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한 궁궐 생활에 젖어 있는 통치자로 하여금 백성들의 생활을 이해시켜 스스로 근검절약하게 하고 바른 정치를 하도록 힘쓰게 하기 위한 감계적(鑑戒的)인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백성들의 생업인 농업과 잠직업(蠶織業)의 풍속을 월령(月令) 형식으로 읊은 『시경(詩經)』의 빈풍칠월편(豳風七月編)의 내용에서 유래하였다. 중국의 남송 때 시어잠(時於潛)의 현령을 지낸 누숙(樓璹)이 송고종에게 바치기 위하여 처음 그렸다고 하여 「누숙경직도(樓璹耕織圖)」라 하였다.
「누숙경직도」가 우리나라에 처음 전래된 시기는 1498년(연산군 4)이다. 성현(成俔)이 지은 「봉교경직도후서(奉敎耕織圖後序)」에 의하면, 정조사(正朝使) 권경우(權景佑)가 명나라로부터 가져온 「누숙경직도」를 성현이 연산군에게 바쳤다고 한다. 그리고「누숙경직도」를 청나라 때 다시 만든 것이 「패문재경직도(佩文齋耕織圖)」이다. 그 영향을 받아 김두량(金斗樑)이 1744년(영조 20)에 제작한 「사계도 (四季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가 전하고 있어 18세기 초나 중엽에는 「패문재경직도」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에는 판화인 「패문재경직도」가 병풍 형식으로 만들어지고 조선화됨에 따라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보급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즉 「패문재경직도」의 구성과 기법을 토대로 하되 소재는 우리나라 인물과 풍속으로 대체된 경직도가 제작되었다. 그리고 원래 왕실용으로 쓰이던 「경직도」가 일반인의 수요에 의하여 만들어져 민화(民畵)에서도 많이 취급되었다. 19세기에 쓴 「한양가(漢陽歌)」에도 경직도 병풍이 당시 서화시장의 주요한 매매 품목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 후기에 성행한 풍속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김홍도(金弘道)의 풍속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필자미상의 「패문재경직도병풍(佩文齋耕織圖屛風)」과 필자미상의 「경직도팔곡병(耕織圖八曲屛)」 등을 들 수 있다.
『시경』의 빈풍칠월편의 내용을 그린 빈풍칠월도(豳風七月圖)를 보다 체계화시켜 경작도(耕作圖)와 잠직도(蠶織圖) 2권으로 구성된 경직도가 제작되었다. 이 경직도는 경작도 21장면과 잠직도 24장면 등 모두 45개 장면이 그려져 있다. 대개 각 장면의 왼편에 오언율시의 경직시(耕織詩)를 전서체(篆書體)로 써서 배치한 두루마리 형식으로 되어 있다.
경작도는 제1도 침종(浸種: 씨 불리기)으로부터 시작하여 경(耕: 논갈이), 파욕(耙褥: 거친 써레질), 초(耖: 고운 써레질), 녹독(碌碡: 고무래질), 포앙(布秧: 씨 뿌리기), 어음(淤陰: 거름주기), 발앙(拔秧: 모찌기), 삽앙(揷秧: 모심기), 일운(一耘: 애벌 김매기), 이운(二耘: 두벌 김매기), 삼운(三耘: 세벌 김매기), 관개(灌漑: 물대기), 수예(收刈: 벼베기), 등장(登場: 볏단 쌓기), 지수(持穗: 도리깨질), 시양(簛揚: 벼 까부르기), 농(礱: 맷돌 갈기), 용대(舂碓: 방아 찧기), 여(麗: 채거르기), 입창(入倉: 창고에 들이기)의 순으로 되어 있다.
잠직도는 욕잠(浴蠶: 누에알 씻기), 하잠(下蠶: 떨어 놓기), 위잠(餧蠶: 누에 먹이기), 일면(一眠: 첫 잠), 이면(二眠: 두 번째 잠), 삼면(三眠: 세 번째 잠), 분박(分箔: 잠상 나누기), 채상(采桑: 뽕잎 따기), 대기(大起: 잠깨기), 제적(提積: 걸어 쌓기), 상족(上簇: 올림), 구박(灸箔: 잠상 막기), 하족(下簇: 내림), 택견(擇繭: 고치 고르기), 교견(窖繭: 고치 저장), 연사(練絲: 실 뽑기), 잠아(蠶蛾: 누에나방), 사사(祀謝: 제사), 낙사(絡絲: 실 감기), 경(經: 세로짜기), 위(緯: 가로짜기), 직(織: 베짜기), 반화(攀花: 무늬넣기), 전백(剪帛: 비단 자르기)의 순으로 되어 있다.
경작도는 화면의 3분의 2쯤의 지점을 가로지르는 논길을 기준으로 그 아래 펼쳐지는 논을 배경으로 표현되어 있고, 잠직도는 실내 공간임을 암시하는 집의 구조물을 배경으로 그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