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여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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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
1908년에 공포된 <고등여학교령>에 따라 설립된 여성중등교육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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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08년에 공포된 <고등여학교령>에 따라 설립된 여성중등교육기관.
내용

<고등여학교령>에 의하여 1908년 최초의 관립 여자교육기관으로 한성고등여학교(漢城高等女學校)가 설립되었다.

뒤이어 1909년 학부령(學部令)으로 <고등여학교령시행규칙>이 제정되었다. 동여학교령과 시행규칙에 의하면, 고등여학교는 여자에게 필요한 고등보통교육과 기예(技藝)를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수업연한은 3년으로 되었으나, 지방사정에 따라 1년 더 연장할 수 있도록 하였다. 3년제의 본과 외에 각각 2년 이내의 예과(豫科)나 2년 이상의 기예전수과(技藝專修科)를 두었다. 예과는 보통학교 2년수료 이상의 학력을 가진 10세 이상의 여자를 수용하여 보통학교교육을 완성하게 하고, 기예전수과는 15세 이상의 여자를 수용하여 주로 가사를 비롯한 실과교육을 시켰다.

그러나 당시에는 보통학교교육을 받은 여학생은 드물어, 개교 초에는 전혀 교육을 받지 않은 여아들이 주로 입학하였다. 교과목은 수신·국어·일어·역사·지리·산술·이과·가사·도화·재봉·음악·체조·수예·외국어 등으로 구성되었다. 외국어는 영어·법어(法語:프랑스어)·독어(獨語)·한어(漢語) 중에서 택일하게 하였고, 1·2학년의 주당 수업시간은 27시간, 3학년은 26시간이었다.

1910년 이후 일제의 식민지통치가 본격화되자, 여성교육에서도 대폭적인 개정작업이 추진되었다. 1911년 8월에 공포된 <조선교육령>에 따라 종래의 고등여학교는 여자고등보통학교로 개명되었다.

<조선교육령>에서는 여자고등보통학교의 입학자격을 12세 이상으로서 수업연한 4년의 보통학교를 졸업한 자, 또는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로 규정하고 수업연한을 3년으로 하였다. 또한, 기예과를 두어 12세 이상의 여자에게 재봉 및 수예를 전수할 수 있도록 하고, 수업연한은 3년으로 하였다.

관립 여자고등보통학교에는 사범과를 두어 보통학교의 교원이 되려는 자에게 필요한 교육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수업연한은 1년으로 하였다. 여자고등보통학교는 일본인의 고등여학교와 차등을 둔 일종의 복선형 교육제도로서 운용되었다. 또한 일제는 고등보통학교를 통해서 그들의 신민화교육(臣民化敎育)·우민화교육·일본어 보급의 교육방침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당황한 일제는 소위 문화정책을 표방하고, 1922년 2월 교육령을 전면 개정하여 제2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였다. 제2차 <조선교육령>에서는 여자고등보통학교의 수업연한을 5년 또는 4년으로 규정하여, 종래 3년의 수업연한을 다소 연장하였다. 교과목은 한국어를 필수과로, 한문을 수의과로 하는 외에 기타는 일본의 고등여학교에 준하도록 하였다.

또한, 특별한 사정이 있을 때는 관립 여자고등보통학교에 사범학교 제2부 연습과(練習科) 또는 강습과(講習科)를 부설할 수 있도록 하였다. 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자, 또는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이 있는 자에게는 사범학교 연습과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이와 같이 제2차 <조선교육령>에서는 표면상 일본 학제와 유사하게 함으로써 문화적인 회유정책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교과목에서 일어의 비중을 크게 높이는 등, 한국인을 완전히 일본화, 신민화하려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었다.

그 뒤 일제는 철저한 내선일체(內鮮一體)를 획책하는 제3차 <조선교육령>을 1938년 3월에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여자고등보통학교는 다시 고등여학교로 개칭되었고, 고등여학교는 고등과·전공과 또는 보습과(補習科)를 두었다. 수업연한은 4년 내지 5년으로 하여 고등과와 전공과는 2년 내지 3년, 보습과는 2년 이하로 하였다. 교과목은 수신·공민·교육·일본어·역사·지리·외국어·수학·이과·실업·도화·가사·재봉·음악·체조 등이었다.

외국어는 중국어·독어·프랑스어 또는 영어로 되어 있었으나 수의과목으로 하였다. 종래 가설과목이었던 교육과 실업은 필수과목이 되었으며, 그 밖에 국어와 수예는 수의과목 또는 선택과목으로 하였다.

특히, 수신·공민·일본어·역사 등의 교과목에서는 이른바 황국신민화의 방책으로 설정한 국체명징(國體明徵)·내선일체·인고단련(忍苦鍛鍊) 등의 교육의 3대강령이 집중적으로 교수되었다. 입학자격을 보면, 수업연한 6년의 심상소학교 졸업자이거나, 12세 이상으로 고등여학교에서 시행하는 시험에서 합격한 자로 규정하였다.

1940년 고등여학교의 학교수는 44개교, 학생수는 1만161명이었다. 1935년 당시와 비교해보면 학생수는 6,047명에서 1만161명으로 4,000명이 증가한 데 비하여, 관·공립 학교수는 19개교에서 16개교로 감소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당국이 초등교육에만 치중하였고 그 이상의 교육에는 관심이 없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관·공립 고등여학교 외에 1943년 당시 12개교의 사립 고등여학교가 있었으며, 재적생은 6,511명이었다. 이 고등여학교는 광복 당시까지 존속되었다.

참고문헌

『韓國新敎育史』(吳天錫, 現代敎育叢書出版社, 1964)
『韓國近代敎育史』(孫仁銖, 延世大學校 出版部, 1971)
『朝鮮敎育問題管見』(大野謙一, 朝鮮敎育會, 1936)
집필자
손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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