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창기 서양화가들인 정규익(丁奎益), 박영래(朴榮來), 강진구(姜振九), 김석영(金奭永), 나혜석(羅蕙錫), 이숙종(李淑鍾), 김명화(金明嬅) 등이 신미술 운동의 일환으로 1923년 9월에 발족시켰다. 발족 직후 회원 작품전을 가졌다. 창립 전에 이미 전통적 서화 작품의 찬조 출품이 있었지만 제2회전을 준비하던 과정에서 전통화가들도 받아들이기로 하는 등 미술회의 성격이 변화하였다. 연구소 개설 및 운영문제가 제기되어 재산가로 서화애호가였던 이용문(李容汶)이 건물을 제공하는 후원자로 나서자 문호가 개방되었다.
그러자 정규익 등은 서울화회라는 서양화가들만의 모임을 다시 만들고, 1923년 12월인천에서 첫 전람회를 가졌다. 반면 고려미술회는 고려미술원으로 명칭을 바꾸고, 1924년 초부터 연구소를 운영하였다. 1924년 10월 고려미술원은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회관에서 두 번째의 동인 및 연구생 작품전람회를 가졌다.
청소년 미술학도를 대상으로 한 이 종합연구소의 실기지도는 처음에는 김은호(金殷鎬)와 변관식(卞寬植)이 전통 수묵화와 채색화를, 서양화부의 소묘와 유화는 정규익, 박영래, 강진구, 나혜석, 이종우(李鍾禹) 등이 맡았으나, 얼마 뒤부터는 김은호와 이종우가 전임으로 연구생들을 지도하였다.
1925년에 이르러 김은호는 동경(東京)으로, 이종우는 파리로 각각 유학을 떠나게 되자 연구소는 문을 닫게 되고, 고려미술원 자체도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