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 본관동 고분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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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본관동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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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에 있는 삼국시대 가야의 돌덧널무덤 · 구덩식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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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에 있는 삼국시대 가야의 돌덧널무덤 · 구덩식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내용

고분군이 위치한 곳은 고령지역의 중심고분군인 지산동(池山洞) 고분군으로부터 북으로 약 2.5㎞ 떨어져 있다. 소가천(小伽川) 하류의 넓은 농경지를 앞에 둔 높이 240m의 야산 정상에 지름 25m의 대형 봉토분 1기를 비롯하여, 동쪽으로 뻗어 내린 세 줄기 능선상에 지름 10∼20m인 중·대형 봉토분 39기와, 이 능선의 사면과 말단부 능선상에 돌덧널무덤 300여 기가 분포한다. 1983년 계명대학교박물관에서 북편 능선에 있는 중·대형 봉토분 3기와 돌덧널무덤 9기를 발굴 조사하였다. 발굴 조사된 것은 모두 구덩식[竪穴式]의 돌방 또는 돌덧널이었다.

그리고 3기(34·35·36호분)의 대형분은 모두 으뜸덧널[主槨]과 딸린덧널[副槨]이 ‘11’자형으로 배치된 주부곽식(主副槨式)이었고 나머지 소형묘는 외덧널식[單槨式]이었다. 봉토분의 으뜸덧널들은 능선상에 수직으로 파낸 무덤구덩이에 구축된 지하식 또는 반지하식이었다. 돌덧널의 네 벽은 편평하게 다듬은 깬돌[割石]로 모서리를 엇물리게 쌓았고 위에는 9-15매의 편평석을 연결하여 덮었다. 돌덧널의 바닥에는 36호분의 경우 강자갈[川石]을 깔았으나 나머지 2기는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았다. 돌덧널의 중앙부에는 피장자를 안치한 덧널[木槨]을 두었으며 나머지 공간에 많은 유물을 부장한 듯하나 모두 도굴되어 매납원상을 확인할 수 없었다. 돌덧널의 크기는 길이, 너비, 높이가 6∼10×1.3×1.5m 내외로 평면형태가 세장방형(細長方形)이다. 으뜸덧널과 나란히 배치된 딸린덧널은 순장덧널로 그 축조수법은 으뜸덧널과 유사하다. 이 딸린덧널들은 으뜸덧널보다 규모가 작아 1.7∼5.1×0.5∼1.0×0.3∼1.0m 내외이고, 그 상면(上面)의 레벨이 으뜸덧널과 같아 바닥의 레벨이 으뜸덧널보다 높게 설치된 지상식이다. 딸린덧널들에도 수 매의 편평석을 연결하여 뚜껑을 하였다. 봉토는 인근에서 채취되는 점토질의 산토를 사용하여 쌓아올렸는데, 지형상 지반이 낮은 부분에는 깬돌을 즙석식(葺石式)으로 덧쌓아 수평을 잡으면서 쌓은 특징이 있고 일부 판축(版築)기법이 보인다. 둘레돌[護石]은 발견되지 않았다. 소형묘들 역시 모두 구덩식돌덧널이다. 이것들은 봉토분과는 달리 경사면에 배치된 것으로 등고선과 나란하게 장축을 취하고 있다. 그 구조는 깬돌을 사용하여 5.0×0.8×1.2m 내외의 세장한 평면형태로 축조한 것과 깬돌과 작은 판석을 혼용하여 2.0×0.5×0.6m 내외의 소형으로 축조한 2가지의 유형으로 나누어지며 모두 반지하식이다. 유실이 심하여 뚜껑돌이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고 바닥은 대부분 맨바닥이나 편평하게 깬돌을 전면 또는 부분적으로 깐 것도 있다(H, I곽). 그리고 깬돌로 축조한 돌덧널의 내부에 판석으로 조립한 돌널(石棺)을 안치하고 돌널의 바닥에만 깬돌 조각을 깐 특수한 것도 있었다(E곽).

고분군 전체가 극심한 도굴의 피해를 입어 많은 유물이 이미 유출되었으나, 굽다리접시·뚜껑접시·손잡이항아리·그릇받침 등의 토기류, 갑옷·큰칼·손칼·화살촉 등의 철제무기류, 낫 등의 농공구류, 재갈 등의 마구류, 금제귀고리 등의 장신구류가 출토되었다. 기본적인 유물의 조합상과 유구의 구조는 대가야의 중심고분군인 지산동 고분군의 그것을 따르고 있으나, 토기류 중 목항아리나 항아리 등 몇 점은 성주(星州) 성산동(星山洞) 고분군에서 출토되는 양식이어서 대외 교류관계를 설명해 주고 있다. 유물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뚜껑굽다리접시가 출토되지 않고, 뚜껑접시가 주기종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고, 철기류로서는 손칼과 모형농공구로 보이는 끌모양[鑿形] 철기가 기본으로 부장되었다는 점이다. 이 고분군의 구조나 출토유물의 형태가 기본적으로는 불과 3㎞ 남쪽에 있는 대가야 치소지의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그것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장경호나 단경호 등 일부의 토기는 북쪽의 성주지역을 비롯한 낙동강 동쪽 지역의 요소가 섞여 있다.

한편, 각 고분의 규모, 입지와 배열 혹은 부장유물의 수·종류의 차이는 시대적인 변천에서 생겨난 것이라기보다는 상호간의 신분계층상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본관동고분군에서 발굴된 고분들은 출토유물로 보아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에 걸쳐 축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고분군을 축조한 집단은 고령 지산동 고분군 축조집단을 정점으로 한 대가야 지배세력집단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2)
『고령본관동고분군』(계명대학교박물관, 1995)
「고령본관동고분군발굴조사개요」(조영현, 『한국고고학연보』11,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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