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협(高協)은 영화제작과 중앙 및 지방공연을 많이 해 온 극단으로 청춘좌(靑春座)·호화선(豪華船)·아랑(阿娘) 등과 함께 광복 이전 4대 흥행극단으로 알려져 있다.
창단 단원은 심영(沈影)·주인규(朱仁奎)·박창한(朴昌漢)·김동규(金東奎)·유현(柳玄)·이재현(李載玄)·고기봉(高奇峯)·송창관(宋創冠)·이길룡(李吉龍)·김연실(金蓮實)·노재신(盧載信)·지계순(池季順)·강보금(姜寶金)·송추련(宋秋蓮)·유성애(柳誠愛)·김길봉(金吉峰)·김영순(金永順)·이길재(李吉宰)·최옥선(崔玉善)·나웅(羅雄)·박영호(朴英鎬)·강성범(姜聖範) 등이었다. 이들은 고양군에 고협촌(高協村)을 만들고 영화를 제작하면서 틈틈이 연극을 연습하고 공연하였다.
창립공연은 1939년 3월 1일부터 다비트비라스의「윙」, 박영호(朴英鎬)의「연애문제」, 송영(宋影)의「버들피리」, 이재현(李載玄)의「어느 문학청년의 하루」등 지방(무산·간도) 순회공연으로 대신하였다. 그 해 12월 서울 부민관(府民館)에서 이태준(李泰俊)의「어머니」, 박영호의「정어리」를 공연하였다.
1940년 3월 창립 1주년 기념공연으로 부민관에서 유치진(柳致眞) 각색의「춘향전」을 공연하였는데, 이때 수익금으로 ‘조선연극상(朝鮮演劇賞)’을 제정하였다(희곡상 500원). 이 때 심사위원으로 박승희(朴勝喜)·임화(林和)·김남천(金南天)·함대훈(咸大勳)·유치진·유진우(柳鎭牛)·이태준(李泰俊) 등을 위촉하였다.
같은 해 9월 부민관에서 현진건(玄鎭健) 작, 함세덕(咸世德) 각색, 유치진 연출의「무영탑」을 공연하고, 곧 이어 전국의 주요도시를 순회하며 공연하였다. 공연작품은「정어리」·「어머니」외에 유치진 각색「춘향전」과 함세덕 작「해연(海燕)」과「무영탑」, 송영 작「버들피리」와「그 여자의 일생」, 박진(朴珍) 번안「쾌걸 윙」등이었다. 같은 해 12월 22일부민관 중강당에서 조선연극협회(朝鮮演劇協會)가 결성되자 ‘고협’을 포함한 9개 연극단체가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강요로 가맹하였다.
1941년 3월 창립 2주년 기념으로 유치진 작「하멸태자」와「낙랑공주」를 공연하였고, 10월에는 조선연극협회가 주최하는 연극보국 주간에 박영호의「등잔불」을 가지고 참가하였다.
1942년 1월 임선규(林仙圭) 작「동백꽃 피는 마을」을 공연하고 곧 이어 지방순회공연을 하였으며, 10월조선연극문화협회(朝鮮演劇文化協會)가 주최한 제1회 연극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임선규 작·전창근(全昌根) 연출의「빙하(氷河)」로 단체상(총독상)을 수상하였다. 이어 12월 송영 작·전창근 연출의「노처녀기」·「주부 경제학」·「부엉이 우는 마을」을 공연하였다.
1943년 12월 제 2회 연극경연대회에서 일어극(日語劇) 김태진(金兌鎭) 작「아름다운 고향」으로 다시 단체상을 수상하였다. 1944년에도 공연활동은 꾸준하였으며, 그 해의 공연작품은 현진건 원작·함세덕 각색의「무영탑」, 일어극「한역(寒驛)」, 김태성 작「흰독수리」, 김태진 작「3남매」, 송영 작「해당화 피는 섬」등이었다.
1945년 1월부터 6월까지 서울 약초극장(若草劇場)에서 여섯 차례 정기공연을 가졌는데, 신작으로는 이서향(李曙鄕) 작「만리장성」, 임선규 작「상아탑에서」, 전창근 작「양자강」등이 있었다.
극단 고협은 젊은 패기를 지닌 많은 작가와 연출가·무대장치가를 동원하여 언제나 새로운 연극의 조화미를 살리려고 노력하였다. 주로 지방공연이 많았고 개인적 명성과 인기를 얻으려는 ‘스타시스템’을 배격하고 무대의 균형과 앙상블을 중요시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주로 영화인들이 주축이 되다보니 예술적 의미와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