필체를 중시하였다.
주요 직무는 규장각의 관료들을 보좌해 서적을 검토하고 필사하는 일이었다. 그 밖에 왕들의 초상화 관리, 절일기거(節日起居 : 정월 초하루나 삼월 삼짓날 등과 같은 절일에 행하는 왕의 행사), 왕의 행차 수행 및 어제(御製)·일력(日曆)·일성록(日星錄)·명령문 등을 관리하였다.
1779년의 초대 검서관으로는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서이수(徐理修)가 선임되었는데, 이들은 당시 가장 명망있는 서얼 출신 학자들이었다. 이들의 검서관 임용은 탁월한 재능 때문이기도 했지만, 18세기 중엽 이후 서얼들의 차별 폐지 운동과 정조의 허통정책(許通政策 : 유능한 서얼들을 일정한 한도에서 관리로 등용한 정책)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임기는 30개월이었으며, 임기가 만료되면 그 중 2인을 홍문관에서 임의로 선발해 정원 외의 겸검서관(兼檢書官)에 임명하고 서반 체아직을 주도록 하였다. 겸검서관은 정원의 제한이 없었다. 이는 규장각의 인재 활용과 검서관의 신분 보장을 위한 조처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