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구곡도는 이이가 정계에서 물러나 은거하였던 황해도 해주 고산면에 있는 석담구곡(石潭九曲)의 경치를 읊은「고산구곡가」를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이이가 1569년(선조 2) 교리직(校理職)을 그만두고 해주 야두촌(野頭村)으로 물러갔을 때 경향 각지에서 그의 학문과 덕행을 흠모하던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이듬해 이이는 문인들과 고산의 석담을 돌며 구곡의 이름을 짓고 이 곳에 정착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1575년(선조 8) 황해도 관찰사로 있다가 다시 석담으로 돌아와 주희(朱熹)가 만년에 은거하면서 경영한 무이정사(武夷精舍)와 무이구곡(武夷九曲)의 자연을 읊은 「무이도가(武夷櫂歌)」를 본떠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세웠고, 1578년에는 「고산구곡가」를 지었다.
매수가 “일곡(一曲)은 어드메오…”하는 식으로 시작되는 연작 시조인 「고산구곡가」는 「무이구곡가」와 마찬가지로 첫 구절을 통해 실경의 현장으로 인도하며, 이어서 특정 장소의 자연을 묘사하였다. 한글을 섞은 3·4조의 경쾌한 리듬으로 진행되는 이와 같은 노래는 이미 이황(李滉)이 주희를 흠모한 나머지 도산에 은거하면서 지은 「도산십이곡」에서도 나타난다. 「고산구곡가」의 내용은 도학가(道學歌) 또는 수도가(修道歌)이다. 하지만 종래의 팔경시(八景詩)에 비해 한정된 자연을 묘사하는 성격을 띤다.
우리나라 구곡도는 주희의 은거처를 그린 중국의 무이구곡도가 전래되면서 그 영향을 받아 발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년이 있는 가장 이른 작품으로 이성길(李成吉)의 「무이구곡도」(1592년, 국립중앙박물관)가 전하고 있다. 이황이 생전에 「무이구곡도」에 큰 관심을 보였고, 당시 중종도 ‘도산도(陶山圖)’를 그려 오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황은 도산에 구곡을 두지 않았다.
고산구곡도는 이이가 별세한 뒤 문인들에 의하여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와 관련되는 기록이 권섭(權燮)의 「옥소장계(玉所藏呇)」에 수록된 ‘고산구곡도설(高山九曲圖說)’에서 확인된다. 그 내용은 이이의 서현손(庶玄孫)인 이석(李석(禾+奭))이 그린 「고산구곡도」를 원만령(元萬齡)이 소장하고 있다가 김수증(金壽增)에게 주었다. 그리고 김수증으로부터 그 작품을 증여받은 송시열(宋時烈)은 김수증, 김수항(金壽恒), 권상하(權尙夏) 등 9명에게 「고산구곡가」의 차운시를 짓게 하여 그림과 함께 장정(裝幀)하였다고 한다.
현존하는 「고산구곡도」는 병풍 형식으로 민간에 널리 유포되고 있으며 민화(民畵)로까지 발전되었다. 1781년(정조 5년) 정조의 명으로 그려진「고산구곡도」가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고산구곡시화도 병풍(국보, 1987년 지정)이 있는데, 1803년(순조 3) 노론계의 사대부, 문인, 화가 등 총 21명이 발(跋)·제(題)·시(詩)·서(書)·화(畵)·평(評) 등을 맡아 제작한 것이다.
「고산구곡도」는 계회도 등과 함께 우리나라 초기 실경산수화 발전의 예가 되며, 노론 성리학자들의 결속을 다지는 이념적인 그림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