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殷)나라 탕왕(湯王) 때 제후국의 하나로 책봉되었다. 군성(君姓)은 묵태씨(墨胎氏)이다. 주나라 초기에 고죽군(孤竹君)의 두 아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은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 위해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고 수양산(首陽山)에 숨어 살면서 고사리를 꺾어 먹다가 굶어죽었다는 전설로 유명한 나라이다.
문헌에서 고죽성(孤竹城)은 요서군(遼西郡) 영지현(令支縣), 하북성(河北省) 노령현(盧龍縣) 일대, 또는 산해관(山海關) 부근, 조양현(朝陽縣) 서남 지구 등으로 나타난다. 세력 범위가 난하(灤河) 하류에서 대릉하(大凌河)에 걸치는 발해만 북안 일대이고, 그 중심지는 대릉하 상류의 요령성(遼寧省) 객좌현(喀左縣) 지역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지역의 독특한 청동기 문화와, 은나라 영토가 중국의 장성(長城) 이북까지 미친 적이 없었다는 점을 들어, 고죽국(孤竹國)을 요령 지방에 비정(比定)하는 것을 부인하는 견해도 있다.
1970년대에 중국 요령성 객좌현 북동촌(北洞村) 고산(孤山)에서 ‘고죽(0x9564{{#027}}을 0x9565竹→孤竹으로 해석)’이라는 명문이 있는 은나라 말기의 청동제 제기가 발견됨으로써 그 지리적 위치가 확인되었으며, 역사적으로 실재했음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하려는 노력이 시도되고 있다.
특히 그 곳에서 가까운 지역에서 ‘기후(㠱侯)를 문헌의 箕侯→箕子로 해석)’라는 명문이 있는 청동기가 함께 발견됨으로써 그러한 시도는 고죽국 지역에 기자조선(箕子朝鮮)이 있었다는 ‘기자조선 긍정설’의 새로운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나아가 “고려의 땅이 원래 고죽국이며 주대에 기자가 책봉된 곳”이라는 문헌 기록을 근거로 고죽국이 바로 기자조선이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
그러나 기후(㠱侯)라는 글자는 은나라의 갑골문(甲骨文)이나 금문(金文)에도 자주 보이며 ‘기후’ 명문이 있는 청동기는 중국의 산동 지방이나 하남(河南) · 안양(安陽) · 낙양(洛陽) 등지에서도 많이 발견되기 때문에, ‘기후’ 명문 청동기만으로 객좌현을 특정 인물인 ‘기자’의 봉지(封地)라고 보는 것은 근거가 희박하다는 반론도 있다.
또 ‘0x9564({{%118}}){{#027}}’을 고죽으로 읽고 고죽국과 연결시킨 명문 해석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기자조선설과 함께 고죽국과 기자를 관련짓는 논리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견해도 있다.
현재까지 객좌현 일대에서 발굴된 상 · 주대(商 · 周代) 청동예기는 대부분 저장갱 형태의 유적에서 발굴되고 있으며, 이들 예기의 주된 내용은 대부분 인근의 족(族) 또는 국(國)의 휘호나 성씨 혹은 인명이다. 또한 또 다른 청동기에 “연후(燕侯)의 상사(賞賜)를 받는” 등의 명문이 있어 이 일대에 거주한 이들이 연후(燕侯)와 모종의 복속관계를 맺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기(㠱)’명이 있는 청동기는 상말∼주초부터 춘추시대까지 계속 제작된 것으로 주로 산동성 관내에서 출토된다. 따라서 이러한 기국의 청동기가 요령성 객좌현 일대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은 현 산동성 동남쪽에 위치했던 기족집단이 요령성 객좌현 일대로 이동했음을 암시해 주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즉, 상의 일족인 기자의 후예가 하북성 정현(定縣) 부근에 국을 세운 것은 거의 확실하지만 요서 지역에서 확인된 ‘기(箕)’는 연에 복속된 소국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기국의 한 지파가 세운 ‘상의 후국’을 기자조선과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들 씨족집단의 파견은 그 지역 주민의 구성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며 주초의 봉국 또는 씨족집단의 이동은 그 집단 전체라기보다는 일부세력이나 지배집단의 이동에 국한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고죽을 기자의 후예가 요서 지역에서 세운 기자조선이라는 하나의 국가로 파악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