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목곽묘(木槨墓)가 조사된 유적이다. 대가야읍에서 성주방향으로 국도 33호선을 따라 2㎞ 정도 가면 쾌빈리 정방마을에 이른다. 유적은 해발 80∼90m에 달하는 마을 뒷산의 능선 정선부와 사면에 분포한다. 유적의 북서쪽으로 본관동 고분군이 이어지고 동쪽으로는 대가천과 들판이 펼쳐져 있다.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현, 영남문화재연구원)에서 실시한 1995년의 발굴조사는 아파트 건립공사로 인해 파괴된 유적에 대한 수습조사였다. 발굴 결과, 목곽묘 3기와 석곽묘 10기가 확인되었다. 이곳에서 조사된 목곽묘는 모두 너비가 3m 정도의 대형이다.
제1호 목곽묘의 경우, 묘광은 잔존 길이 482cm, 너비 305cm, 깊이 95cm이다. 목곽의 규모는 잔존 길이 440cm, 너비 280cm이다. 봉토는 남아있지 않으나 내부의 함몰상태를 통해볼 때, 약간의 봉토는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목곽과 묘광 사이에는 점성이 강한 흙과 지름 10cm 내외의 천석을 채워 보강하였다. 목곽 상부에도 역시 천석을 덮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구의 바닥은 사질토를 3∼4cm 정도 깔고 천석과 할석으로 시상을 만들었다.
출토유물은 봉토 내 출토품과 목곽 내 부장품으로 나뉜다. 봉토 내에서는 대호 2점을 비롯해 발형기대 6점과 통형기대편, 유자이기가 출토되었다. 목곽 내에서는 발형기대와 장경호를 비롯해 도끼형 및 낫형의 모형농공구와 철촉 등의 철기류가 출토되었다. 특히 기대의 경우 모두 배신(杯身)이 깊은 발형(鉢形)인데 배신부(杯身部)와 대각부(臺脚部)의 높이가 비례하고, 배신부의 문양은 파상집선문(波狀集線文)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삼각거치문(三角鉅齒文), 격자문(格子文) 등도 보인다.
12호 목곽묘는 상부 유실되어 거의 바닥만 남아 있지만 암반을 굴착한 바닥면의 깊이가 1호 목곽묘에 비해 상당히 얕다. 바닥 또한 특별한 시설이 없으며 출토유물 등으로 보아 1호 목곽묘보다는 이른 시기의 묘제로 생각된다. 12호 목곽묘에 출토된 유물로는 양이부호(兩耳附壺)와 노형기대(爐形器臺)가 있는데, 이는 고령지역에서는 출토사례가 드문 경우라 할 수 있다.
석곽묘는 대부분 도굴 또는 유실되었다. 구조는 평면이 세장방형인 전형적인 가야지역의 석곽형태를 보여주며, 규모는 대체로 소형이다. 고령 쾌빈리 고분군에 대한 수습조사에서는 토기류 · 철기류 · 장신구 등 모두 15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고분군의 축조연대는 유구와 유물을 통해볼 때, 목곽묘는 5세기 전반으로, 석곽묘는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이 유적의 목곽묘는 고령 지산동 고분군과 본관동 고분군의 전단계 문화상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대가야 고분군의 형성과정을 해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석곽묘는 고총으로 구성된 목곽묘와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이 단계의 본 고분군은 지산동 · 본관동고분군 집단에 소속된 하위계층의 분묘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곳에서는 무문토기들도 다수 채집되는 것으로 볼 때, 이 지역에는 앞선 시기의 청동기시대 주거지도 함께 분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