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2년 7월 왕조 개창 직후 고려 경군의 근간이었던 2군6위와 태조의 친병이었던 의흥친군 좌·우위(義興親軍左右衛)를 합쳐, 십위군(十衛軍)으로 편성되었다. 1393년 의흥삼군부로 개편되었다. 처음에는 십사(十司)로 구성되었으나, 1418년(태종 18)에 12사로 확대되었다. 이후 1422년(세종 4)에 10사로 환원되었다가 문종이 대리청정하는 1445년에 다시 12사로 늘어났다.
의흥삼군부는 조선 초기의 주력 경군으로서 처음에는 약 1만 6000인의 규모였으나, 1448년에 약 2만 8000인 정도로 증강되었다. 그중 약 2000인 규모의 갑사(甲士)들이 핵심 병력을 이루고 있었다.
1451년(문종 1) 중앙군 편제는12사에서 5사로 개편되었고, 이것은 1457년(세조 3) 오위로 개칭되어 조선 전기 경군의 근간이 되었다.
오위는 중위(中衛 : 義興衛)·좌위(左衛 : 龍驤衛)·우위(右衛 : 虎賁衛)·전위(前衛 : 忠佐衛)·후위(後衛 : 忠武衛)로 편제되었는데, 각기 지방에서 모집된 군사와 서울 오부의 군사로 혼합, 편성하였다.
오위는 또 각기 오부(五部)로 편제되고, 각 부는 다시 사통(四統)으로 편제되었다. 오위의 위에는 오위도총부라는 통합사령부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밖에 특수경군으로서 내금위(內禁衛)·겸사복(兼司僕)·우림위(羽林衛) 등의 금군(禁軍)이 설치되어 있었다. 각기 200인·50인·50인 정도의 소규모 부대들이었으나 궁궐의 경비와 왕의 호위를 맡은 정예 근위병들이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오위가 유명무실하게 되고, 새로이 오군영(五軍營)이 창설되어, 실제적인 경군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들은 각기 서울 및 경기지방의 방어와 궁성의 수비를 위하여 설립되었고, 어영청은 한때 북벌 준비의 주력 부대로 양성되기도 하였다.
내금위·겸사복·우림위 등의 금군은 금군청(禁軍廳)으로 통합되었다가 뒤에 용호영(龍虎營)으로 개칭되었는데, 총 700인 규모로 증강되었다. 그 밖에 호위청(扈衛廳)·별군직청(別軍職廳) 등의 근위 부대가 창설되기도 하였다.
조선 말기에 이르면 오군영도 무력하게 되어, 개항 후에는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御營)의 두 영으로 통합되었다. 또 별기군(別技軍)이라는 신식 군대가 창설되었으나 곧 폐지되었다. 1895년에는 경군을 전면 개편하여 친위대와 진위대(鎭衛隊)로 만들고, 근대적 군대로 양성하고자 했으나 여러 가지 파란을 겪은 끝에 1910년 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