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신사 ()

고대사
유적
삼국시대, 일본 사이타마현[埼玉縣] 히다카시[日高市]에 있는 고구려계 이주민이 세운 신사(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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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고려신사(高麗神社)는 일본 사이타마현[埼玉縣] 히다카시[日高市]에 있는 고구려계 이주민이 세운 신사(神社)이다. 고구려 이주민의 수장이었던 약광(若光)을 비롯하여 천손이 강림할 때 길을 안내한 사루타히코노미코토[猿田彦命] 신인(神人), 그리고 삼한정벌의 전설이 있는 진쿠왕후[神功王后]가 신라로 출정할 때 영혼의 매개자적 역할을 한 중신인 다케우치노스쿠네[武內宿禰]를 제신(祭神)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사례로 이용되기도 했지만, 오늘날은 한일 문화 교류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정의
삼국시대, 일본 사이타마현[埼玉縣] 히다카시[日高市]에 있는 고구려계 이주민이 세운 신사(神社).
창건과 전승

사전(社傳)에 의하면, 716년에 이곳 고려향(高麗鄕)으로 이주한 고구려인들의 수장인 약광(若光)이 군민들의 번영을 위하여 천손이 강림할 때 길을 안내한 사루타히코노미코토[猿田彦命] 신인(神人)과 삼한정벌의 전설이 있는 진쿠왕후[神功王后]가 신라로 출정할 때 영혼의 매개자적 역할을 한 중신인 다케우치노스쿠네[武內宿禰]를 모시고 시라히게명신[白鬚明神]이라 한 것이 이 신사의 시초라고 한다. 그리고 약광이 죽은 다음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영묘(靈廟)를 세우고 그를 고려명신(高麗明神)이라 하였는데, 훗날 시라히게명신과 고려명신을 합하여 고려대명신(高麗大明神)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기록을 뒷받침하는 문헌으로 『속일본기(續日本記)』가 있다. 그 내용에 따르면, 716년 5월 관동지역(關東地域)에 산재하여 있던 고구려 계통의 이주민 1,799명을 무사시노쿠니[武藏國]로 이주시켜 고마군[高麗郡]을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현재에도 이 신사의 사제직을 대대로 계승한 것을 기록한 고려씨족의 가계도가 전해지고 있다. 그중 한 권은 1259년에 일어난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가 다시 복원된 것이다. 이에 의하면 사제직을 대대로 계승한 고려씨족들의 선조는 약광왕(若光王)의 적류(嫡流)임을 알 수 있다. 현 궁사(宮司)는 제60대인 코마후미야스[高麗文康]가 맡고 있다.

근대 이후

근대 이전까지 일본에서 이 신사는 지역의 신을 모시는 수많은 지방 신사의 하나에 불과하였다. 그러던 것이 근대로 접어들면서 일본은 물론 조선에까지 크게 주목받는 곳이 된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웠던 조선총독부가 고대로부터 한반도 출신 사람들이 일본에 동화되어 살아가고 있는 증거로서 고려씨족과 이 신사를 이용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20년대에 들어 조선 지도층들에 대한 일본의 협력을 확대할 목적으로 일본의 발전상을 견학시키는 내지시찰단(內地視察團)을 파견하는데, 그 방문지로서 이 신사도 포함한다. 그리고 1920년 5월 일본에 파견된 내지시찰단의 모습을 영화로 제작하여 동년 7월까지 조선의 17개소에서 상영하였는데, 당시 관람자 수가 6만 8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를 통해 이 신사의 존재가 조선에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조선인 내지시찰단과 관광단 등의 신사 방문이 계속되었다. 또 1925년 3월에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사이토마코도[斎藤実], 1940년 6월에는 제7대 조선총독 미나미지로[南次郎], 1942년 11월에 영친왕 이은(李垠) 등 당대 조선 최고의 정치가들의 방문이 있기도 하였다. 또 1940년 4월에는 조선 경성의 조선 신궁에 고려 신사에서 보내온 벚나무를, 그리고 고려 신사에는 조선 신궁에서 보내온 오엽송을 각각 신목(神木)으로 심는 신목교환(神木交換)이 이루어진다. 이는 내선일체에 관한 종교적인 의례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이 신사는 근대에 들어 조선총독부의 내선일체 정책에 이용되면서, 그 상징과도 같은 위상을 얻으며 일본의 중요 신사의 하나로 성장하였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진 이후 현재까지 이 신사는 한일 문화 교류의 장소로서 역할하고 있다. 특히, 사이타마현민단 본부의 주최로 이곳에서는 매년 10월 하순에 ‘10월의 마당[シオルノマダン]’이라는 행사가 열리고 있는데, 여기서는 다양한 한국 음식과 사물놀이 등의 한국 전통 문화가 일본 현지인들에게 소개되고 있다. 또한 신사의 경내에는 2005년 한일국교정상화 40주년을 기념하여 재일본대한민국단(在日本大韓民国民団)이 기증한 우리나라 장승 한 쌍이 세워져 있다. 본래 1992년부터 나무로 만든 장승이 기증 · 설치되어 왔으나 그것이 부식 · 파손되어 2005년에 화강암으로 다시 만들어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문화유산

문화유산으로는 1211∼1218년까지 약 7년 동안 필사한 『대반야경(大般若經)』과 17세기에 건립된 고려가주택(高麗家住宅), 도은구신조문장이윤태도(鍍銀鳩榊彫文長履輪太刀), 고려씨계도권자(高麗氏系圖卷子)가 보관되어 있다.

참고문헌

원전

『角川日本地名大辭典』(埼玉縣編, 角川書店, 1980)
『日本古代史と朝鮮文化』(金達壽, 筑摩書房, 1976)
『歸化人』(令井啓一, 綜藝舍, 1974)

논문

사토 아쓰시, 「근대기의 고마신사[高麗神社] : 근대에 이용된 고대」(『동아시아고대학』 46, 동아시아고대학회, 2017)
糟谷 政和, 「高麗神社と高来神社」(『茨城大学人文社会科学部紀要. 人文コミュニケーション学論集』 2, 2018.03.)
斎藤 厚, 「近代の高麗神社」(『Mathesis Universalis』 18, 2016)
高麗 文康, 「高麗神社の創建と参拝者」(『古代朝鮮文化を考える』 16, 2001)

인터넷 자료

기타 자료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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